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과 소령원을 살펴보면 왕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여러 사람 중 하나였던 왕비, 후궁, 그리고 왕의 생모가 살아낸 치열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실의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 자신의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할 후궁의 마음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왕실의 삶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남자, 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선 왕실 역사를......
최근 문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오릉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할 기회가 있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왕릉 중 일부인 서오릉은 한양 서쪽, 고양의 다섯 왕릉을 가리킨다. 곧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경릉, 영조비 정성왕후의 홍릉,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명릉이다.
조선 왕릉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많은 답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바탕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조선 왕릉 연구 성과가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답사 프로그램이며, 새로운 내용을 발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이미 알려진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왕릉이 아닌 왕릉의 주인공, 곧 능주(陵主)를 중심에 두는 것에서 시작했다.
숙종을 중심으로 잠든 네 명의 왕비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어진(이미지 출처: wikipedia)
이렇게 생각한 뒤 다시 서오릉을 보니 확실히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명릉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그 옆에는 계비인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같은 서오릉 경내에는 명릉과 영역을 달리해 숙종의 첫 왕비로 19살, 천연두에 걸려 생을 마감한 인경왕후의 익릉이 있다. 또 1969년, 광주에서 옮겨 온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도 있다. 그러므로 숙종의 네 왕비(희빈 장씨는 후궁으로서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폐위)가 모두 지척에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숙종 정치의 핵심인 환국의 중심에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논하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인현왕후의 경우 복위가 되었지만 병마에 시달리다 35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을 맞이했으니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숙종의 관점이 아닌 네 왕비를 조명하며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았다. 사료가 많지는 않지만 최근 여러 방면에서 이뤄진 연구는 이들, 왕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현왕후의 병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희빈 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가 갖는 의미 등에 대한 연구다. 이를 통해 볼 때 희빈 장씨에 대한 시선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조금은 가혹한 부분이 있다.
(왼쪽부터) 명릉, 익릉, 대빈묘 전경(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어머니, 영빈 이씨
희빈 장씨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려 했는데, 조금 더 살펴보니 서오릉 경내에는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잠들어 있어서 고민한 적이 있고 결국 그 이야기는 프로그램 속에서 다루지 않았다. 바로 수경원의 주인공인 영빈 이씨다. 영빈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를 낳았으니 왕실 여성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일찍이 효장세자를 정빈 이씨에게 얻었으나 세자가 일찍 죽었으니, 영빈은 귀한 왕손을 낳은 후궁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빈은 영조에게 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요청했으니 『조선왕조실록』은 1762년,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영빈의 고변을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런 분위기는 감지된다. 그러나 오죽하면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는지, 어머니로서 영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수경원’의 ‘원’은 ‘릉’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현존하는 조선 왕릉은 공식적으로 남한의 40기, 북한의 2기를 합쳐 모두 42기(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는 제외되었다)이며 왕과 왕비의 단독, 혹은 합장 무덤을 가리킨다. 그리고 ‘원’은 세자나 왕의 사친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 왕릉은 아니지만 ‘원’의 존재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에 대한 내용은 처음부터 제정되었을까. 그런데 그 시작은 대체로 영조 때,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서오릉에 영조의 왕비 무덤이 있다. 바로 홍릉이니 영조는 처음 무덤을 만들 때, 그 옆에 자신이 묻힐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던 곳이다. 결론적으로는 동구릉의 원릉에 정순왕후와 묻혀 있으니 그 의도는 결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영빈 이씨의 수경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소령원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소령원은 앞에서 제기한 궁금증, 곧 ‘원’제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소령원을 찾아가기는 길은 서오릉을 나와 파주까지 가야 한다.
