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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조우리

2022-08-09

리드문


이번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칼럼 제목인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는 The Beatles의 노래 'Elanor Rigby' 의 가사에서 차용하였습니다.   - 저자 -


그 중 거의 매일같이 가게에 왔던 언니가 있었다. 자기 이름이 ‘세라’라고 했다. 거구에 맥주 500cc를 3초 만에 원샷 하는 모습과 썩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 언니를 세라라 불렀다. 세라 언니는 맨정신에서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는데...



“그래, 술 취했군. 가서 자요. 지금 어디 있어? 누구하고 같이 있어?” 

“샐리?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하러 갈테니까, 알았어? 엉, 알았어?” 

“알았어. 이제 가서 자. 어디서 누구하고 같이 있는 거야?” 

“누구하고도 있지 않아. 나와 내 자신 뿐이야.”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 -

 

 

LP바 전경

LP바 전경



스무 살 겨울, 집 근처의 LP 바에서 인생 첫 알바를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과 오래된 LP, 좁고 지저분한 주방, 오줌 냄새와 곰팡내가 묘하게 뒤섞인 탁한 공기, 아무런 의지도 기력도 없어 보이는 사장님.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님은 가게에 잘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투잡을 뛰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게는 지독히도 장사가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내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단 한 명도 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가게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장님 몰래 맥주를 따라 마시고 듣고 싶은 음악을 틀고 누렇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거의 일정했다. 혼자 오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이 단골이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서 이곳에 오는 것 같았다. 다들 안주 없이 생맥주만 마시며 몇 시간이고 죽치다 갔다. 듣고 싶은 음악을 잔뜩 적어내 나를 귀찮게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용하고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밴드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술을 마시면 말이 좀 더 많아졌고 나에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날씨 이야기, 최근 본 영화, 근처 삼천 원짜리 백반, 기타 줄 빨리 가는 법, 고양이의 귀여움 같은 것들. 그곳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흘렀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좀처럼 밤은 끝나지 않았다.



쓸쓸한 도시의 밤

도시의 밤



이들은 학교를 떠나 아직 집에 도착하지 못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불안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특별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맥주잔을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고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달라 말하며 술에 취하면 아무나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모두 홀든 콜필드였다.


당시 대학생이 되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십대가 끝났지만 사춘기는 끝나지 않았던, 어디서나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말 취기가 돌아오자 나는 또다시, 내 창자에 탄알이 박혔다고 그 어리석은 짓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야. 바에서 창자에 탄알이 박힌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재킷 밑에 손을 넣어, 피가 사방에 떨어지지 않도록 배를 움켜쥐고 있다. 나는 내가 부상을 입고 있다는 것조차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 -

 

내상을 입은 동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며 그들은 바에 앉아 선반의 LP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들과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가게에서 하는 일은 취하든 취하지 않든 간단한 일 뿐이었으므로 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중 거의 매일같이 가게에 왔던 언니가 있었다. 자기 이름이 ‘세라’라고 했다. 거구에 맥주 500cc를 3초 만에 원샷 하는 모습과 썩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 언니를 세라라 불렀다. 세라 언니는 맨정신에서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는데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생기가 넘치고 쾌활해졌다. 그곳에 오는 손님 대부분이 그런 패턴이긴 했지만 세라 언니의 그 변화가 유난히 드라마틱했고, 무엇보다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 차별점이었다. 언니는 술에 취해 자기가 드럼을 연주할테니 너는 기타, 너는 베이스를 치라며 즉석 합주를 시도했다. (가게에는 드럼 세트를 비롯한 악기들이 있었다.)


