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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그저 여성편력이나 일삼던 왕이었나?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신채용

2022-11-16

숙종은 1661년(현종 2)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고, 1667년(현종 8) 7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3년 뒤에 동갑내기 서인 가문의 김만기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 후일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세자빈 간택은 당연 국왕이었던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가 결정했다. 서인 가문에서 세자빈이 간택된 것은 당시 왕비이었던 명성왕후가 서인 가문이었으며......



숙종시대에 대한 인식


 

조선왕조 숙종이라고 하면 대중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인현왕후와 희빈장씨,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일 것이다. 숙종시대를 주제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항상 이 여인들이 빠진 적이 없을 만큼 숙종의 여인들은 비련의 주인공이거나, 미천한 궁녀(또는 무수리)에서 후궁 나아가 중전에까지 오른 당시로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숙종시대는 서인과 남인의 잦은 정권교체와 상대 당에 대한 살육이 벌어지는 ‘당쟁’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크다.


과연 그러할까.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당쟁의 시대’로 평가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국왕 숙종의 노련한 정치 수완으로 국왕 주도의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정국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고, 사상과 문화적 측면에서는 조선 고유색의 ‘진경문화’가 발흥했던 시대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숙종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리고 인현왕후나 희빈장씨 등의 기구한 생애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숙종시대의 모습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숙종시대의 모습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국왕 주도의 환국을 통한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비의 운명



조선왕조는 지위를 세습 받은 자가 대를 이어 국왕이 되던 시대였다. 보통의 경우 왕비 소생의 맏아들이 세자가 된 뒤 부왕(父王)이 승하하면 그 뒤를 이었고, 세자빈은 세자인 남편이 국왕이 되면 자연스레 왕비가 되었다. 조선왕조에서 국정의 최고 통치권자는 당연 국왕이었다. 국왕은 본인 주도의 정국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력이 필요했다. 대표적인 예로 외척을 들 수 있다. 외척은 왕권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왕권의 수호자이기도 하였다. 단종은 정당하게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하나의 이유가 바로 외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왕조 정치운영의 특성상 국왕을 제외한 최고의 권력은 누가 가지게 되었을까. 바로 세자빈, 나아가 왕비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세자빈 간택이 차기 국왕의 가장 측근이자 실세가 되는 정치적 이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는 1651년(효종 2) 세자빈이 되었는데 당시 그녀의 할아버지가 바로 당시 대동법 추진의 책임자이었던 김육(金堉)이었다. 효종은 김육에게 자신과 사돈이라는 가장 막강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고서 대동법을 추진하게 했던 것이다.


숙종은 1661년(현종 2)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고, 1667년(현종 8) 7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3년 뒤에 동갑내기 서인 가문의 김만기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 후일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세자빈 간택은 당연 국왕이었던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가 결정했다. 서인 가문에서 세자빈이 간택된 것은 당시 왕비이었던 명성왕후가 서인 가문이었으며, 현종 즉위 당시 1차 예송에서 서인 측이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특히 세자빈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인의 영수이자 산림(山林)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그만큼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정치적 위상이 막강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산림이란 원래 재야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덕망을 갖춘 학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사림정치(士林政治)가 발달하면서 그들은 각 붕당과 학파 안에서 학문적 이념과 집권 명분을 제공하는 유림의 대표적인 인사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산림들의 문인들이 주로 삼사에 포진하면서 주로 국왕 측 인사들이었던 고위 관료에 대한 감찰과 탄핵 및 국왕에 대한 간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세자이었던 숙종이 14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세자빈이 왕비가 되었지만 서인 세력은 숙종의 즉위와 함께 정치적으로 패퇴하게 되었다. 송시열의 막강한 위상은, 같은 서인이었지만 갈등이 있었던 왕실(주로 명성왕후)과 남인 세력의 연합에 의해 2차 예송에서 남인의 예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송시열 및 서인은 왕실의 예(禮)를 그르친 죄인이 되어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숙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지만, 모후의 수렴청정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의 모후 명성왕후가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 사실이고,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는 국왕의 책사로서 뛰어난 정치 수완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현종의 유일한 아들로 왕위 된 숙종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는 왕권을 수호하였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4차례 집권 세력을 교체하였다. 이른바 ‘환국(換局)’이라는 것이다. 한 붕당이 주도하여 상대 붕당을 제거하고서 권력을 탈환한 것이 아닌, 국왕이 주도하여 집권 세력을 교체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숙종은 각 붕당의 영수(領袖)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였고, 그 결과 신하들은 이제 자파 내의 산림이 아닌 국왕 숙종의 지엄한 어명에 복종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인현왕후가 폐서인되기도 하였고, 후궁이었던 희빈장씨가 왕비에 오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송시열 초상 (출처: 의림지 역사박물관)

송시열 초상 (출처: 의림지 역사박물관)

 


