즉위와 통치 과정을 생각하면, 영조가 세자에게 보여준 압박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유학의 윤리와 신임의리로 무장한 노론을 억누르며 통치하기 위해서는 왕 본인이 최고의 유학자가 되어야 한다.
평생 공부를 즐긴 영조 본인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하는 세자를 보며
영조는 자신이 애써 강화한 왕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의 실망은 세자를 더 강하게 훈육하는 시도로 나타났고,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는 이러한 억압에 더 강하게 반항한다.
임오화변의 의미
영화 〈사도〉는 2015년 추석 무렵 개봉하여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아, 사극 중에서 역대 흥행 7위를 기록했다. 개봉한 지 7년이나 지난 영화를 뒤늦게 꺼내는 이유는 권력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영화는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양력 7월 4일 발생) 전날(혹은 전전날) 세자가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조선 21대 임금, 1724-1776 재위)를 시해하기 위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역사는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 경과를 뻔히 알고 있지만, 영화는 저 장면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생기고 증폭되다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사도〉 포스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전에, 이 사건을 서술하는 '임오화변'이라는 말부터 짚어보자. 애초 화변(禍變)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즉, '임오년에 일어난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말 자체가 이 사건의 비정상성을 말해준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집필하면서 용어 선택에 그의 가치관과 역사적 정당성을 담았다. 예컨대 정상적으로 즉위한 군주면 '나라이름+작위'로 호칭했지만(제환공, 진 문공 등), 비정상적인 방법 혹은 군주를 시해하면서 즉위한 군주는 이름으로 호칭했다. 이처럼 동양적 사관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면서 선택된 용어에 가치관이 담기는데, 그렇다면 임오화변이라는 말에 이 사건을 보는 당대 혹은 후대 사람들의 관점과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사도세자가 정말 역모를 꾸몄다면 화변이 아니라, 무인년(1398년)에 정안공(靖安公) 이방원이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일파를 숙청한 무인정사(戊寅靖社)나, 계유년(1453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숙청한 계유정난(癸酉靖難)처럼 '사직을 안정시킴(정사, 靖社)' 혹은 '난을 평정함(정난, 靖難)'이라는 이름으로 서술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 사건의 본질은 영화 초반에 영조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임금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아비를 죽이려 한 자식을 벌하는 것"이었으나, 그 방식과 과정이 비정상적이어서 화변이라 불린 것이다.
좋고 싫음 분명했던 임금과 정반대인 세자
영화는 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와 영조와 세자의 기질 차이로 인한 갈등의 발생과 증폭을 그리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실제 실록을 봐도, 영조는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상당히 꼼꼼하며, 문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임에 반해 세자는 그 반대 성향이다. 예컨대, 실록에 기록된 바 있는 "네가 한무제(한나라의 7대 황제)를 통쾌하게 여김을 내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하여 문제(한나라의 5대 황제)와 경제(한나라의 6대 황제)의 다스림을 칭송하느냐?"라는 영조의 세자에 대한 일갈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기질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영조와 세자의 기질 차이는 곧 좋고 싫음이 분명한 영조의 성격과 연결되어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시켰다.
영화 속에서 영조와 세자가 대화하는 모습(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영조는 왜 저런 성격을 갖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의 책 〈권력과 인간〉에 잘 서술되어 있지만, 여기서 굳이 간략하게 말을 하자면, 영조의 신분과 즉위 과정에서 온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영조의 신분을 살펴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조는 숙종(조선 19대 임금, 1667-1674 재위)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숙종의 장자는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이다. 사족으로 숙종은 평생 세 명의 왕비를 들였는데,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마지막 인원왕후가 바로 영화에서 세자를 아끼는 왕대비다. 다시 돌아가서, 숙빈 최씨는 간택 후궁이나 궁녀 중에서 승은(承恩, 임금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는 일)을 입어 빈으로 봉해진 사람이 아니라, 궁녀들의 시녀인 무수리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정병설 교수는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니라 침방 궁녀의 하녀 출신이라는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모친의 낮은 신분은 영조의 콤플렉스로 작용했고, 이에 더해 둘째 왕자라는 불안한 신분은 그의 행동거지와 사고방식이 신경질적이고 조심스럽게 되는 쪽으로 작용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귀를 씻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영조의 까다로운 모습은 아마도 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영조의 성격과 그의 즉위 전반기를 규정하는 일이 경종(조선 20대 임금, 1720-1724 재위) 1년(1721년) 신축년에 일어난 신축환국(辛丑換局)과 경종 2년(1722년)인 임인년에 일어난 임인옥사((壬寅獄事)다. 이 둘을 묶어서 신임옥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영조 전반기를 규정한 이른바 '신임의리'가 나온다.
