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일은 알 수가 없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선택은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길 선택으로도, 실수라고 여길 선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무튼 배우자는 또 다른 자신이며 운명공동체다. 따라서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배우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자신과 가정, 나아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봄날의 신부를 좋아하세요?
2022년 5월 달력
‘5월의 신부’라는 말이 있다. ‘5월에 결혼하면 행복해진다’는 속설과 관련되는데,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유럽의 5월제에서 5월을 상징하는 청춘 남녀를 뽑았으며, 이들이 결혼할 경우 최고의 커플이라는 찬사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또는 5월이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달이며, 그녀의 특별한 가호를 받으며 결혼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봄이 완연해지고 사방에 꽃이 피어나는 계절, 5월. 그런 만큼 5월에 결혼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이런저런 전설이 붙었으리라. 마침 우리나라의 경우 5월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있어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말도 자연스레 하게끔 되었고, 2007년에는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공식 지정함으로써 5월과 결혼, 가정을 더욱 연관해서 보게 되었다. 그래서 5월에는 ‘결혼’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결혼은 국가와 권력을 판돈으로 건 거래
D'Isabelle de Castille à Philippe VI(이미지 출처: herodote)
‘정략결혼’은 동서고금에 흔했다.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은 왕실 사이의 결혼으로 서로 다른 국가가 이어지거나 갈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특히 의미가 컸던 결혼은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을 먼저 들 수 있다. 그 결혼은 마치 부정한 일인 듯, 남들 눈을 피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녀의 오빠이자 당시 왕이던 엔리케 4세는 누이를 왕위 다툼에서 밀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아라곤과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모두 영유하던 페르난도와 결혼할 경우 곤란해지므로 목소리 높여 ‘이 결혼, 난 반댈세!’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과 딴판인 결혼 상대를 자꾸 들이대는 오빠에게 질린 이사벨은 결국 나들이를 간다는 핑계로 왕궁을 빠져나와, 하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해 있던 페르난도와 도둑 결혼식을 올렸다. 이는 에스파냐의 두 강국을 하나로 묶고, 장차 에스파냐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이에게 싫다는 결혼을 강요한 왕으로 영국의 헨리 8세도 있다. 스스로 여섯 차례나 결혼한 ‘결혼 왕’ 헨리는 프랑스와 새 동맹관계를 맺고 싶었고, 그래서 누이 메리에게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의 결혼을 종용했다. 그녀는 18세, 루이 12세는 52세였으며 이미 두 번의 결혼 전력이 있었기에 메리는 한사코 반대했지만 헨리는 ‘그가 죽고 나면 네 마음대로 상대를 찾아 재혼해도 좋다’는 약속을 해서 겨우 그녀를 달랬다. 1515년 새해 첫날, 루이 12세는 어린 신부를 맞이한 지 석 달 만에 눈을 감았다. 그 직후 메리는 헨리 8세로서는 속상할 노릇이었지만 오래 사귀어 온 단짝 친구와 재혼했다.
다른 문화권끼리의 결혼은 문화의 융합을 낳고
프랑스 마카롱, 영국의 에프터눈 티타임, 재봉
그러한 정략결혼이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고,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도록 함으로써 결국 그 사회를 더 격조 있게 만든 사례들도 있었다. 1533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에서 온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에 도착, 왕세자 앙리와 결혼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는 ‘신부의 격이 떨어진다’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결혼을 추진했는데, 그녀의 지참금으로 밀라노를 차지할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프랑스 왕실로서는 ‘뭐 주고 뺨 맞은’ 격이 되었지만, 카테리나가 프랑스로 가져간 식사 에티켓과 요리 레시피는 이후 프랑스 요리가 대발전하여 ‘세계 3대 요리’ 반열에 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국인들이 차 마시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1662년, 찰스 2세가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캐서린 오브 브라간사와 결혼한 게 계기다. 동방과 교류가 많던 포르투갈 왕실에서는 차를 즐겨 마셨는데, 그녀가 가져온 차가 찰스 2세와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것이다. 이는 차차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가, 영국인이라면 으레 매일 티타임을 갖는 게 당연하다시피 되기에 이른다.