숙종은 즉위한지 6년 만인 1680년(숙종 6) 집권 세력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하는 환국을 단행했다. 경신환국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애초 송시열 등 강성 서인 세력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인조반정 이후 거의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권 세력인 된 남인들의 정국 운영은 미숙했다. 또한 남인 영수 허적(許積)의 서자와 종친들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남인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집권 세력이 서인으로 교체되었으며 당시 왕비 인경왕후가 돌아가 새 왕비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당연 서인 가문이었던 민유중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가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 여인이 인현왕후이다. 인현왕후는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외손녀이었다. 게다가 인현왕후 간택을 즈음하여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와 송시열은 정치적 연대를 하였고, 그 결과 송준길은 이미 고인이었지만 그의 외손녀가 왕비가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송시열 등의 서인은 집권세력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숙종은 독자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번영과 종묘ㆍ사직의 안녕을 위해 후사에 관심이 클 수 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나이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왕자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안동김씨라는 명문가에서 특별히 후궁을 간택하기도 했다. 이때 후궁이 된 여인이 영조의 양어머니이었던 영빈김씨(寧嬪金氏)이다. 그런데, 숙종은 당시 희빈장씨를 총애하면서 아직 왕자를 낳지 않았지만 궁녀 출신인 그녀를 숙원(淑媛)에 봉해 주었다. 이때가 바로 1686년(숙종 12)이었다. 그 이듬해 3월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가 돌아갔고, 6월에는 현 왕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었던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이 돌아가면서 서인계 왕비 가문의 상징적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서인의 정치적 기반이 사라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현왕후 (출처:나무위키)

인현왕후 상상화 (출처: 나무위키)



그러던 중 1688년(숙종 14) 10월에 총애받던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으니 바로 경종(景宗)이다. 28세라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드디어 후사를 본 숙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씨가 낳은 왕자를 곧장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숙종의 이러한 급격한 조처는 원칙과 명분을 추상같이 내세웠던 송시열의 반발을 예상한 것이었다. 또한 이를 빌미로 당시 국왕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던 송시열을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대군(大君)을 낳을 수 있는 젊은 나이의 인현왕후가 살아있기에 후궁 소생의 왕자를 성급히 원자로 정하여 세자가 되게 하는 것은 원칙과 명분상 맞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송시열은 당연히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고, 그 결과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한양으로 압송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러면서 서인계 가문의 왕비 인현왕후도 폐서인(廢庶人) 되었고, 궁녀 출신의 후궁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숙종으로서는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는 왕비의 폐출이라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궁녀 출신이 왕비의 자리에 올라 여권(女權)을 신장하는 상징적 사건이 아니라, 서인을 제압하기 위한 조처의 결과 왕자를 낳은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상식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 5년이 지난 시기에 다시금 서인을 불러들이고 남인을 내치면서 폐출하였던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가 되게 하였고, 장씨를 후궁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숙종실록에 나오는 것처럼 숙종이 자신의 과오를 구구절절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다시금 사랑하게 돼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송시열 등 막강한 서인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군사(君師)의 위상



숙종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단행으로 다시금 집권 세력을 서인으로 교체하였다. 당시는 서인이 송시열을 따르던 노론과 윤증 등을 따르던 소론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다소 온건한 성향을 가진 세력은 소론이었다. 때문에 숙종은 비변사 등의 고위 관료는 소론으로, 삼사 등 강경한 언론권을 가진 자리에는 노론을 임명하여 서로가 견제하게 하는 노련한 정치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면서 숙종은 자신이 산림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사환국 이후 이미 사육신(死六臣)을 기리는 서원을 민절서원으로 사액하였고, 1698년(숙종 24)에는 노산대군이었던 단종을 추복하여 위패를 종묘에 모시면서 조선왕조의 정식 국왕으로 추향(追享)케 했으며, 1704년(숙종 30)에는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보내주었던 명나라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를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을 세워 지냈다. 1718년(숙종 44)에는 소현세자빈이었던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위패와 시호를 회복시켰다. 이 대부분 사업은 바로 산림 송시열이 주장하던 사업이었다.


게다가 숙종은 왕권의 물리적 권한인 군사권 또한 완벽하게 장악했다. 효종 때 수축되었던 북한산성 축조를 다시금 대대적으로 추진하여 완성하였고, 금군의 수를 늘리고 중앙 오군영(五軍營)의 편제를 정비하여 국왕, 병조판서, 오군영 대장으로 이어지는 군령의 일원화를 이루어내면서 세속적 군주이자 만백성의 스승인 ‘군사(君師)’가 된 것이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숙종은 그저 여성편력이나 일삼던 왕이었나?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한산>으로 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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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용

역사학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국고전번역원(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3년간 한학(漢學)을 연수하였다.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및 각 성씨의 옛 족보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를 통해 인물 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역사인물연구소장으로 간송미술관 객원연구원과 국민대학교 강사를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 왕실의 백년손님》(역사비평사, 2017)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영조대 탕평정국과 부마 간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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