대리청정 요구, 독살 시도 등에 시달렸던 선대왕 경종
신임의리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신임옥사를 먼저 살펴보자. 숙종이 죽고 남인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경종에게 연잉군(영조의 세자시절 호칭)을 왕세제로 세우라고 압박하고, 심지어 왕에게 대비(大妃)인 인원왕후 김씨에게 경종 이후 누구를 왕으로 할 것인지를 정한 글을 받아오라는 요구를 한다. 수렴청정도 아니고, 서른이 넘어 장성한 왕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왕권을 무시하는 행위였지만 경종은 이를 수용하였다.
경종 상상 어진(이미지 출처: 중앙일보)
목적을 달성한 노론은 더 나아가 왕에게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물려받을 왕의 동생)인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 왕 대신 세자가 국사를 돌보도록 하는 일)을 시키라는 요구를 한다.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장성한 왕에게 신하들이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자 사실상의 역모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왕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거나 선위(禪位, 살아있는 왕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는 일)하겠다고 하면 신하는 물론 세자까지도 뜻을 철회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왕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바로 받아들이면 그 역시 역모에 준하는 왕권에 대한 무시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노론의 대리청정 요구를 물리치고 모두 역적으로 처분함이 옳지만, 놀랍게도 경종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흔쾌히 윤허한다. 이에 놀란 소론 전부와 노론 상당수, 그리고 왕세제 연잉군까지 나서서 명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하여 대리청정은 취소된다. 그리고 대리청정을 청한 노론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집권당이 소론으로 바뀌니 이 사건이 신축환국이다.
다음 해인 임인년(1722년), 지관 목호룡이 임금에게 역모를 고변(告變)한다. 역모의 내용은 노론이 칼·독약·반정이라는 세 방법을 사용하여 경종을 살해하고 좌의정 이이명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목호룡의 고변은 사실로 밝혀졌다. 소론은 이를 계기로 노론 숙청을 주장했고 경종은 이를 따랐다. 대리청정 논란으로 이미 귀양을 간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함)되고, 100명이 넘는 노론 사람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어 조정에서 노론의 씨가 마르다시피 된다. 노론을 후원 세력으로 둔 왕세제 연잉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삼수의 옥'이라고도 불리는 임인옥사다. 왕세제 연잉군도 이 사건으로 죽을 수 있었지만, 경종은 끝까지 왕세제는 연루시키지 않다가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영조다.
후원자 노론 버릴까 말까 골머리 앓았던 영조
조선왕조를 통틀어 정통성을 갖고 왕위에 즉위한 얼마 안 되는 왕이자, 46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강력한 왕권으로 노회한 신하들을 장악한 숙종, 숙종의 뒤를 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의 정쟁에 시달린 경종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두 가지 짐을 지게 되었다. 그것은 신임옥사를 감당하면서까지 영조 자신을 지지한 노론에 대한 의리와 이러한 노론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정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는 영조에게 있어 하나의 딜레마였다.
영조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조정의 주요 관직에 각 당파를 고르게 기용하는 일)를 통한 탕평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노론은 끊임없이 신임의리를 내세우며 왕을 압박했고, 이는 탕평책을 펼치려는 영조로 하여금 노론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소론을 불러들여야 할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러들인 소론은 소론대로 경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역모를 시도했는데, 이인좌의 난이 대표적 예다. 영조는 노론을 등용하면 신임의리에 얽매이게 되고, 탕평을 위해 소론을 등용하면 역모로 인해 그들을 다시 축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영조의 즉위와 통치 과정을 생각하면, 영조가 세자에게 보여준 압박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유학의 윤리와 신임의리로 무장한 노론을 임금이자 스승으로서 억누르며 통치하기 위해서는 왕 본인이 학문적 지식과 윤리를 갖춘 최고의 유학자가 되어야 했다. 평생 공부를 즐긴 영조 본인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하는 세자를 보며 영조는 자신이 애써 강화한 왕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의 실망은 세자를 더 강하게 훈육하는 시도로 나타났고,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는 이러한 억압에 더 강하게 반항한다.
