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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만히 읽는 당신의 이야기

릴케와 니체, 프로이트를 사로잡은 여인

릴케와 니체, 프로이트를 사로잡은 여인

루 살로메의 평생의 연애

by 한은형 / 2018.07.18


루 살로메는 팜므파탈이 아니다


반 베르크의 <룰루>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는 모두 한 여자의 이름에서 왔다. 루 살로메. 작가이자 정신분석가로 당대의 유명인이었고, 니체, 릴케, 프로이트, 톨스토이 등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정신 지형을 바꾼 남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여인으로 더 유명했다.


루 살로메

▲ 루 살로메


‘룰루’의 바탕이 된 희곡을 쓴 프랑크 베데킨트는 루 살로메를 한때 사랑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활동한 독일에서 루 살로메는 유명인이었다. 사실 여부는 원작자만이 알 것이나 사람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더 있다.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 작중 인물 ‘룰루’와 ‘살로메’처럼 루 살로메가 팜므파탈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팜므파탈은 한국에서는 흔히 ‘악녀’로 통용되는 것 같은데, 원래는 ‘치명적인 여자’라는 뜻이다. 치명이란 무엇인가? 致命, ‘죽을 지경에 이른다’는 뜻이다. ‘죽을 만큼 위험한 여자’가 팜므파탈이다. 그리고 여기서 ‘죽을 만큼’이라는 수식어는 과장이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룰루>와 <살로메>의 주인공 ‘룰루’와 ‘살로메’가 바로 그런 여자였다. 룰루와 살로메는 욕망을 위해 여러 남자를 죽게 만들고 결국은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여자들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점점 더 루 살로메는 팜므파탈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사랑했지만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루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통스러워 한 남자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남자의 사랑을 얻는 것은 루에게 부차적인 일이었고, 그녀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오히려 남자들에게 영감과 자유를 주는 여자였다. 릴케에게 르네라는 이름을 버리고 ‘라이너’라는 이름을 쓰게 권했고, 니체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했고,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프로이트의 작업을 도왔다.



‘릴케의 집’은 릴케의 집이 아니다


2016년 내가 잠시 베를린에 살았을 때 내 집 근처에 루 살로메의 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는 루 살로메라는 이름은 없었고 ‘릴케가 살았던 집’이라는 표식만 있었다. 역시나 그 집 근처에 살던 베를린대학교 교수 Y선생님으로부터 ‘원래는 릴케 집이 아니라 루 살로메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은 이렇다. 루 살로메는 베를린대학 동양학과 교수 칼 안드레아스와 결혼해 거기에 살았는데, 루를 사모하는 청년 릴케가 찾아와 부부의 집 마당에 오두막을 짓고 지냈던 것이다. 2년 동안 말이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실 텐데 루 부부는 보편적이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연사(戀事)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루 살로메는 많은 청혼을 거절했다. 폴 안드레아스의 청혼도 거절하다 마음을 바꾼다. 그러고는 두 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첫째, 평생 서로 섹스하지 않는다. 둘째, 다른 남자와 교제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둘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폴이 루의 조건을 수락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릴케는 루와 폴의 집에 함께 살며 ‘기이한 동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집부터 릴케의 집, 그러니까 루 살로메의 집까지는 산책하기 좋은 길이어서 나는 거의 매일같이 그 집을 지나다녔다. 그러면서 루 살로메와 릴케, 폴 안드레아스,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루의 남자들’의 만남과 헤어짐, 스침과 스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들었던 루의 일생과 그녀와 만났던 남자들의 족적을 떠올리며 밤마다 산책을 했다.



루 살로메라는 신여성


루 살로메. 루는 186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37년 독일의 괴팅겐에서 죽은 작가이자 정신분석가다. 루는 19세기 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취리히로 건너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스위스까지 간 것은 당시 여성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대학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루는 운이 좋은 여자였다.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루의 자유로운 지성과 활달한 기질을 만개시켰고, 루는 화려한 남성 편력이 시작되기에 이른다. 드디어 무대로 나온 것이다.


