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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으로 본 역사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김병륜

2022-10-07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웅이라는 칭호가 진정 어울리는 위인이다.

이순신이 치룬 해전이 세계 4대 해전에 속한다는 주장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이지만,

과거에 비하여 이순신 장군이 치룬 해전에 대한 관심이 외국에서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오직 이순신 한 명으로만 임진왜란 해전을 이해하려는 접근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와 역사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영화는 영화다. 역사를 소재로 다룬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자문 역할을 맡은 일이 몇 번 있다. 작가나 감독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가끔 꺼내는 말이 있다. “그건 작가가 결단할 영역이에요.”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들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 높이기 위해서 작가나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정도의 문제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영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사실관계가 궁금하면 관련 다큐나 역사책을 찾아서 보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다.


물론 관객이나 독자들은 역사를 소재로 만든 창작물이 실제와 너무 다르다고 느끼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사극 영화에서 쓰는 말투는 요즘 쓰는 말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현대 소설가들이 임의로 창작한 말투에 불과하다. 실제로 궁궐에서 썼던 말은 또 달랐다.


조선말 궁궐에서 실제 생활했던 궁녀들은 1960년대까지도 살아 있었다. 당시 궁녀들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순종(1874~1926)은 대비에게 아침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를 물을 때, “대비마마 침수 안녕히 허우셨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대방을 높이는 존대법 자체가 지금보다 더 복잡했다. 궁중 용어의 특수성과 세월 흐름에 따른 말의 변화가 결합되어 생소한 말투가 많았다.


언어뿐 아니라 의례 영역은 더 어렵다. 어떤 공간에서 좌석 배치, 상급자가 왔을 때의 응대 절차의 복잡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이다. 처음 만나서 정식으로 인사할 때 지위에 따라 바라보는 방향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있을 정도이다. 사극에서 이런 말투나 의례를 완벽하게 재현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재현 자체도 어렵지만, 창작물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는 과거 역사처럼 보이게 신경을 쓰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역사나 다큐가 될 수는 없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 면에서 이 글에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논리와 법칙이 있다. 다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어디까지가 실제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창작 혹은 ‘작가적 결단’의 영역인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서 이 글을 썼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역들 중에 몇몇과 서사구조 자체에도 가공의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 영화의 줄거리 전개에 일정한 소재가 되는 부분 중에도 사실관계를 논할 대목이 적지 않다.

 


한·중·일에 모두 존재했던 학익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학의 날개처럼 펼치는 학익진이라는 진형은 꽤 중요한 소재로 나온다. 1980년대까지 학익진 자체를 이순신이 창안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는 학익진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공식 진형으로 사용되었다. 문종(1414~1452)과 세조(1417~1468)의 주도로 편찬된 조선 전기의 『진법(陣法)』은 진형, 신호법 등을 담은 조선 군대의 기본서였다. 바로 이 책에 이미 학익진이 등장한다. 특정 장수가 임의로 선택한 진형이 아니라는 뜻이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의 충무사에 소장된 조선시대 수군의 학익진 그림. 학익진은 조선시대 군대의 공식적 진형 중의 하나였다. 이 그림 자체는 임진왜란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그려졌다. (출처: 2007년 저자 직접 촬영)

전남 완도군 고금면의 충무사에 소장된 조선시대 수군의 학익진 그림. 학익진은 조선시대 군대의 공식적 진형 중의 하나였다. 

이 그림 자체는 임진왜란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그려졌다. (출처: 2007년, 필자 직접 촬영)


 

다만 원래 이들 진형은 육지 전투에 대비한 진형이었다. 학익진을 비롯한 육상전용 진형을 수군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학익진과 관련된 영화의 이야기 흐름 중에 일부는 ‘작가적 결단’의 영역에 속한다.

 

영화에서 일본측 장수는 학익진에 꽤 관심을 가지면서도 과거 일본의 내전에서 학익진을 상대해서 승리한 사례를 거론한다. 영화에서 정확하게 묘사했듯이 학익진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진형은 아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이라는 역사서에는 이미 전쟁 첫해인 1592년에 일본군이 “학익을 펼쳐 포위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유사하게 생긴 진형을 오래전부터 썼다.

 

이처럼 널리 알려진 진형이라도 장수들이 실전에서 쓰려면 평시 준비가 필요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여년 전의 왕이었던 중종(1488~1544)은 특히 진형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중종은 장수들이 학익진 같은 진형을 잘 익히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장수들의 지식을 점검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내 학익진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은 문답 과정도 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다.

 

조선군이 사용한 진형은 시대 흐름에 따라 계속 바뀐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중국 명나라 척계광(戚繼光) 장군이 만든 진법과 진형을 수용했다. 조선후기 군대에서는 학익진 같은 진형에 더해서 새로 도입한 명나라의 진형도 썼다. 영화에서 조선 수군 본대가 이동할 때 사용한 첨자찰(尖字札) 진형이 대표적이다. 1593년 이후 점차 조선에서 도입한 명나라식 진형을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의 한산해전에 등장시킨 것은 역시나 사실 영역에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이런 진형은 과거 역사 속의 유물만은 아니다. 현대전에서도 방어나 공격 시에 일정한 모양을 구성해서 싸우는 것이 보통이다. 해군 군함이나 공군기도 마찬가지다. 오인 공격을 방지하고 아군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태를 갖춰 싸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한산>은 특정 개인의 무예 실력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진형 문제를 영화의 중심 줄거리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나름 장점을 갖추었다.