아버지의 훈육과 아들의 반항이라는 이 끊임없는 상승작용은 세손, 즉 훗날의 정조가 태어나고 그가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게 되자 영조의 마음이 세손에게 쏠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 후반부에 정조가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거나,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인 영조가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손을 지키기 위한 영조의 결정
우리는 위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있어 ‘집안일’이라는 것을 강조했음을 보았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사도세자가 역모로 죽은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여주고 있는데, 이 사실은 세자가 죽더라도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영조의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이 생각하고 멀리까지 내다보는 일)다. 세자는 역적으로 죽으면 안 된다. 역적이 되면 그 아들인 세손도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조에게 있어 최선은 세자가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던 것이다. 자결을 하면 역적이 아닌 세자로서 삶을 마감한 것이고,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주변의 만류로 자결을 할 수 없었던 아들에게 아버지이자 왕인 아버지 영조가 내린 처벌은 뒤주에 가두는 일이다. 세자가 죽자마자,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임오화변에서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영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일설에서는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영조는 죽은 사람의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에 따라 시호를 내렸을 뿐이다. 시법에 의하면 사도의 뜻은 이렇다.
追悔前過曰思. 思而能改.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年中早夭曰悼. 年不稱誌. (연중조요왈도 연불칭지)
이전의 과오를 뉘우쳤을 때는 사(思)로 한다. 사(思)는 (그런 과오를) 능히 고친 것이다.
연중에 일찍 죽었을 때는 도(悼)로 한다. 그 해가 아니라면 칭하거나 부를 수 없다.
영조는 세자가 죽음으로서 과오를 뉘우쳤고, 죽은 날이 한여름인 음력 윤5월 21일(양력 7월 4일)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시호를 내렸을 뿐이다.
부자간 갈등이 불러온 비극적 사건
임오화변은 영조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자신이 준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광증을 보인 아들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론과 소론의 당쟁 사이에서 노론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 그리고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 등 노론이 합세하여 세자를 모살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비와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될 터인데 굳이 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으며, 정순왕후 김씨 역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이 극에 달한 이후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순왕후 김씨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묘사한 것처럼 세손이 왕위에 오른 초반까지 세손의 든든한 후견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노론 음모론의 요지는 "성군의 자질을 보이면서 소론을 가까이하는 사도세자를 노론 일파가 모함해서 죽인 것이 임오화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사도세자는 전혀 성군의 자질을 보이지 않았다.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칼쓰기, 활쏘기, 말달리기 등 무예와 그림 그리기 등을 즐긴 사도세자는 일국의 군왕이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웠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서연(書筵, 왕세자를 위한 교육)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해에 얼마나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고작 한두 번에 그치옵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 예다. 무예와 예술을 좋아한다고 임금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예와 예술을 좋아하는 임금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는 송 휘종(중국 북송의 8대 황제)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전혀 성군의 자질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둘째, 세자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사도세자는 의대증(疑帶症)이라고 하여 옷을 입을 때 자기 뜻대로 입혀지지 않으면 옷을 찢거나 내관이나 궁녀를 때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일이 잦았다. 영화에서 옷을 입다가 찢어버리며 내관을 죽이는 장면이 한 번 나오는데,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궁녀와 내관들을 죽였다. 세상에 무고한 궁녀와 내관을 죽이는 성군도 있는가?
셋째, 사도세자는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의 지나친 압박과 미움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여색을 탐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실록이나 한중록을 보면 사도세자는 하루걸러 하루 궁녀들을 침전으로 들였으며, 심지어 왕대비인 인원왕후와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죽은 이후 그 궁녀들까지 범하여 영조에게 "인륜도 모르는 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신병적 증세를 보였다. 그러할진대 어찌 그가 성군의 재목이 될 수 있겠는가?