고대 동양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바로 기원전 33년, 한나라에 항복한 흉노의 호한야선우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한원제(漢元帝)는 궁중의 미녀를 뽑아서 보내기로 했다. 이때 뽑힌 여성이 왕소군(王昭君)이었다. 전설로는 그녀는 천하절색이었지만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못생긴 듯 그려졌고, 그래서 초상화를 보고 그녀를 낙점했던 원제는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제는 당시 병이 심했고 왕소군을 보낸 직후 사망했으므로 전설은 전설일 뿐인듯하다. 아무튼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그곳에 한나라의 재봉과 농업 기술을 전하여 흉노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크게 개선했으며, 그래서 그녀가 죽은 뒤 ‘여신’으로 추앙되었다.
잘못된 만남, 역사의 유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축복받아야 할 결혼이 분쟁과 파멸을 가져온 사례들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제5권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그런 일이 잦았음을 밝히고 있다. 가령 미틸레네에서는 한 부자가 두 딸을 남기고 죽자 그 재산을 노린 덱산드로스가 집요하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었다. 마침 그는 아테네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아테네가 미틸레네에 쳐들어오게 했으며, 이 나라는 아테네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또한 에피담노스에서는 귀족파와 평민파의 대립이 심했는데, 귀족파가 정권을 쥐고 있을 때 어떤 귀족이 갓 결혼시킨 사위의 아버지에게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사돈이 자신을 돕기는커녕 홀대했다는 생각에 분노한 그는 복수를 위해 평민파와 연대하여 정권을 뒤엎었다. 이 정변의 영향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로 파급되면서, 끝내 그리스 고전문명을 파멸시키고 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진다.
측천무후(좌)와 그리고리 라스푸틴(우)의 얼굴(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경성경국(傾城傾國)의 미녀를 조심하라’는 말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통 정치에서의 대표적 금언이었다. 현명한 통치자가 미녀에게 홀린 나머지 나라를 망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실정의 원인을 여성에게만 돌리는 왜곡의 요소가 있는 금언이나, 651년 중국에서는 그에 합당한 경우가 실현되었다. 당고종(唐高宗)이 부황 당태종(唐太宗)의 후궁이었으며 부황 사후 절에 들어가 있던 무조(武照)에게 반해, 그녀를 입궁시킨 것이다. 고종은 날이 갈수록 그녀의 꼭두각시처럼 되어 자신을 천황, 그녀를 천후라 부르도록 하고 황제와 똑같이 대우하게끔 했다. 결국 고종이 죽은 뒤, 훗날 측천무후라 불리게 될 그녀는 당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 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가 되었다.
러시아 왕실의 몰락과 러시아 혁명도 어찌 보면 ‘잘못된’ 결혼이 불씨가 되었다. 1895년 이루어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은 문제가 없어 보였고, 부부의 금슬도 좋았다. 그러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던 그녀에게는 혈우병 유전인자가 있었으며, 그것이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발현하면서 황실은 근심에 싸였다. 이때 황제 부처의 마음을 휘어잡은 사람이 라스푸틴이었으며, 그가 비선 실세로서 국정을 농단하는 사이에 러시아의 국세와 황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결국 황실 가족은 퇴위에 이어, 제국을 무너뜨리고 수립된 소련 체제에서 집단 처형되고 만다.
결혼, ‘신중한 선택’이어야 하지만?
결혼식
앞일은 알 수가 없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선택은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길 선택으로도, 실수라고 여길 선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무튼 배우자는 또 다른 자신이며 운명공동체다. 따라서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배우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자신과 가정, 나아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결혼과 관련된 두 가지 특이한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다. 최근 조사에서 20~30대 남성의 경우는 결혼을 안(못)한 상황이 일반적이라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또 하나는 전례 없이 대선후보들의 배우자들에게 시선이 내내 집중된 지난 대선이다. 모두 결혼에는 신중해야 하며,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5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들 있기 때문일까. 그런 조심성은 과연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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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월 : 결혼
-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
함규진
2022-05-09
앞일은 알 수가 없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선택은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길 선택으로도, 실수라고 여길 선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무튼 배우자는 또 다른 자신이며 운명공동체다. 따라서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배우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자신과 가정, 나아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봄날의 신부를 좋아하세요?