 

 

머리 없는 거북선의 정체

영화에서는 두 종류의 거북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같은 거북선의 변화는 영화의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묘사한 머리 없는 거북선 자체는 이순신 후손 종가에 보존된 그림을 참고한 것이다. 이순신 종가에는 머리뿐 아니라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없이 거북선 선체만 그린 그림 1장과, 머리와 장대를 모두 장착한 거북선 그림이 동시에 남아 있다.

 

 

이순신 종가에 남아있는 거북머리(용머리)가 없는 거북선 그림. (출처: 문화재청 2011) 이 그림은 빨라야 1700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구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순신 종가에 남아 있는 거북머리(용머리)가 없는 거북선 그림. (출처: 문화재청 2011)

이 그림은 빨라야 1700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구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영화에서처럼 거북선 머리가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구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거북선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분리된 상태로 그린 그림일 가능성도 있다. 과거 이 그림을 토대로 거북선 머리가 움직였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었지만, 널리 받아들여진 주장은 아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 거북선 그림의 정확한 작성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즉 이 구조가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증거가 없다. 이순신 종가 거북선 그림에는 1800년대 이후 거북선 그림에 주로 보이는 장대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특징도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관계가 깊어서 아무리 빨라도 1700년대의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직은 연구 중인 그림을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삼은 것은 역시나 “작가적 결단”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795년 『이충무공전서』 수록 통제영 거북선 그림. (출처: 영인본에서 직접 스캔)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795년 『이충무공전서』 수록 통제영 거북선 그림.

(출처: 영인본에서 필자 직접 스캔)


 

영화에서는 거북선의 머리나 그 아래 귀면을 선박 충돌공격용 장치인 충각(Ram)으로 해석한다. 이 또한 요즘 연구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적선을 격파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당파(撞破)라는 표현을 쓴다. 이순신의 장계를 원문으로 읽어 보면 당파는 화약무기를 포함한 여러 무기로 공격하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는 표현일뿐, 충돌 공격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한 사례는 없다.

 

거북선 내구구조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이 부족해서 여전히 의견이 나뉜다. 거북선 2층설이나 3층설 모두 기본 갑판 아래에 휴식과 물자 저장공간인 1층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다. 2층설은 노를 젓는 격군과 무기를 쓰는 전투원이 기본 갑판이 있는 2층에 같이 있다고 보는 주장이다. 3층설은 2층에서는 노를 젓고, 별도로 있는 3층에서 주로 전투를 했다고 본다. 준3층설은 3층 천장의 높이가 낮아서 무기를 쓰는 사람이 2~3층에 분산되어 있다고 본다. 이 영화의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3층설에 따르면서도, 3층에서 개판 위로 올라가는 부분에 준3증구조설에 따른 부분갑판이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

 

영화에서 거북선의 노는 한국식 노(Oar)를 썼다. 50년 전에는 거북선에서 서양식 노를 썼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더 많았다. 1970년대 이후부터 거북선은 한국식 노를 썼다는 쪽으로 학계의 의견이 바뀌었다. 그런데 근래 학계에서 거북선 서양식 노를 썼다는 주장이 다시 나온 상태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면, 영화에서는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 밖에 없다. 완전한 상상의 산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정적인 사실에 해당하는 영역도 아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순신 영웅화를 넘어서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웅이라는 칭호가 진정 어울리는 위인이다. 이순신이 치룬 해전이 세계 4대 해전에 속한다는 주장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이지만, 과거에 비하여 이순신 장군이 치룬 해전에 대한 관심이 외국에서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오직 이순신 한 명으로만 임진왜란 해전을 이해하려는 접근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순신이 운용한 군함 중에서 가장 척수가 많았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은 1500년대 중반이래 조선 수군의 공식 군함이었다. 군함에 화포를 대량으로 탑재한 전통도 이미 고려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

 

세계 전근대 해전은 상대방 배에 뛰어들어 백병전으로 승부를 겨루는 등선육박전 방식을 주로 쓰다가, 1500년대 이후 화약무기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교전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나간다. 조선은 그런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순신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이 조선 수군 자체의 나름 탄탄한 기반과 결합하였기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훌륭함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이순신과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순신을 뒷받침하였던 조선 수군의 여러 물리적 기반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오랜 세월 나름 준비한 결과물이라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한산>으로 본 역사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우리는 어떤 영화관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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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륜 국방안보포럼 선임연구위원 사진
김병륜

국방안보포럼 선임연구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 박사과정 수료. 국방부 국방홍보원에서 오래 근무한 후, 현재는 전근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군사사를 연구하면서 관련 컨텐츠에 대한 자문과 외국 군사서적 및 한국 전통 병서를 번역하고 있다. 저서: 『군사전문인을 위한 인터넷』(명경출판사, 1997) 외 다수. 번역서: 『풍천유향』(경기문화재연구원, 2021), 『육군예식』 (육군사관학교, 2021)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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