장인인 홍봉한은 마지막까지 세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드라마에 악녀처럼 묘사되었던 사도세자의 친동생 화완옹주는 세자와 유달리 가까운 사이였으며,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더불어 노론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 김씨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 재위 30년이 넘은 영조는 조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으며, 그렇게 되면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를 모함하는 일은 그들에게 지나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노론 일부나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가 세자를 모함하려 했다면 굳이 ‘나경언의 고변(告變)’(형조판서 윤급의 종이었던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알렸던 일)을 통할 것 없이 이미 세자에게 마음이 떠난 영조에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과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세자의 비행을 고한 일을 통해서야 영조가 세자의 모든 비행을 알고 죽이려 결정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임오화변의 처음부터 끝이 모두 영조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실록이나 한중록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로 시작되는 정조의 즉위 일성을 상당히 많은 사람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니, 아버지를 죽인 노론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오독하곤 한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정조의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선대왕이신 영조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세웠고, 사도세자의 일을 더는 거론하지 말며, 그를 추숭하려 하는 사람은 모두 역적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나는 선대왕이신 영조의 뜻을 좇을 것이며 앞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은 거론하지 말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그의 말과 달리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원으로 무덤을 이장하고 그 격식을 묘(墓)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높이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영조 포준 어진(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임오화변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이다. 왕이나 왕위 계승자가 아들이나 형제를 죽이는 사례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 끝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임오화변은 권력 다툼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 아버지와 아들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 만약 영조가 신임의리와 경종 독살설로 인한 끊임없는 역모에 시달리는 왕이 아니었더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사실이 임오화변을 더욱 비극으로 만든다.
금융공학 박사
아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금융공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전공인 금융공학만큼 역사와 금융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주 관심 분야는 경제성장과 금융시장의 기능에 있어 역사적, 제도적 선택이 끼친 영향이다. 조선사에 대한 관심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와 경제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현재는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어머니, 아들을 죽인 아버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어머니, 아들을 죽인 아버지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정재웅
2022-04-22
즉위와 통치 과정을 생각하면, 영조가 세자에게 보여준 압박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유학의 윤리와 신임의리로 무장한 노론을 억누르며 통치하기 위해서는 왕 본인이 최고의 유학자가 되어야 한다.
평생 공부를 즐긴 영조 본인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하는 세자를 보며
영조는 자신이 애써 강화한 왕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의 실망은 세자를 더 강하게 훈육하는 시도로 나타났고,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는 이러한 억압에 더 강하게 반항한다.
임오화변의 의미
영화 〈사도〉는 2015년 추석 무렵 개봉하여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아, 사극 중에서 역대 흥행 7위를 기록했다. 개봉한 지 7년이나 지난 영화를 뒤늦게 꺼내는 이유는 권력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영화는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양력 7월 4일 발생) 전날(혹은 전전날) 세자가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조선 21대 임금, 1724-1776 재위)를 시해하기 위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역사는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 경과를 뻔히 알고 있지만, 영화는 저 장면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생기고 증폭되다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사도〉 포스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전에, 이 사건을 서술하는 '임오화변'이라는 말부터 짚어보자. 애초 화변(禍變)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즉, '임오년에 일어난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말 자체가 이 사건의 비정상성을 말해준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집필하면서 용어 선택에 그의 가치관과 역사적 정당성을 담았다. 예컨대 정상적으로 즉위한 군주면 '나라이름+작위'로 호칭했지만(제환공, 진 문공 등), 비정상적인 방법 혹은 군주를 시해하면서 즉위한 군주는 이름으로 호칭했다. 이처럼 동양적 사관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면서 선택된 용어에 가치관이 담기는데, 그렇다면 임오화변이라는 말에 이 사건을 보는 당대 혹은 후대 사람들의 관점과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사도세자가 정말 역모를 꾸몄다면 화변이 아니라, 무인년(1398년)에 정안공(靖安公) 이방원이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일파를 숙청한 무인정사(戊寅靖社)나, 계유년(1453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숙청한 계유정난(癸酉靖難)처럼 '사직을 안정시킴(정사, 靖社)' 혹은 '난을 평정함(정난, 靖難)'이라는 이름으로 서술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 사건의 본질은 영화 초반에 영조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임금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아비를 죽이려 한 자식을 벌하는 것"이었으나, 그 방식과 과정이 비정상적이어서 화변이라 불린 것이다.
