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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우리집] 우리의 집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조성룡

2015-12-02

나의 집, 우리집

우리집에 대한 몇 가지 질문


1951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우리 가족은 7년 동안 살던 영등포 집을 떠나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리고 동래에 정착하고 난 후 11년이 지나 다시 서울로 환도하였다. 서울의 지형과 달리 부산은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전차길이 그러했듯이 해안을 따라 연결된 산비탈에 기대어 마을이 들어선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식 나가야 모양의 단칸방에 온 식구가 세 들어 살다가 몇 년 후 3칸 초가집으로 옮겼고(그 집에서 이북에서 내려오셨던 조부는 돌아가셨고 어린 누이들이 태어났다) 그 자리에 부친이 설계하여 지은 대략 30-40평의 평지붕 새 집(상당히 모던한) 에서 지냈다. 그때의 나의 집과 12년 동안 다녔던 산비탈도로 부근의 학교, 항구와 바다가 바라보이는 선형 도시와 주변 자연환경에서 자라면서 얻은 체험과 기억이 삶의 바탕이 되었다.

 

피난 가서 살았던 부산의 고지도. 12년간(1951~62) 살았던 집 평면도

▲ 피난 가서 살았던 부산의 고지도. 12년간(1951~62) 살았던 집 평면도

 

지금 후기산업사회, 현대인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 더 이상 사람들은 집에서 태어나지 않으며 집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장소는 병원이고 집은 그저 도시에 흩어져있는 수없이 많은 무슨 무슨 ’방’과 함께 그냥 ‘사는’ 곳이다. 우리나라처럼 전통적인 농촌공동체 양식의 삶이 오래 존속하였던 지역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1990년대 어느 시점에서 집의 의미와 개념은 그렇게 축소되었다(사회복지가 향상되어서일까, 국민소득이 증가하여서일까?).

 

1980년대 초 두 해 동안에 부모님과 외할머니 세분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강남 청담동의 스무 평 저층아파트에 살았고 좁은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리고 1983년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설계 할 때는 장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관을 수평으로 운구할 수 있는 승강기와 문상객을 위해 천막을 칠 수 있는 넓은 마당) 공간과 시설을 고안하였다. 입주한지 몇 년 동안 잘 쓰였지만 그것들은 90년 중반쯤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거의 모는 사람들이 시설이 한결 좋아진 병원 영안실에서 고인의 마지막을 보내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90년대 문상을 위해 천막을 쳤던 선수촌아파트의 넓은 마당

▲ 90년대 문상을 위해 천막을 쳤던 선수촌아파트의 넓은 마당

 

건축법에서 집은 단일 세대, 혹은 복수의 세대가 사는가에 따라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으로 분류한다. 서로 독립적인 여러 세대가 하나의 건물 내에 공동으로 거주하는 주거의 형태인 공동주택(이웃 일본에서는 공동주택 대신에 집단주택, 집합주택이라는 용어를 쓴다)은 규모와 형식에 따라 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으로 나눈다. 아파트와 연립은 공간 구성 방법이 다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층수에 따라 분리시켜 부른다. 4층 이하를 연립(聯立)이라 하고 5층 이상을 아파트로 분류한다(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고급주택도 실은 연립주택이다). 오랫동안 이러한 불합리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연립은 저층아파트의 부정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사회에 퍼져있듯이 아파트가 아니면 부동산으로서 가치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 그 밖에도 시대에 따라 주상복합과 오피스텔, 원룸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집합적인 도시주택이 늘어났다.

 

 

부산 해운대빌라. 실은 19세대 연립주택이다.

▲ 부산 해운대빌라. 실은 19세대 연립주택이다.

 

역사적으로 ‘주택문제’를 극복하기위하여 가장 열심히 노력한 나라는 영국이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후에 도시화-산업화의 결과 도시로 모여든 저소득계층의 극심한 주택난과 비위생적인 도시 환경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것을 해결하기위하여 공중위생환경을 개선하고, 공공을 위한 정책에 의하여 국민에게 적절한 주택을 공급하려는 ‘하우징(housing)’의 개념을 성립하였다.

 

이와 다르게 60년대 우리 도시에 등장한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근대국가들의 도시주택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면 비 도시지역의 저렴한 토지를 개발하여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공급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70년대 이후 이른바 ‘합동개발방식’이라는 방식으로 건설된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공공이 개입하여 주민에게 합당한 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주택개발정책이 아닌 민간기업의 경쟁 속에서 주민들의 비용으로 도로나 전기, 상수도, 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을 마련하고 건설회사의 브랜드로 단지이름이 연속하는 이상한 도시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이렇듯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아파트로 가득 찬 신도시(실은 뉴타운이 아니라 베드타운이다)를 건설하면서 오랫동안 정주의 터였던 구도심(올드 타운)을 쇠락하게 만드는 현상이 일어나고, 나아가 지은 지 30년이 조금 넘으면 주민들이 앞 다투어 살던 아파트를 재건축하기를 추진하는 풍토가 이 땅에 자리 잡았다. “경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해괴한 플래카드가 걸리면서 전보다 훨씬 더 크고 밀도가 높은 새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 원래 살던 원주민은 많이 사라지고, 남았다고 해도 그들 가족이 갖고 있던 집단기억은 주민들과 함께 오래 자란 나무들을 옮기거나 제거하면서 깡그리 말살된다.