합주는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애써 마신 술이 확 깨는 소음이었다. 그래도 언니는 엄청난 파워로 드럼을 두드려댔다. 어떤 날은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했다. 에이, 그래도 LP바인데. 하지만 예상을 깨고 가게에 있던 사장이 좋은 생각이라며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고 어디선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등장했다. 세라 언니와 나, 사장님과 손님 몇 명은 얼떨결에 그렇게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가게에서 파는 잭다니얼과 함께. 잠시 후 바닥에 떨어진 삼겹살 기름에 불이 붙어 나무 바닥에 옮겨붙었다. 바로 물을 뿌려 번지진 않았지만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다음날, 지옥의 뚜껑을 연 것처럼 가게에 돌아다니는 쥐가 늘어났다.

 


연주

연주



취한 세라 언니는 아이 같았다. 즉흥적이었고 불가능한 게 없었고 자신의 제안이 최고라 여겼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중 ‘야간학교’에 보면 이런 인물이 나온다. 술에 취해 자기의 야간학교 선생님을 한밤중에 기습 방문하고 싶어하는 여자 둘. 그녀들은 자기들 차가 고장나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화자)의 차로 함께 가자고 조른다.



“그래도 패터슨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우리가 하이볼을 준비해 가면 좋아할 거에요. 

어차피 그는 별로 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우린 그 사람에게 볼 일이 좀 있거든요.” 


 “우린 오늘 밤 시간이 많아요.” 다른 여인이 말했다. “그런데 하필 에디스의 차가 고장이 났지 뭐예요.” 


 “당신한테 차만 있으면 그걸 타고 패터슨을 만나러 갈 수 있을 텐데.” 에디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패터슨에게 선생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틀림없이 어떤 공통점이 있을 테니까요.”

 

-레이몬드 카버 <야간학교> 중 -



불쌍한 패터슨. 벨소리에 자다 깨 나가보면 문 앞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술병을 든 여자 둘과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서 있는 상황이라니. 다행히 남자의 배신으로 기습 방문은 불발되지만 우리는 술 취한 사람의 머릿속이 얼마나 자기 멋대로인지 알 수 있다. 술 취해 바라본 세상은 종종 무한한 가능성과 열망, 관대함과 친절함으로 가득 차 있다. 술에 절여진 뇌가 거대한 해피벌룬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둥둥 떠다니던 해피벌룬은 술이 깸과 동시에 피시식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해진 채 바닥을 뒹군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술을 마셔 바람을 채우고 또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신다. 세라 언니는 자주 가게에 와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여러 기행을 일삼았다. 당시 나보다 스무 살이 많던 언니는 지금쯤 환갑이 넘었을 거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눈을 빛내며 한밤중의 해프닝을 기획하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


 

어느 눈이 많이 오던 날, 출근해보니 가게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가게 앞에는 문 열기를 기다리던 단골손님이 하나 있었는데 집기들이 다 빠져나간 텅 빈 가게를 보고 우리는 함께 망연자실했다. 사장님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내 첫 아르바이트는 급여를 떼어먹힌 채 끝이 났다.


가끔 생각한다. 그곳에 오던 손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상하게 그곳을 생각하면 침몰해버린 거대한 배가 떠오른다. 세라 언니도, 사장님도, 고양이를 키우던 손님도, 밴드를 하던 손님도, 긴 신청곡을 적어내던 손님도 모두 그 안에 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스무 살이던 그때의 나까지도.


단 한 번, 내 삶을 지나던 겨울에 일했을 뿐인데. 늘 겨울의 풍경에는 그 장소가 있다. 급여를 떼어먹혔지만 억울하지 않다. 알바비보다 더 많은 맥주를 마셔댔으니까. 모두가 길을 잃었고 모두가 청춘이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잠시 만나 마주 앉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시간이 스무 살의 나를 지탱해준 작은 기쁨이었음을 깨닫는다.



테이블 위 와인과 다과가 펼쳐진 모습

테이블 위 와인과 다과가 펼쳐진 모습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중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서툰, 나아가는, 용감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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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리 소설가 사진
조우리

청소년 소설가
청소년소설을 쓴다. <어쨌거나 스무 살은 되고 싶지 않아>로 비룡소 블루픽션상을, <오, 사랑>으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내 이름은 쿠쿠>, <꿈에서 만나>,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의 보고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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