1718년, 숙빈이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연잉군을 두었으나 숙종의 세자인 경종, 숙종의 총애를 받던 연령군이 있던 터라 죽음에 이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연잉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추상적인 두려움이 아닌 현실에서 연잉군은 막막함과 슬픔에 직면해야 했다. 어머니의 무덤 자리를 정하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잉군은 처음 석관동 묵장산을 숙빈의 장지로 구했지만 왕릉 예정지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고양의 신원, 지금의 삼송 일대에 장지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지역 세력가의 저지로 계약까지 가지 못했다. 양재동에 장지를 얻었으나 헌릉이 보인다는 이유로 무산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양주 웅장리, 지금의 파주 영장리에 겨우 장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르고 ‘유명 조선국 후궁 숙빈 수양 최씨지묘’의 묘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장지 마련의 어려움은 당시 영조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왕이 된 영조는 이 공간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다만 섣부른 추존이나 추상은 부작용이 있다는 점에서 영조는 조심스러운, 그렇지만 치밀한 추숭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먼저 후궁의 무덤으로서는 드물게 신도비를 세웠다. 자신의 뜻을 외부에 드러낸 첫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영조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원’, 곧 ‘원소’였다. 조선에서 ‘원’을 처음 만든 것은 인조였으니 원종으로 추존되기 전, 생부와 생모인 정원군과 연주부부인묘를 각각 홍경원과 육경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원래 ‘원(園)’은 ‘능(陵)’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라는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인조로서는 능과 묘의 격 사이에 원을 배치하고자 했다. 이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며 원은 사라지고 ‘장릉’이 되었지만 일단 역사 속 사례를 만든 것이다.
영조는 인조의 ‘원소 제도’를 차용하기로 한 뒤 먼저 숙빈 최씨의 무덤을 ‘소령묘’로 만들었고 사당을 ‘육상묘’로 불렀다. 그리고 1753년, 숙빈이 죽은 뒤 35년이 되는 해에, 무덤은 ‘소령원’으로, 사당은 ‘육상궁’의 이름을 올렸으니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궁원제’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후 고종 때 ‘원과 궁’을 세자에게 확대하며 우리가 사전에서 파악한 조선시대 ‘원소 제도’가 정비되었으니 그 완성된 시기는 생각보다 늦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소령원에 12번, 육상궁에 247번 방문했다. 이는 다음 왕인 정조가 현륭원을 13번, 경모궁을 344번 찾아간 것을 연상할 수 있으니 정조의 원행과 경모궁 참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이라 비록 서오릉에 묻히지도 못했지만 영조의 노력으로 또 다른 격을 갖춘 무덤, 소령원에 잠들게 된 것이다.
영조의 어진(좌)과 소령원(우)(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오릉과 소령원, 칠궁에 담긴 여성의 이야기
이렇게 서오릉과 소령원을 살펴보면 왕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여러 사람 중 하나였던 왕비, 후궁, 그리고 왕의 생모가 살아낸 치열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실의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 자신의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할 후궁의 마음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왕실의 삶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남자, 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선 왕실 역사를 여성,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균형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최근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된 청와대 옆 칠궁도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자리는 육상궁이 있던 곳인데 각지에 있는 사당을 관리나 훼철의 문제를 이유로 옮겨온 것이 모두 일곱이 되며 지금은 ‘칠궁’으로 부르고 있다. 칠궁의 주인공은 모두 후궁으로서 왕의 생모가 된 이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숙빈 최씨의 육상궁과 함께 영조의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연호궁, 희빈 장씨의 대빈궁,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을 낳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덕안궁, 추존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저경궁,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경우궁,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선희궁이다.
칠궁에 모셔진 주인공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은 존재는 그 아들이 아니었을까. 생존 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수빈 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을 졸이며 삶을 살아야 했으니 그들에게는 아들이 살아남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고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면 칠궁이 조금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역사기행 강사, 역사 작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뒤 역사기행 강사, 역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의 역사 현장을 담은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공저)』을 비롯해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여행이야기 대표이며 기업 및 기관 강의와 함께 문화재청,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의 역사, 문화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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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이야기를 듣다, 서오릉과 소령원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박광일
2022-05-27
서오릉과 소령원을 살펴보면 왕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여러 사람 중 하나였던 왕비, 후궁, 그리고 왕의 생모가 살아낸 치열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실의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 자신의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할 후궁의 마음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왕실의 삶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남자, 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선 왕실 역사를......
