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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 다수의 ‘우리’ 안에 다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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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2022-12-22

리드문

 

조선무용이 서양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을 때였다. 조선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단한 성공을 했지만,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지의 동향에 맞춰 새롭게 무용을 다듬어가며 공연할 예정이었다. 구미로 떠나기 전부터 공연 제의가 있기는 했지만......

 


한류 원조를 찾아서


 

최승희(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승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류의 원조로 불리는 이가 있다. 배용준과 류시원이 아니고, 한국 드라마가 방영될 때면 이란의 거리에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는 그 <대장금>의 주인공 이영애도 아니다. 무용가 최승희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150회가 넘는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나서 ‘세계의 무희’라는 수식을 얻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의 일이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서 끝도 없이 기차 여행을 해야만 하는 험로였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승희의 말에 의하면 세계 순회공연 중 지나온 길은 3년 동안 10만 마일, 약 16만 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이다. 한두 해 정도 외국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있어도 공연을 위해 3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한 이는 당시로서는 전무했다. 게다가 ‘호평’을 받을 정도였으니 가히 기억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유럽, 남미까지 순회하는 대장정이었다. 공연이 성공적이지 않았다면 일찍 돌아왔을 것이다. 전란이 확산되지 않은 시기였다면 발칸 반도까지 공연 무대에 섰을 것이다. 그만큼 세계 순회공연은 최소한 한 해 정도 더 연장될 수도 있었다.


조선무용이 서양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을 때였다. 조선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단한 성공을 했지만,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지의 동향에 맞춰 새롭게 무용을 다듬어가며 공연할 예정이었다. 구미로 떠나기 전부터 공연 제의가 있기는 했지만, 여러 상황을 보아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 추측해본다. 그래서 일회성 공연보다는 중장기적인 순회공연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게 3년 동안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최승희는 자신의 완성된 무용을 세계무대에 올리는 것보다는 먼저 서양의 무용을 배우고 오겠다는 입장이었다. 조선무용에 서양식 기법을 반영해 만든 창작 무용에 몰두해 있던 최승희는 그 새로운 서양의 기법을 어떻게 참신하게 도입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발레를 배우고 일본 신무용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최승희는 그 누보다 ‘창작열’이 높은 안무가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편의 극적인 전개를 조선무용에 도입하면서 개성적인 창작무용이 탄생했으리라.


창작무용은 무용에 낯선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먼저 1937년 동아일보의 「최근 무용계 만평」을 쓴 김관은 “조선의 재래의 춤을 양무(洋舞)로 옴겨노왓다”고 폄훼하고 있다. 심지어 “의미 없는 노력에 불과하다”고 악평을 서슴지 않는다. 최승희가 구미로 떠나기 전이었다. 소설가 한설야는 「무용 사절 최승희에게 보내는 서 – 희화화된 조선정조」(《사해공론》 1938년 7월호)에서 최승희의 무용을 비판하기도 했다. 도구(渡歐) 고별 공연을 본 한설야는 “옛 조선 사람의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조선 춤에는 진실성이 결핍되어 있고 그릇된 모방성이 있을 뿐”이라고 혹평을 남긴다. 최승희가 처음 도착한 미국에서 ‘반일운동’의 여파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무렵이었다.



부채춤을 추는 최승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채춤을 추는 최승희(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계무대 위에 나가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준비하고 있던 최승희에게 뜻하지 않은 혹평이었고 외국에서 첫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미국에서 난관에 부딪힐 때였다. 최승희는 “「조선무용」 그냥 그대로 한다면 차라리 조선긔생(妓生)편이 오히려 더 나흘 것임니다”(「세계적 무희 최승희 여사의 대답은 이러함니다」, 《삼천리》 1941년 4월호)라고 자신의 무용이 일부 이해되지 않는 점을 아쉬워했다. 창작무용으로서 새롭게 자신의 무용을 찾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늘 향토의 사람들에게서 욕이나 어더먹지 않는가 걱정”(《삼천리》 1941년 4월호)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조선의 혼을 팔아먹는다”는 험담까지 들을 정도였다.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구분하지 않고, 일면만을 바라본 혹평이 아닐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답습하는 전통무용이 아니라 새롭게 창작된 무용이라는 점에서 몰이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자기의 길을 올곧이 가게 된다. 조선과 서양을 접목하려던 시도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창작이라는 면이 도외시된 채 평가된다는 점은 아쉬운 순간이었다.


최승희가 처음부터 조선무용을 한 것은 아니다. 초기의 무용은 서양 근대무용과 일본의 신무용의 강한 영향 속에서 시작되었다. 조선무용은 누구나 기생의 춤으로 여겼다. 그만큼 전통무용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기록도 자료도 없이 전승된 것이라고는 기방의 유희로 전락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최승희가 조선무용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에헤라 노아라>는 거나하게 취흥에 빠져 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착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예정되지 않은 공연에 우연히 대신 출연하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신진무용가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허세를 부리듯 가슴을 쭉 내밀거나 고개를 간들거리는 모습은 재미난 장면을 연출하면서 전통무용의 답습에 그치지 않는 “신선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기에 이른다.


최승희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선무용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생의 춤으로 천대받는 춤을 추기 위해 무용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춤의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무용을 권했다. 그렇게 무대에 오른 <에헤라 노아라>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흥미로운 춤사위는 도쿄의 관객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조선무용은 이후로 최승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세계 순회공연의 대부분은 조선무용으로 구성했다. “레파-트리- 30개 중 대개는 동양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고전을 소개하려고 애를 쓴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국 있을 때에 알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동양 정서를 많이 발견한 것 같습니다. 대개 무용가들이 구미공연을 하고 돌라오면 서양춤을 수입해 오는 것이 보통인데 저는 아마 그 반대가 되었나 봅니다. 동양적 춤을 수입해 왔으니까요.”(최승희, 「무사히 도라왔습니다 - 동경제국호텔에서」, 《삼천리》 1941년 1월호) 서양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무용에 집중되었다. 서양에 없는 춤이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서양을 모방한 춤이 아니라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이 새롭게 극화된 무대였기에 최승희의 공연은 구미 여러 나라를 오가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한성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성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무용의 대가 한성준이 그간 조선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을 천한 예인으로 인식했고, 그래서 대중 앞에 설 용기도 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에서 무용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창립을 알리는 회견 장소에서 최승희와 함께한 한성준은 “무용에 대하야 이해 없든 조선민중도 최승희 씨의 놀나운 무용으로 하야곰 조선무용을 재인식하게 되엿스니 그 깃붐은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무용」과 「음악」을 부흥식히고저, 최승희 한성준 양 거장 회견」, 《삼천리》 1938년 1월호)라고 한 바 있다. 최승희는 누구나 천하게 여기던 조선의 춤을 당당하게 세상에 내놓았고, 급기야 세계의 호평을 받으며 3년이라는 기간 동안 150회 이상의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최승희가 서양에서 배운 것은 자기 민족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과 역사가 아닌 다른 것은 진정한 자기의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점차 ‘동양’으로 외연을 넓힐 수 있으며, 그렇게 ‘세계’와 만나게 되리라는 점은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해되기 위해 우리를 바꾸는 데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느라 괴상한 국적 불명의 것들이 만들어지고 이내 사라졌다. 한류의 원조로 불리는 무용가 최승희의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가치’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우리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 가진 게 있어야 내놓을 수 있다.





[K컬처로 인문하기] 불특정 다수의 ‘우리’ 안에 다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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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작가
1971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고백이라는 장르』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시선집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등이 있다.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계간 《청색종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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