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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염치

- 오늘, 키워드 인문학 -

강성훈

2022-03-29

오늘, 키워드 인문학은?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 마음,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키워드들……. 우리는 왜 어쩌다 이들의 움직임과 향방에 대해 시시때때로 관심을 기울이고 촉각을 세우게 되는 걸까요? 각계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시선을 통해 우리 모두의 지금을 좌지우지하는 다양한 키워드들에 대해 흥미롭고도 새로운 인문학적 통찰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위선이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할 수 있다. 위선은 못난 인간이 더 못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위선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행태가 비난받을 만한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위선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의 몰염치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위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염치를 갖추는 것이겠다…….



악보다 위선을 더 혐오하는 사회



NYT naeronambul(내로남불)

세계어가 된 내로남불(이미지출처: 조선일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위선은 최고 악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단순한 악인보다 오히려 위선자를 더 혐오하는 것 같아서다. 위선의 이름으로 가장 강하게 비판받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로남불’이라고 불리는 행태가 아닐까 싶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행태가 비난받을 만하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것이 왜 ‘위선’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는 것일까? 이중잣대는 흔히 방어적 기제로 작동한다. “불륜이 아니라 로맨스였어요”“땅 투기가 아니라 투자였어요” 등의 이야기는 보통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제시되는 것이고, 여기에는 ‘선을 가장한다’라는 위선의 계기가 특별히 개입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런 변명을 제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이러저러한 핑계로 포장하는 것일 따름이다. 내로남불이 위선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것은, 평소에 정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하던 사람이 부정의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서는 자기 행동의 부도덕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일 때이다.


이 사람의 행태를 ‘위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거나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반하장도 그 자체로 보면 위선이라기보다는 몰염치로 규정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거꾸로 도덕적 삶에 대한 그의 주장 때문이라기보다 부도덕한 행동과 적반하장 때문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이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난을 넘어 혐오를 자아내는 일이지만,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행태 전체가 위선의 이름으로 비난을 받는다고 하면, 이 행태를 위선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도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솔직함도 좋지만 ‘추한 욕망과 감정’ 인정 필요

 


“부~자 되세요!”

큰 화제가 됐던 BC카드 부자 되세요 광고(이미지 출처: BC카드)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물론 좋은 말이지만, 그 기준을 약간만이라도 높게 잡으면 누구도 그것을 충족시키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종종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도 잘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입바른 소리로 들릴 공산이 크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내로남불에 대한 혐오와는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위선에 대한 반감이 급격하게 커진 것 같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IMF 사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예기치 못한 사태로 가정이 황폐해지는 일을 겪고 나서, 예의를 차리고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전통적 삶의 지침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더불어, 당시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인기를 끌었던 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이 가진 욕망과 그에 따른 감정에 솔직해지자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형성되기도 하였다. 누구나 욕망을 가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오히려 욕망이 발전의 원동력임을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면, 욕망의 제한을 강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가 가해질 수 있다. 타인의 욕망을 제한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종의 반사이익 같은 것을 얻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욕망에 솔직해지자는 당당함은 이때의 욕망이 적어도 추한 욕망은 아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추한 욕망과 그에 따른 추한 감정을 갖는다. 자신에게 추한 욕망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니까 이렇게 살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우리는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이 추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욕망과 감정을 추한 것으로 규정하는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이 기준은 자신이 어떤 욕망과 감정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지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보니, 고통으로부터의 회피 본능은 은연중에 이 기준을 낮추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니까 염치없는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한 욕망과 감정의 기준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기준보다 현저하게 낮추어 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함 기준 내리면 몰염치 심화... ‘악순환’



기준을 낮게 잡을 때의 문제는 단순히 타인으로부터 뻔뻔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추하다고 규정하는 욕망과 감정을 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특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 싶었던 때가 누구나 한 번은 있었을 것이다. 꼭 이런 때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갖는 욕망과 감정 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인식하기 마련이다. 특히 ‘나 역시 그런 욕망이나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과 감정은 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의 추한 욕망과 감정은 사실 내가 가진 추한 욕망과 감정 중에서는 그나마 덜 추한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추한 욕망과 감정에 대한 나의 기준은,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것으로 인식하는 욕망과 감정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욕망과 감정 중 어느 선까지가 나에게 인식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 기준이 낮아지게 되면, 내면 깊이 숨겨져서 행동으로 구현될 기회가 제한되어 있던 욕망과 감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갈 구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수면 위로 올라온 욕망과 감정들은 되먹임 작용을 통해서 다시 은연중에 이 기준을 더 낮추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몰염치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조차 염치가 있어야 가능



〈프로타고라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 아카넷

플라톤의 책 〈프로타고라스〉의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욕망과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나는 나의 어떤 욕망과 감정이 부끄러워서 나에게 그런 욕망과 감정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속 깊숙이 감추어진 욕망과 감정들과의 대면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욕망과 감정을 추한 것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나 자신의 진정한 기준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군자나 구제 불능으로 후안무치한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추한 욕망과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스스로 설정한 기준과 나 자신의 속마음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때 나의 기준을 고수하는 것, 이것도 일종의 위선이라고 할 만하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의 등장인물 프로타고라스는 정의롭지 않은 사람은 정의로운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누어 갖고 있는 염치, 혹은 분별에 근거한다고 하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종류의 위선일 것이다.



위선은 더 못나지는 걸 막는 최후의 보루



담장

담장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내로남불은 이런 식의 위선과는 거리가 멀다.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욕망과 감정들이 있을 것이다. 이 욕망과 감정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그 정체가 스스로에게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것들이 이중잣대의 적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인 한에서 이것들은 추한 것이다.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할 만하다. 누구나 타인보다는 자신에게 더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최소한 그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선은 비난거리라고 하기 어렵다.


위선이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할 수 있다. 위선은 못난 인간이 더 못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위선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행태가 비난받을 만한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위선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의 몰염치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위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염치를 갖추는 것이겠다. 염치를 갖추는 것에는 오히려 위선의 계기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염치에 근거를 둔 위선은 악덕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 키워드 인문학] 위선과 염치

- 지난 글: [오늘 키워드 인문학] 화에 대하여; 어떻게 화를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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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훈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진
강성훈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덕과 앎에 대한 플라톤의 초기 입장과 중기 입장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로마 원전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모임인 정암학당의 연구원으로 플라톤 전집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전집 번역의 일환으로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와 『에우튀프론』을 번역하였다. “『파이돈』에서 대중적 시가와 뮈토스”, “플라톤의 『국가』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과 영혼의 세 부분”,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사와 존재사를 구분하였는가?”. “고대 그리스어 einai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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