최근 문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오릉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할 기회가 있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왕릉 중 일부인 서오릉은 한양 서쪽, 고양의 다섯 왕릉을 가리킨다. 곧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경릉, 영조비 정성왕후의 홍릉,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명릉이다.
조선 왕릉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많은 답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바탕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조선 왕릉 연구 성과가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답사 프로그램이며, 새로운 내용을 발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이미 알려진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왕릉이 아닌 왕릉의 주인공, 곧 능주(陵主)를 중심에 두는 것에서 시작했다.
숙종을 중심으로 잠든 네 명의 왕비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어진(이미지 출처: wikipedia)
이렇게 생각한 뒤 다시 서오릉을 보니 확실히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명릉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그 옆에는 계비인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같은 서오릉 경내에는 명릉과 영역을 달리해 숙종의 첫 왕비로 19살, 천연두에 걸려 생을 마감한 인경왕후의 익릉이 있다. 또 1969년, 광주에서 옮겨 온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도 있다. 그러므로 숙종의 네 왕비(희빈 장씨는 후궁으로서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폐위)가 모두 지척에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숙종 정치의 핵심인 환국의 중심에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논하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인현왕후의 경우 복위가 되었지만 병마에 시달리다 35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을 맞이했으니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숙종의 관점이 아닌 네 왕비를 조명하며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았다. 사료가 많지는 않지만 최근 여러 방면에서 이뤄진 연구는 이들, 왕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현왕후의 병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희빈 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가 갖는 의미 등에 대한 연구다. 이를 통해 볼 때 희빈 장씨에 대한 시선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조금은 가혹한 부분이 있다.
(왼쪽부터) 명릉, 익릉, 대빈묘 전경(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어머니, 영빈 이씨
희빈 장씨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려 했는데, 조금 더 살펴보니 서오릉 경내에는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잠들어 있어서 고민한 적이 있고 결국 그 이야기는 프로그램 속에서 다루지 않았다. 바로 수경원의 주인공인 영빈 이씨다. 영빈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를 낳았으니 왕실 여성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일찍이 효장세자를 정빈 이씨에게 얻었으나 세자가 일찍 죽었으니, 영빈은 귀한 왕손을 낳은 후궁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빈은 영조에게 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요청했으니 『조선왕조실록』은 1762년,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영빈의 고변을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런 분위기는 감지된다. 그러나 오죽하면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는지, 어머니로서 영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 명하는 영조의 모습(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원’의 존재와 기원...그리고 소령원
그런데 ‘수경원’의 ‘원’은 ‘릉’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현존하는 조선 왕릉은 공식적으로 남한의 40기, 북한의 2기를 합쳐 모두 42기(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는 제외되었다)이며 왕과 왕비의 단독, 혹은 합장 무덤을 가리킨다. 그리고 ‘원’은 세자나 왕의 사친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 왕릉은 아니지만 ‘원’의 존재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에 대한 내용은 처음부터 제정되었을까. 그런데 그 시작은 대체로 영조 때,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서오릉에 영조의 왕비 무덤이 있다. 바로 홍릉이니 영조는 처음 무덤을 만들 때, 그 옆에 자신이 묻힐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던 곳이다. 결론적으로는 동구릉의 원릉에 정순왕후와 묻혀 있으니 그 의도는 결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영빈 이씨의 수경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소령원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소령원은 앞에서 제기한 궁금증, 곧 ‘원’제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소령원을 찾아가기는 길은 서오릉을 나와 파주까지 가야 한다.
