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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휴가

365일 지구별을 여행하다

한공기

2018-08-08

“휴가 어디로 가세요?”


필라테스 강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잡고 있던 바를 놓쳤다. 퉁!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사는 괜찮냐고 물으며 내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제 휴가는 바로 당신입니다.’


물론 나의 답변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회사원일 때는 내내 휴가를 기다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에 지쳐서 매일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누적된 피로는 내 안에서 끈적끈적하게 쌓였고, 걸을 때마다 발이 바닥에 진득하게 붙어있는 듯했다.


‘원래 그런’ 회사를 나오다


“한 팀장 빨리빨리 좀 와봐. 기획안 2건 말이야. 언제까지 돼?”

“아마 저녁에야 한 개 겨우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끝내줘요.”

“네?”


대표의 재촉에도 나는 느릿느릿 걸었고,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업무를 맡기고선 총총걸음으로 도망쳤다.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회사생활에 대해 얘기하면 하나같이 모두 다 ‘회사는 원래 그렇다’고 했다. 회사는 원래 그렇다고? 안 그런 회사는 없을까? 지구상 어딘가에 정상적인 회사가 있다고 해도 내가 일했던 모든 회사는 그런 식이었다. 직원을 가족이나 동료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철저하게 도구로 대했고, 군대보다 더 심하게 ‘뺑뺑이’를 돌렸다(심지어 군대도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무상으로 시키지 않는다).


지옥 같은 회사생활에서 내 유일한 희망은 휴가였다.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에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얀 백사장의 발리 사진을 띄어두고 ‘올 휴가는 반드시 발리에서 모히토를 마시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 휴가를 가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시작된 프리랜서의 길


친구와 술을 마시며 ‘난 이제 자유다!’하고 외쳤지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친구는 계속해서 자작하는 나를 보고서는 소주병을 빼앗아 천천히 따라주었다.


“참 너 발리 가고 싶다며. 가서 좀 쉬고 오지 그래?”

“지금 내가 발리가면 인생 완전 발린다.”


친구는 나의 ‘농담처럼 들린 진담’에 무더위가 달아났다며 고맙다고 또 한 잔을 따라주었다.


“너 그냥 이참에 나처럼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게 어때?”

“프리랜서? 프리랜서가 사실 일이 안 들어오면 실업자 아냐? ‘프리랜서라 쓰고 실업자라고 읽는다’라는 말처럼.”

“나는 뭐 처음부터 잘된 줄 알아? 처음에는 다 깜깜해.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용기를 가져봐.”


친구는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학 시절 존경하는 담당 교수님의 교수실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말과 함께. 사진 속에는 나무배가 한 척 있었는데, 돛에 교수님의 인생 명언이라고 하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돗단배


‘해안을 잃을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바다를 발견할 수 없다.’


교수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하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 문구를 읊어주셨다고 했다.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모험가는 자신이 머물렀던 육지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된다는 것이다. 작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했다는 그 말이 내게 큰 용기가 되어 생각지도 못한 프리랜서 생활이 시작되고 말았다.



프리랜서가 되고 난 후의 깨달음


이제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2년이 넘었다. 매주 한 번 모이는 프리랜서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모임에서는 얼굴만 봐도 누가 신참 프리랜서인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모든 신참 프리랜서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눈빛은 지나치게 흔들린다. 불안, 초조, 조급, 막막. 이런 단어들을 머리에 달고 다닌다. 그들은 내게 조언을 부탁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매번 프리랜서가 어떤 직업인지 아느냐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개인사업자 아닌가요?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사람이요.”

“그럼, 프리랜서(Freelancer)의 랜서(lancer)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해본 후)창기병이란 뜻이네요.”


창기병


창기병이란 전쟁의 선두에서 창을 들고 돌격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돌격해서 기선제압을 하는 병사를 뜻한다. 프리랜서의 운명은 창기병처럼 오직 자신의 용기에 달려있다. 자유롭게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반대로 실업자가 되어 위태로워 질 수도 있다. 이런 양극단의 사이에서 프리랜서는 확실히 직장인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 프리랜서를 하면서 ‘소통의 기술’을 터득했다. 프리랜서에게 소통 능력은 필수 아이템이자 무기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에 의존하면서 시킨 일만 하면 됐다. 한마디로 매우 수동적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영업도 직접 뛰어다녀야 하고 클라이언트도 만나서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소통 능력이 생과 사를 좌우하게 된다. 물론 그런 능력이 단번에 생기지는 않는다.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실수와 더러워서 못 해먹을 만큼 참을 수 없는 모욕, 그리고 원활한 소통으로 생각보다 일이 쉽게 진행되는 기적을 모두 경험해봐야 한다.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소통 능력을 꼭 키워야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프리랜서 생활이 안정된 육지(직장)를 떠나 항해하는 모험이라면 ‘소통 능력’은 항해술과 같은 것이다. 항해술이 점점 능숙해지면 그 어떤 해일에도 배가 뒤집어지지 않을 정도로 버틸 수 있다.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항해사가 되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실력을 갈고 닦을 수 있다. 실제로 프리랜서는 직장인보다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경험이 쌓일수록 실력이 늘고, 실력이 늘수록 퀄리티가 좋아진다. 결국 일이 많아지고 돈도 벌게 된다.


그렇다고 돈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프리랜서가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자유란 사실 돈에 대한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돈에 대한 강박이 사라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행이 시작된다. 주변 사람을 이용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나고 사랑하는 여행. 즉 타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상대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서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존감을 높이게 된다.



매일매일이 특별한 여행


요즘에는 건강 관리를 위해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다. 직장 다닐 때는 기력이 달려 운동할 엄두도 안 났는데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꾸준한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필라테스 강사를 짝사랑하고 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누군가를 마음 들어 하는 일도 에너지를 뺏기는 것 같아서 두려워했는데 말이다.


다시 필라테스 강사가 내게 물었던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휴가 어디로 가세요?”

“아, 프리랜서라 특별하게 따로 휴가를 가진 않습니다.”

“그러시구나. 평소에 여행 많이 다니시나 봐요.”

“그냥 매일매일이 여행이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달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조명처럼 혼자 빛나고 있는 달이 무척 신기했다. 어쩌면 내가 지구로 놀러 온 달의 시민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난 지금 지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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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한공기
한공기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연구하는 소통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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