2022년 5월 달력
‘5월의 신부’라는 말이 있다. ‘5월에 결혼하면 행복해진다’는 속설과 관련되는데,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유럽의 5월제에서 5월을 상징하는 청춘 남녀를 뽑았으며, 이들이 결혼할 경우 최고의 커플이라는 찬사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또는 5월이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달이며, 그녀의 특별한 가호를 받으며 결혼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봄이 완연해지고 사방에 꽃이 피어나는 계절, 5월. 그런 만큼 5월에 결혼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이런저런 전설이 붙었으리라. 마침 우리나라의 경우 5월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있어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말도 자연스레 하게끔 되었고, 2007년에는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공식 지정함으로써 5월과 결혼, 가정을 더욱 연관해서 보게 되었다. 그래서 5월에는 ‘결혼’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결혼은 국가와 권력을 판돈으로 건 거래
D'Isabelle de Castille à Philippe VI(이미지 출처: herodote)
‘정략결혼’은 동서고금에 흔했다.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은 왕실 사이의 결혼으로 서로 다른 국가가 이어지거나 갈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특히 의미가 컸던 결혼은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을 먼저 들 수 있다. 그 결혼은 마치 부정한 일인 듯, 남들 눈을 피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녀의 오빠이자 당시 왕이던 엔리케 4세는 누이를 왕위 다툼에서 밀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아라곤과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모두 영유하던 페르난도와 결혼할 경우 곤란해지므로 목소리 높여 ‘이 결혼, 난 반댈세!’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과 딴판인 결혼 상대를 자꾸 들이대는 오빠에게 질린 이사벨은 결국 나들이를 간다는 핑계로 왕궁을 빠져나와, 하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해 있던 페르난도와 도둑 결혼식을 올렸다. 이는 에스파냐의 두 강국을 하나로 묶고, 장차 에스파냐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이에게 싫다는 결혼을 강요한 왕으로 영국의 헨리 8세도 있다. 스스로 여섯 차례나 결혼한 ‘결혼 왕’ 헨리는 프랑스와 새 동맹관계를 맺고 싶었고, 그래서 누이 메리에게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의 결혼을 종용했다. 그녀는 18세, 루이 12세는 52세였으며 이미 두 번의 결혼 전력이 있었기에 메리는 한사코 반대했지만 헨리는 ‘그가 죽고 나면 네 마음대로 상대를 찾아 재혼해도 좋다’는 약속을 해서 겨우 그녀를 달랬다. 1515년 새해 첫날, 루이 12세는 어린 신부를 맞이한 지 석 달 만에 눈을 감았다. 그 직후 메리는 헨리 8세로서는 속상할 노릇이었지만 오래 사귀어 온 단짝 친구와 재혼했다.
다른 문화권끼리의 결혼은 문화의 융합을 낳고
프랑스 마카롱, 영국의 에프터눈 티타임, 재봉
그러한 정략결혼이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고,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도록 함으로써 결국 그 사회를 더 격조 있게 만든 사례들도 있었다. 1533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에서 온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에 도착, 왕세자 앙리와 결혼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는 ‘신부의 격이 떨어진다’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결혼을 추진했는데, 그녀의 지참금으로 밀라노를 차지할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프랑스 왕실로서는 ‘뭐 주고 뺨 맞은’ 격이 되었지만, 카테리나가 프랑스로 가져간 식사 에티켓과 요리 레시피는 이후 프랑스 요리가 대발전하여 ‘세계 3대 요리’ 반열에 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국인들이 차 마시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1662년, 찰스 2세가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캐서린 오브 브라간사와 결혼한 게 계기다. 동방과 교류가 많던 포르투갈 왕실에서는 차를 즐겨 마셨는데, 그녀가 가져온 차가 찰스 2세와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것이다. 이는 차차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가, 영국인이라면 으레 매일 티타임을 갖는 게 당연하다시피 되기에 이른다.
