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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자와 우주먼지

"그 단어를 곱씹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미세한지, 얼마나 찰나인지 생생하게 와닿는다."

이은혜

2019-10-10


20대가 되어 ‘대연애시대’를 맞이하면서 취미도 만개했다. 술 좋아하는 연인을 만나면 아는 칵테일이 많아졌고, 책벌레와 사귀면 좋아하는 작가가 두어 명 더 생겼다. 누군가를 연모하게 되면 그 사람만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취향과 호오까지 사랑했다. 나는 그 사람이 읽는 책이 궁금했고 듣는 음악이 궁금했으며 하다못해 따스한 노란 조명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창백한 흰 조명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다양한 것들을 찔끔찔끔 좋아하는 성정인 것은 지난 인연들의 공이 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8살, ‘게임키드’ B와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도 온라인게임 계정을 만들고, 함께 가상의 세계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신나게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현생의 스트레스를 풀던 참이었다. 퀘스트를 마치고 NPC(게임 속 가상 캐릭터/Non Player Character)를 클릭했다. 얼른 내가 바친 PC방 요금만큼의 경험치를 내놓거라 하는 마음과 함께.


그런데 그 캐릭터 머리 위 말풍선에 이런 단어가 뜨는 것이었다. ‘필멸자여...’ 나는 헤드셋을 벗었다. “얘가 뭐라는 거야?” B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멸할 자, 그러니까 언젠가는 죽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지.”


필멸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된 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철학적인 단어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인간이 얼마나 한시적이고 덧없는 존재인지 표현하기 위해서는 세 글자로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그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였다면 필멸자 대신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세상의 박테리아여... 신이 눈 감았다 뜨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우주의 먼지여...’ 글은 그 사람을 닮는다더니, 단어도 구질구질 설명이 많은 것이 나를 닮았다. 


그 뒤 바쁜 업종으로 이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을 접었다. 내가 얼마나 무자비한 마법사였는지, 얼마나 화려한 마법을 연마했는지는 빠르게 잊었지만 필멸자라는 단어는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이 단어가 뇌리에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필멸자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2011년 서울 구로동의 PC방 못지않게 문화충격을 받았던 장소가 2004년 한 여름밤의 카오산 거리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여자애 넷이서 태국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인생 첫 여권, 첫 비행기, 첫 입국심사.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내내 넷이었지만 잠깐 혼자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후텁지근하던 어느 밤, 나는 홀로 산책을 나섰다. 우리가 묵는 게스트하우스는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이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카오산 로드 인근이었다. 그곳을 거닐어보기로 한 것이다. 길 초입부터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흥청거림이 난무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언어가 들려왔다. 그 다채로운 언어들은 크림색부터 초콜릿까지, 지구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색의 얼굴들에서 흘러나왔다.


카오산로드에서 체감한 지구, 그리고 우주


카오산 거리에 혼자 서보기 전까지 지구란 내게 이론에 불과했다. 태양에서 세 번째로 가깝고 달을 위성으로 가졌으며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여섯 대륙으로 나뉜다는 것. 이런 말들은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단어가 주는 거리감만큼이나 그때까지의 나에게서 멀었다. 그런데 카오산 로드에서 각국의 언어로 구사되는 술주정을 들으며 서있자니 점차 실감이 나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의 모국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적인 언어일 뿐이고, 내 행색은 누가 봐도 극동아시아의 이방인이다. 이럴 수가... 세계가, 지구가 실존했다니!


그 여행 이후로 나는 가끔 나사(NASA)에서 대중에 공개한 우주 사진을 찾아보곤 했다. 과연 칼 세이건의 말처럼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에 불과했다. 그 푸른 점 안에서 나의 좌표는 어디쯤인가 궁금해지면 구글어스에 접속해 내 자취방 위치를 찍었다. 마우스 휠을 굴리면 서울시 위에서, 더 굴리면 대한민국 위에서, 그리고 종내는 지구라는 푸른 점 위에서 내 위치를 관조할 수 있었다. 그 눈물 나게 미미한 티끌 수준의 존재감이라니.


필멸자 사건과 카오산 로드 사건은 얼마간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나를 볼 수 있게 해주었기에 그렇다. 결국 우리가 몸담은 세계는 우주 위에 떠다니는 한 점 먼지이고, 그 먼지 위에서 우리 생은 전광석화처럼 지나간다. 지구 위에 사는 이상 우리는 모두 필멸자다. 나는 이 말을 인생 답 안 나오던 시기에 자주 떠올렸다. 


올해 쫓겨나듯 영문도 모른 채 일터를 떠나야 했던 시기에도 이 말에 기댔다. 며칠 몸이 아팠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우주의 먼지로 사는데, 찰나 같은 생에 이런 일로 오래 앓을 순 없다는 생각이 벼락같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고가 단순해졌다. 그날 나는 잔고를 확인한 뒤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짧은 퇴사 기념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무명의 글쓰기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회사에 나갈 때보다 벌이가 적다. 그런데 그만큼 씀씀이도 줄어서 괜찮다. 돈 되는 일과 돈 되지 않지만 즐거운 일을 적절히 분배해서 하고 있다. 


가끔 프리랜서로 사는 일이 녹록지 않을 때, 카드 값을 정산해보고 한숨이 나올 때, 나만 빼고 다 잘 나가는 것 같은 지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볼 때, 나는 다시 ‘필멸자’나 ‘우주의 먼지’ 같은 단어를 되뇐다. 그 단어를 곱씹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미세한지, 얼마나 찰나인지 생생하게 와닿는다. 결론은 항상 되도록 많이 여행하고, 되도록 즐겁게 살아가자는 마음가짐으로 갈무리된다. 기왕지사 우주의 먼지로 살 것이라면 즐겁게, 이곳저곳을 많이 부유해본 먼지가 되리라. 


광활한 우주 안에서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들


이 글을 쓰는 날 기준의 세계 인구는 77억 1457만 6923명이다. 우리 은하의 별은 4000억 개다. 지구인 한 사람에게 별을 하나 씩 준다고 해도 3923억 개가 남는다. 은하 하나의 얘기다. 이런 은하가 우주에는 2000억 개가 된다. 이쯤 되면 나의 소명은 있는 힘껏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의 77억 동료 먼지들이여, 필히 멸할 필멸자들이여, 순간의 생 안에서 자주 행복하시기를.




일러스트 - 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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