취리히로 오기 전에도 사건이 없던 건 아니다. 신부가 루에게 청혼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외국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견진성사를 받아야 했는데, 루가 이걸 받은 사람이 바로 루한테 거절당한 그 신부였다. 취리히대학에서 루는 비교종교학, 신학, 철학, 예술사를 공부한다. 그러다 병이 난 루가 따뜻한 곳으로 요양하러 가는데, 로마였다. 로마에서 파울 레와 그의 스승 니체를 만난다. 두 남자 다 루를 사랑하게 되고, 청혼하고, 루는 둘 다 거절한다.


루 살로메, 파울 레 그리고 니체

▲ 루 살로메, 파울 레 그리고 니체


루가 릴케를 만난 곳은 뮌헨이었다. 1896년이거나 1897년이다. 지금은 그저 유명한 남자들이 사랑했던 여자쯤으로 알려진 루 살로메는 당시 문명을 날리던 유명한 작가(이자 사교계의 명사)였고, 시간이 지나 세계적인 시인이 될 릴케는 첫 시집을 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시인이었다. 1897년 둘은 한 달 동안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에서 함께 지낸다. 1899년에는 루 부부와 함께 릴케가 러시아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이들은 톨스토이를 만나는데 루는 톨스토이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1900년에는 레 없이 루와 릴케 둘이 러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와 헤어진다. 1900년에는 니체가 죽었는데 이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뮌헨의 별장에서 릴케를 만난 루 살로메와 그의 남편 폴 안드레아스

▲ 뮌헨의 별장에서 릴케를 만난 루 살로메와 그의 남편 폴 안드레아스


나는 얼마 전, 이탈리아 토리노에 갔다 니체의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니체는 토리노에서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는 걸 보고 발작, 오래 누워 있다 죽었다. 이렇게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누군가의 자취와 마주하면 무언가가 바뀐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잘 몰랐던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관심이 생기면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 읽게 되고, 결국에는 이렇게 몇 줄 쓰게도 되는 것이다.


이제 프로이트로 가볼까? 1911년, 루는 바이마르에서 프로이트와 만난다. 55세의 프로이트는 루를 사랑하게 되고, 루는 그의 제자가 된다. 빈의 수요심리학회에서였다. 『1913년 세기의 여름』이라는 책에서는 그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녀는 지난 늦가을에 이 신사들만의 모임에 뛰어들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의심쩍은 눈초리를 받았지만, 지금은 동경에 찬 숭배를 받고 있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가터에 자기가 쓰러뜨린 일련의 정신적 천재들의 머릿가죽을 달고 있었다.” 이게 루의 패턴이었던 듯하다. 남성중심의 지식 사회에 어느 날 찾아온 여성이 파문을 일으킨다. 루가 이름을 다 거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남자들을 매혹시키고 그들의 인생으로 뛰어들 수 있던 것은 루가 그들만큼이나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이런 여자들이 있었다. ‘신여성’이라 불리는 그들은 남성중심사회의 강고한 벽을 뚫지 못하고 압사당해버렸다. 나는 그런 비극에 대해 너무 많이 들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루의 스승이자 그녀를 사랑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



『1913년 세기의 여름』과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프로이트를 만났을 때 루의 나이는 52세였고, 정신분석을 하는 자신의 병원을 괴팅겐에서 열려고 준비 중이었다. 릴케는 다시 루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나의 영원한 지주, 나의 전부”라고 릴케가 쓴 편지에 루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대”라고 답장을 한다. 또 이렇게 쓴다. “나는 그대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런 디테일을 앞에서 밝힌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 발견하고 웃음 짓는다. 사랑과 남자와 여자라는 존재는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다고,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출간한 산문집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에 이들에 대해 썼다. 나는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항성’과 ‘혜성’을 동시에 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적었다. 천체의 중심이 되는 게 항성이고, 스치는 게 혜성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항성이 되기도 하고 혜성이 되기도 한다. 내게 항성이었던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혜성이 되기도 할 것이고. 억울할 것도 으스댈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드는 생각은 이렇다. 루 살로메에게는 항성이 있었을까? 항성이 없이 혜성만 있는 천체는 어떤 것일지, 그것이 천체로 성립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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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한은형
한은형
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로 등단했으며 2015년에는 제20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장편소설 『거짓말』, 산문집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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