좋고 싫음 분명했던 임금과 정반대인 세자
영화는 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와 영조와 세자의 기질 차이로 인한 갈등의 발생과 증폭을 그리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실제 실록을 봐도, 영조는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상당히 꼼꼼하며, 문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임에 반해 세자는 그 반대 성향이다. 예컨대, 실록에 기록된 바 있는 "네가 한무제(한나라의 7대 황제)를 통쾌하게 여김을 내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하여 문제(한나라의 5대 황제)와 경제(한나라의 6대 황제)의 다스림을 칭송하느냐?"라는 영조의 세자에 대한 일갈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기질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영조와 세자의 기질 차이는 곧 좋고 싫음이 분명한 영조의 성격과 연결되어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시켰다.
영화 속에서 영조와 세자가 대화하는 모습(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영조는 왜 저런 성격을 갖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의 책 〈권력과 인간〉에 잘 서술되어 있지만, 여기서 굳이 간략하게 말을 하자면, 영조의 신분과 즉위 과정에서 온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영조의 신분을 살펴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조는 숙종(조선 19대 임금, 1667-1674 재위)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숙종의 장자는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이다. 사족으로 숙종은 평생 세 명의 왕비를 들였는데,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마지막 인원왕후가 바로 영화에서 세자를 아끼는 왕대비다. 다시 돌아가서, 숙빈 최씨는 간택 후궁이나 궁녀 중에서 승은(承恩, 임금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는 일)을 입어 빈으로 봉해진 사람이 아니라, 궁녀들의 시녀인 무수리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정병설 교수는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니라 침방 궁녀의 하녀 출신이라는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모친의 낮은 신분은 영조의 콤플렉스로 작용했고, 이에 더해 둘째 왕자라는 불안한 신분은 그의 행동거지와 사고방식이 신경질적이고 조심스럽게 되는 쪽으로 작용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귀를 씻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영조의 까다로운 모습은 아마도 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영조의 성격과 그의 즉위 전반기를 규정하는 일이 경종(조선 20대 임금, 1720-1724 재위) 1년(1721년) 신축년에 일어난 신축환국(辛丑換局)과 경종 2년(1722년)인 임인년에 일어난 임인옥사((壬寅獄事)다. 이 둘을 묶어서 신임옥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영조 전반기를 규정한 이른바 '신임의리'가 나온다.
대리청정 요구, 독살 시도 등에 시달렸던 선대왕 경종
신임의리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신임옥사를 먼저 살펴보자. 숙종이 죽고 남인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경종에게 연잉군(영조의 세자시절 호칭)을 왕세제로 세우라고 압박하고, 심지어 왕에게 대비(大妃)인 인원왕후 김씨에게 경종 이후 누구를 왕으로 할 것인지를 정한 글을 받아오라는 요구를 한다. 수렴청정도 아니고, 서른이 넘어 장성한 왕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왕권을 무시하는 행위였지만 경종은 이를 수용하였다.
경종 상상 어진(이미지 출처: 중앙일보)
목적을 달성한 노론은 더 나아가 왕에게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물려받을 왕의 동생)인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 왕 대신 세자가 국사를 돌보도록 하는 일)을 시키라는 요구를 한다.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장성한 왕에게 신하들이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자 사실상의 역모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왕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거나 선위(禪位, 살아있는 왕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는 일)하겠다고 하면 신하는 물론 세자까지도 뜻을 철회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왕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바로 받아들이면 그 역시 역모에 준하는 왕권에 대한 무시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노론의 대리청정 요구를 물리치고 모두 역적으로 처분함이 옳지만, 놀랍게도 경종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흔쾌히 윤허한다. 이에 놀란 소론 전부와 노론 상당수, 그리고 왕세제 연잉군까지 나서서 명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하여 대리청정은 취소된다. 그리고 대리청정을 청한 노론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집권당이 소론으로 바뀌니 이 사건이 신축환국이다.
