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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노동의 본질 – 그들은 왜 농자천하지대본을 말했는가

박문국

2017-03-02

노동의 본질 – 그들은 왜 농자천하지대본을 말했는가

 

현대의 많은 사람이 성리학을 폐쇄적, 교조적인 사상이었다고 인식하곤 한다, 그리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운영된 조선 왕조 역시 직업의 귀천을 따진 사회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을 대표하는 용어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조선은 500년 동안 농업만을 숭상하고 상업을 천시하여 망해버렸다는 이야기는 2017년 현재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농공상이 직업의 구분이 아닌 신분제의 형태라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연 그럴까?

 

사실 사농공상이란 용어는 어디까지나 백성을 직종에 따라 구분한 것일 뿐 각각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사’라는 특정계층이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군림하기는 했으나 이런 것은 전근대라면 동서양 모두 비슷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일례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농공상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각자의 생업에 힘써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할 때나 사용되며, 그마저도 500년 동안 16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을 만큼 등장이 저조하다. 그러니까 사농공상이 당대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고 단언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또한 조선 조정이 의도적으로 상업을 천시했다는 통념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우선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보부상 집단과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통해 역성혁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한 바 있다. 이후 조정은 그 대가로 물품의 독점권 등 여려 이권을 제공하였고, 아예 고종 때에는 보부상들이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조직해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정의 비호를 받다 보니 보부상들이 일반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도 적지 않다. 상업을 천시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이 농업을 가장 중요시하고 장려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리학이란 이념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 식량 자급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일단 한반도는 쌀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산지가 많은데다 평균 위도가 높아 남부 지역을 제외한다면 충분한 일조량을 얻는 것도 힘들다. 더군다나 대부분 강우량이 6~8월에 집중되다 보니 농사에 가장 중요한 4월, 5월에 물을 대는 것도 고역이다. 여기에 더해 자연재해도 잦은 만큼 구호를 위한 비축량도 따로 마련해야 했다. 즉 국가의 모든 역량을 농업에 집중시키지 않으면 생존을 담보 받기 어려웠다. 상업의 진흥과 시장경제의 발달은 식량 생산력이 뒷받침 된 다음의 문제다.

 

다 자란 벼와 나무가 있는 농촌 풍경이다.

▲ 조선이 농업을 가장 중요시하고 장려한 것은 성리학이란 이념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식량자급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상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화폐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경우 원래 금속자원이 많은 데다 16세기경 세계 은 총생산량의 30%를 차지하던 이와미 은광이 개발되며 에도 시대의 활발한 상업 발달에 기여했으나 한반도에는 화폐의 재료로 쓸 만한 금속이 부족했다. 실제로 세종은 일찌감치 화폐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전국 사찰의 종을 녹이고 일본으로부터 구리를 수입하는 등 20년간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실패한 바 있다. 이때의 화폐개혁이 조선의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흥미롭게도 조선에서 상업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는 것은 성리학의 교조적인 면이 극대화된 사례로 여겨지는 예송논쟁 전후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은이 유입되고 양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서인들은 상업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재부민산론(財富民散論)’을, 남인들은 상업 활동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을 각각 주장했는데, 각 붕당의 주장은 이후 정책에 고루 반영되어 대동법의 확산, 상평통보 주조 등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영조·정조대에는 이앙법의 보급, 고구마·감자 등의 전래로 생산력이 증진되며 상업을 진흥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그래서 문체반정 등을 통해 성리학과 괴리된 사상을 탄압하고 스스로를 유교의 대통이라 자처하던 정조가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대대적인 상업 개혁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조선이 농업이라는 직종을 유난히 중시한 것은 성리학이라는 특정 사상에 교조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다. 일을 한다는 것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것이며 조선은 현실적인 한계를 인지한 뒤 국가의 생존을 위한 효율적인 노동을 신민들에게 요구했을 뿐이다. 현대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과거와는 달리 자연환경은 문명의 존립에 과거만큼의 제약을 가하지는 못한다. 현대 인류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영위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상상치도 못한 다양한 직업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나날이 치솟는 실업률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일부에서는 청년들이 전문직이나 대기업처럼 높은 연봉을 받는 직업에만 집착하는 것이 실업률 상승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에는 한 여행작가가 7급 공무원이 꿈이라는 청년을 한 대 때렸다고 언론사 인터뷰에서 자랑스럽게 언급한 일이 있다. 분수를 모른다고, 꿈이 없다고, 남들 하는 것만 한다고, 개인의 부족함에 책임을 덧씌우는 인식이 너무도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취업준비생이 몇 가지 특정 직종에 집중하는 것은 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한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한 꿈의 성취나 자아에 대한 발견 같은 건 그다음의 문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한다는 것의 본질은 생존의 수단이다. 여러 미사여구로 노동을 신성한 것처럼 포장하더라도 이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이 왕조, 혹은 국가의 생존이었다면 이제는 개인의 생존이 더 중요해진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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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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