 

 

“경축 안전진단 통과”란 말과 달리 실은 우리 아파트가 더 이상 구조적으로 안전하지 않아 재건축 가능조건을 획득했음을 축하한다는 의미이다.

▲ 경축 안전진단 통과”란 말과 달리
실은 우리 아파트가 더 이상 구조적으로 안전하지 않아
재건축 가능조건을 획득했음을 축하한다는 의미이다.

도곡동 주상복합군. 제일 높은 건물은 타워팰리스

▲ 도곡동 주상복합군. 제일 높은 건물은 타워팰리스

 

20세기 초 서구의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시민들이 더 나은 도시환경에서 살려면 인구밀도가 높고 복잡하고 비위생적인, 전통적인 도시와 전혀 다른 도시를 건설해야한다고 믿었다. 더구나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고 철도노선과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동성이 높아지면서 도시는 빠르게 교외로 확산되었다. 당연히 일터와 집터가 분리되었다(직주분리). 1960년대에 이르러 안전하고 효율적인 도시를 지향하였던 서구도시에서 기능과 효율성을 강조했던 근대 도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도시를 주거, 상업, 오락지구 등으로 용도 분리하여 개발하는 도시계획이 공공생활과 지역의 정체성에 크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주장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7, 80년대 에너지와 환경문제, 지속가능성 등이 대두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간 중심의 도시공간과 장소 만들기가 새로운 목표로 떠올랐다.

 

더구나 산업사회를 지나 컴퓨터, 인터넷, 통신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로 진입하면서 집의 형태나 공간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도시와 주택의 공간개념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부가 자식과 함께 사는 가족 모델(홈 스위트 홈) 역시 달라졌다. 1인 세대, 고령세대뿐 아니라 지금까지 흔치않던 여러 세대구성이 나타났다. 일터와 집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도시공간의 외부와 내부의 의미도 약해졌다. 전과 달리 직주근접방식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시설을 공유하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 강남의 신 개발지역의 단층-2층 단독주택지가 30여년 지나 지금 다시 다층의 주거와 업무공간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복합개발로 용적을 늘려가고 있는 것은 이러한 도시 공간 변화와 관계가 깊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를 지나 일제 강점기 사이에 집장수들이 큰 필지를 작게 나누어지었던 서울 북쪽의 도시형 한옥들을 포함한 일반주택지는 90년대 주택건설을 촉진하는 법과 제도를 따라 진행된 대량 주택건설 사업으로 대부분 다세대, 다가구, 원룸 등 소규모 주택으로 전환되었다.

 

 

북한산 아래 그린벨트에 무단 점거 마을을 개선하기 위해 수립한 정릉골 저층 아파트단지. 작은 집이 빼곡 들어찬 원래의 구릉모습을 닮도록 조정했다.

▲ 북한산 아래 그린벨트에 무단 점거 마을을 개선하기 위해 수립한 정릉골 저층 아파트단지. 작은 집이 빼곡 들어찬 원래의 구릉모습을 닮도록 조정했다.

 

인구에 비하여 평평한 땅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있다. 대부분의 국토가 경사지임에도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는 집짓기가 수월하지 않은지 ‘자연스럽지’ 않다. 집을 짓기 전에 차량의 접근이 쉽도록 우선 땅을 편편하게 깎아 정지하고 경계부분을 높은 옹벽이나 축대로 해결하려는 토목공사로 우선 해결하려는 생각이 문제인데 특히 규모가 큰 단지인 경우에는 도시에 끼치는 영향이 극심하다. 지난 10여 년 간 서울의 강북지구 여러 군데 높은 언덕에(80년대에 한강변에 남향배치의 일자형 아파트로 엄청 긴 벽을 세워놓은 것에 이어) 재개발, 재건축사업으로 높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는 지역의 경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지형의 흐름을 따라 변하는 지역의 경관을 세밀하게 조정하고 주변을 배려하면서 집합적으로 집짓는 작업이 필요한 곳임에도 용적을 무리하게 확보하고 주민의 일상적인 삶보다는 자동차 접근 편의를 우선한 욕망 때문에 어려운 조건을 합리적으로 공간계획하지도 못하고, 경사가 급한 구릉지에 지은 주택이라는 장소적 특성도 드러내지 못한 결과다(대부분의 집은 강남의 평지에 지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은 인간의 삶을 담는다고 한다. 도시의 부분을 점유하면서 주변과 반응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집은 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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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조성룡
조성룡

선유도공원, 소마미술관, 서울어린이대공원 꿈마루등을 설계하였다. 의재미술관, 이응노의 집으로 2회의 한국건축문화대상(대통령상), 선유도공원으로 김수근문화상과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 sa/서울건축학교 교장,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2006) 한국관 커미셔너, 문화재청 건축문화재위원을 지냈고 현재 성균관대 SKAi/성균건축도시설계원 석좌초빙교수, 도시건축집단/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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