다음 해인 임인년(1722년), 지관 목호룡이 임금에게 역모를 고변(告變)한다. 역모의 내용은 노론이 칼·독약·반정이라는 세 방법을 사용하여 경종을 살해하고 좌의정 이이명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목호룡의 고변은 사실로 밝혀졌다. 소론은 이를 계기로 노론 숙청을 주장했고 경종은 이를 따랐다. 대리청정 논란으로 이미 귀양을 간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함)되고, 100명이 넘는 노론 사람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어 조정에서 노론의 씨가 마르다시피 된다. 노론을 후원 세력으로 둔 왕세제 연잉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삼수의 옥'이라고도 불리는 임인옥사다. 왕세제 연잉군도 이 사건으로 죽을 수 있었지만, 경종은 끝까지 왕세제는 연루시키지 않다가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영조다.
후원자 노론 버릴까 말까 골머리 앓았던 영조
조선왕조를 통틀어 정통성을 갖고 왕위에 즉위한 얼마 안 되는 왕이자, 46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강력한 왕권으로 노회한 신하들을 장악한 숙종, 숙종의 뒤를 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의 정쟁에 시달린 경종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두 가지 짐을 지게 되었다. 그것은 신임옥사를 감당하면서까지 영조 자신을 지지한 노론에 대한 의리와 이러한 노론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정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는 영조에게 있어 하나의 딜레마였다.
영조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조정의 주요 관직에 각 당파를 고르게 기용하는 일)를 통한 탕평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노론은 끊임없이 신임의리를 내세우며 왕을 압박했고, 이는 탕평책을 펼치려는 영조로 하여금 노론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소론을 불러들여야 할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러들인 소론은 소론대로 경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역모를 시도했는데, 이인좌의 난이 대표적 예다. 영조는 노론을 등용하면 신임의리에 얽매이게 되고, 탕평을 위해 소론을 등용하면 역모로 인해 그들을 다시 축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영조의 즉위와 통치 과정을 생각하면, 영조가 세자에게 보여준 압박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유학의 윤리와 신임의리로 무장한 노론을 임금이자 스승으로서 억누르며 통치하기 위해서는 왕 본인이 학문적 지식과 윤리를 갖춘 최고의 유학자가 되어야 했다. 평생 공부를 즐긴 영조 본인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하는 세자를 보며 영조는 자신이 애써 강화한 왕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의 실망은 세자를 더 강하게 훈육하는 시도로 나타났고,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는 이러한 억압에 더 강하게 반항한다.
아버지의 훈육과 아들의 반항이라는 이 끊임없는 상승작용은 세손, 즉 훗날의 정조가 태어나고 그가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게 되자 영조의 마음이 세손에게 쏠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 후반부에 정조가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거나,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인 영조가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손을 지키기 위한 영조의 결정
우리는 위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있어 ‘집안일’이라는 것을 강조했음을 보았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사도세자가 역모로 죽은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여주고 있는데, 이 사실은 세자가 죽더라도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영조의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이 생각하고 멀리까지 내다보는 일)다. 세자는 역적으로 죽으면 안 된다. 역적이 되면 그 아들인 세손도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조에게 있어 최선은 세자가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던 것이다. 자결을 하면 역적이 아닌 세자로서 삶을 마감한 것이고,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주변의 만류로 자결을 할 수 없었던 아들에게 아버지이자 왕인 아버지 영조가 내린 처벌은 뒤주에 가두는 일이다. 세자가 죽자마자,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임오화변에서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영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일설에서는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영조는 죽은 사람의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에 따라 시호를 내렸을 뿐이다. 시법에 의하면 사도의 뜻은 이렇다.
追悔前過曰思. 思而能改.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年中早夭曰悼. 年不稱誌. (연중조요왈도 연불칭지)
이전의 과오를 뉘우쳤을 때는 사(思)로 한다. 사(思)는 (그런 과오를) 능히 고친 것이다.
연중에 일찍 죽었을 때는 도(悼)로 한다. 그 해가 아니라면 칭하거나 부를 수 없다.
영조는 세자가 죽음으로서 과오를 뉘우쳤고, 죽은 날이 한여름인 음력 윤5월 21일(양력 7월 4일)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시호를 내렸을 뿐이다.