1718년, 숙빈이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연잉군을 두었으나 숙종의 세자인 경종, 숙종의 총애를 받던 연령군이 있던 터라 죽음에 이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연잉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추상적인 두려움이 아닌 현실에서 연잉군은 막막함과 슬픔에 직면해야 했다. 어머니의 무덤 자리를 정하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잉군은 처음 석관동 묵장산을 숙빈의 장지로 구했지만 왕릉 예정지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고양의 신원, 지금의 삼송 일대에 장지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지역 세력가의 저지로 계약까지 가지 못했다. 양재동에 장지를 얻었으나 헌릉이 보인다는 이유로 무산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양주 웅장리, 지금의 파주 영장리에 겨우 장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르고 ‘유명 조선국 후궁 숙빈 수양 최씨지묘’의 묘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장지 마련의 어려움은 당시 영조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왕이 된 영조는 이 공간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다만 섣부른 추존이나 추상은 부작용이 있다는 점에서 영조는 조심스러운, 그렇지만 치밀한 추숭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먼저 후궁의 무덤으로서는 드물게 신도비를 세웠다. 자신의 뜻을 외부에 드러낸 첫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영조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원’, 곧 ‘원소’였다. 조선에서 ‘원’을 처음 만든 것은 인조였으니 원종으로 추존되기 전, 생부와 생모인 정원군과 연주부부인묘를 각각 홍경원과 육경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원래 ‘원(園)’은 ‘능(陵)’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라는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인조로서는 능과 묘의 격 사이에 원을 배치하고자 했다. 이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며 원은 사라지고 ‘장릉’이 되었지만 일단 역사 속 사례를 만든 것이다.
영조는 인조의 ‘원소 제도’를 차용하기로 한 뒤 먼저 숙빈 최씨의 무덤을 ‘소령묘’로 만들었고 사당을 ‘육상묘’로 불렀다. 그리고 1753년, 숙빈이 죽은 뒤 35년이 되는 해에, 무덤은 ‘소령원’으로, 사당은 ‘육상궁’의 이름을 올렸으니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궁원제’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후 고종 때 ‘원과 궁’을 세자에게 확대하며 우리가 사전에서 파악한 조선시대 ‘원소 제도’가 정비되었으니 그 완성된 시기는 생각보다 늦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소령원에 12번, 육상궁에 247번 방문했다. 이는 다음 왕인 정조가 현륭원을 13번, 경모궁을 344번 찾아간 것을 연상할 수 있으니 정조의 원행과 경모궁 참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이라 비록 서오릉에 묻히지도 못했지만 영조의 노력으로 또 다른 격을 갖춘 무덤, 소령원에 잠들게 된 것이다.
영조의 어진(좌)과 소령원(우)(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오릉과 소령원, 칠궁에 담긴 여성의 이야기
이렇게 서오릉과 소령원을 살펴보면 왕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여러 사람 중 하나였던 왕비, 후궁, 그리고 왕의 생모가 살아낸 치열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실의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 자신의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할 후궁의 마음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왕실의 삶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남자, 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선 왕실 역사를 여성,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균형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최근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된 청와대 옆 칠궁도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자리는 육상궁이 있던 곳인데 각지에 있는 사당을 관리나 훼철의 문제를 이유로 옮겨온 것이 모두 일곱이 되며 지금은 ‘칠궁’으로 부르고 있다. 칠궁의 주인공은 모두 후궁으로서 왕의 생모가 된 이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숙빈 최씨의 육상궁과 함께 영조의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연호궁, 희빈 장씨의 대빈궁,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을 낳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덕안궁, 추존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저경궁,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경우궁,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선희궁이다.
칠궁에 모셔진 주인공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은 존재는 그 아들이 아니었을까. 생존 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수빈 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을 졸이며 삶을 살아야 했으니 그들에게는 아들이 살아남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고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면 칠궁이 조금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여성의 이야기를 듣다, 서오릉과 소령원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어머니, 아들을 죽인 아버지
역사기행 강사, 역사 작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뒤 역사기행 강사, 역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의 역사 현장을 담은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공저)』을 비롯해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여행이야기 대표이며 기업 및 기관 강의와 함께 문화재청,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의 역사, 문화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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