고대 동양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바로 기원전 33년, 한나라에 항복한 흉노의 호한야선우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한원제(漢元帝)는 궁중의 미녀를 뽑아서 보내기로 했다. 이때 뽑힌 여성이 왕소군(王昭君)이었다. 전설로는 그녀는 천하절색이었지만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못생긴 듯 그려졌고, 그래서 초상화를 보고 그녀를 낙점했던 원제는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제는 당시 병이 심했고 왕소군을 보낸 직후 사망했으므로 전설은 전설일 뿐인듯하다. 아무튼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그곳에 한나라의 재봉과 농업 기술을 전하여 흉노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크게 개선했으며, 그래서 그녀가 죽은 뒤 ‘여신’으로 추앙되었다.
잘못된 만남, 역사의 유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축복받아야 할 결혼이 분쟁과 파멸을 가져온 사례들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제5권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 그런 일이 잦았음을 밝히고 있다. 가령 미틸레네에서는 한 부자가 두 딸을 남기고 죽자 그 재산을 노린 덱산드로스가 집요하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었다. 마침 그는 아테네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아테네가 미틸레네에 쳐들어오게 했으며, 이 나라는 아테네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또한 에피담노스에서는 귀족파와 평민파의 대립이 심했는데, 귀족파가 정권을 쥐고 있을 때 어떤 귀족이 갓 결혼시킨 사위의 아버지에게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사돈이 자신을 돕기는커녕 홀대했다는 생각에 분노한 그는 복수를 위해 평민파와 연대하여 정권을 뒤엎었다. 이 정변의 영향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로 파급되면서, 끝내 그리스 고전문명을 파멸시키고 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진다.
측천무후(좌)와 그리고리 라스푸틴(우)의 얼굴(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경성경국(傾城傾國)의 미녀를 조심하라’는 말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통 정치에서의 대표적 금언이었다. 현명한 통치자가 미녀에게 홀린 나머지 나라를 망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실정의 원인을 여성에게만 돌리는 왜곡의 요소가 있는 금언이나, 651년 중국에서는 그에 합당한 경우가 실현되었다. 당고종(唐高宗)이 부황 당태종(唐太宗)의 후궁이었으며 부황 사후 절에 들어가 있던 무조(武照)에게 반해, 그녀를 입궁시킨 것이다. 고종은 날이 갈수록 그녀의 꼭두각시처럼 되어 자신을 천황, 그녀를 천후라 부르도록 하고 황제와 똑같이 대우하게끔 했다. 결국 고종이 죽은 뒤, 훗날 측천무후라 불리게 될 그녀는 당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 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가 되었다.
러시아 왕실의 몰락과 러시아 혁명도 어찌 보면 ‘잘못된’ 결혼이 불씨가 되었다. 1895년 이루어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은 문제가 없어 보였고, 부부의 금슬도 좋았다. 그러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던 그녀에게는 혈우병 유전인자가 있었으며, 그것이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발현하면서 황실은 근심에 싸였다. 이때 황제 부처의 마음을 휘어잡은 사람이 라스푸틴이었으며, 그가 비선 실세로서 국정을 농단하는 사이에 러시아의 국세와 황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결국 황실 가족은 퇴위에 이어, 제국을 무너뜨리고 수립된 소련 체제에서 집단 처형되고 만다.
결혼, ‘신중한 선택’이어야 하지만?
결혼식
앞일은 알 수가 없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선택은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길 선택으로도, 실수라고 여길 선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무튼 배우자는 또 다른 자신이며 운명공동체다. 따라서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배우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자신과 가정, 나아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결혼과 관련된 두 가지 특이한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다. 최근 조사에서 20~30대 남성의 경우는 결혼을 안(못)한 상황이 일반적이라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또 하나는 전례 없이 대선후보들의 배우자들에게 시선이 내내 집중된 지난 대선이다. 모두 결혼에는 신중해야 하며,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5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들 있기 때문일까. 그런 조심성은 과연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5. 5월 : 결혼
- 지난 글: 4. 4월 : 봉기, 학살, 혁명... 피맺힌 함성이 역사를 바꾼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5. 5월 : 결혼'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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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봉기, 학살, 혁명... 피맺힌 함성이 역사를...
함규진
6월: 순절
함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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