부자간 갈등이 불러온 비극적 사건
임오화변은 영조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자신이 준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광증을 보인 아들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론과 소론의 당쟁 사이에서 노론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 그리고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 등 노론이 합세하여 세자를 모살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비와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될 터인데 굳이 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으며, 정순왕후 김씨 역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이 극에 달한 이후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순왕후 김씨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묘사한 것처럼 세손이 왕위에 오른 초반까지 세손의 든든한 후견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노론 음모론의 요지는 "성군의 자질을 보이면서 소론을 가까이하는 사도세자를 노론 일파가 모함해서 죽인 것이 임오화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사도세자는 전혀 성군의 자질을 보이지 않았다.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칼쓰기, 활쏘기, 말달리기 등 무예와 그림 그리기 등을 즐긴 사도세자는 일국의 군왕이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웠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서연(書筵, 왕세자를 위한 교육)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해에 얼마나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고작 한두 번에 그치옵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 예다. 무예와 예술을 좋아한다고 임금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예와 예술을 좋아하는 임금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는 송 휘종(중국 북송의 8대 황제)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전혀 성군의 자질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둘째, 세자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사도세자는 의대증(疑帶症)이라고 하여 옷을 입을 때 자기 뜻대로 입혀지지 않으면 옷을 찢거나 내관이나 궁녀를 때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일이 잦았다. 영화에서 옷을 입다가 찢어버리며 내관을 죽이는 장면이 한 번 나오는데,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궁녀와 내관들을 죽였다. 세상에 무고한 궁녀와 내관을 죽이는 성군도 있는가?
셋째, 사도세자는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의 지나친 압박과 미움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여색을 탐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실록이나 한중록을 보면 사도세자는 하루걸러 하루 궁녀들을 침전으로 들였으며, 심지어 왕대비인 인원왕후와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죽은 이후 그 궁녀들까지 범하여 영조에게 "인륜도 모르는 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신병적 증세를 보였다. 그러할진대 어찌 그가 성군의 재목이 될 수 있겠는가?
장인인 홍봉한은 마지막까지 세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드라마에 악녀처럼 묘사되었던 사도세자의 친동생 화완옹주는 세자와 유달리 가까운 사이였으며,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더불어 노론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 김씨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 재위 30년이 넘은 영조는 조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으며, 그렇게 되면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를 모함하는 일은 그들에게 지나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노론 일부나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가 세자를 모함하려 했다면 굳이 ‘나경언의 고변(告變)’(형조판서 윤급의 종이었던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알렸던 일)을 통할 것 없이 이미 세자에게 마음이 떠난 영조에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과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세자의 비행을 고한 일을 통해서야 영조가 세자의 모든 비행을 알고 죽이려 결정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임오화변의 처음부터 끝이 모두 영조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실록이나 한중록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로 시작되는 정조의 즉위 일성을 상당히 많은 사람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니, 아버지를 죽인 노론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오독하곤 한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정조의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선대왕이신 영조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세웠고, 사도세자의 일을 더는 거론하지 말며, 그를 추숭하려 하는 사람은 모두 역적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나는 선대왕이신 영조의 뜻을 좇을 것이며 앞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은 거론하지 말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그의 말과 달리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원으로 무덤을 이장하고 그 격식을 묘(墓)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높이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영조 포준 어진(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임오화변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적인 사건이다. 왕이나 왕위 계승자가 아들이나 형제를 죽이는 사례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 끝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임오화변은 권력 다툼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 아버지와 아들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 만약 영조가 신임의리와 경종 독살설로 인한 끊임없는 역모에 시달리는 왕이 아니었더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사실이 임오화변을 더욱 비극으로 만든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어머니, 아들을 죽인 아버지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애초에 역사가 아닌데…, 사람 닮은 인형이 사람일까
금융공학 박사
아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금융공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전공인 금융공학만큼 역사와 금융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주 관심 분야는 경제성장과 금융시장의 기능에 있어 역사적, 제도적 선택이 끼친 영향이다. 조선사에 대한 관심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와 경제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현재는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어머니, 아들을 죽인 아버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역사가 아닌데… 사람 닮은 인형이 사람일까
이문영
영화 <포화 속으로> 신파적 서사 속에서 사라진 역사적...
임영대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