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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낸다는 것 #부당한 기대에 저항하기 #나의 연속성

- 오늘, 키워드 인문학 -

신주영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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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문

 

신입은 가끔 경력자가 따라 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이고 경력자라면 내지 못할 성과를 내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하건대 지금의 나는 십여 년 전의 그 변호사가 아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미리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중년이 되어서도 늘 첫사랑에 빠지고 가슴이 뛰고 설렌다면…

 

 

ㅣ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연속성은 무엇에 있는가

 

왼쪽부터 책 법정의 고수 표지 (출처: 알라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출처: ENA)

왼쪽부터 책 <법정의 고수> 표지 (출처: 알라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출처: ENA)

 

3년 전 문지원 작가와 에이스토리 기획팀이 찾아와 <법정의 고수>로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우선은 반가웠지만 잠시 망설였다. <법정의 고수>는 12여 년 전 내가 신입변호사로서 겪은 일을 소재로 쓴 사건 일지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성격의 에세이였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사생활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져 있었다. 이 이야기들이 대중적인 드라마로 모두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살짝 민망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주인공 캐릭터가 원래 <법정의 고수>의 화자인 나, 즉 ‘30대 신입 여성 변호사이자 가끔 만삭으로 등장하는 다둥이 엄마’가 아니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20대 미혼의 신입 여성변호사’로 바뀐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캐릭터가 바뀐다면 그 드라마를 보면서 나라고 생각할 만한 지인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내 기억 속의 경험들에서 내가 쏙 빠지고 다른 캐릭터의 누군가가 그 사건을 해결하느라 고민하고 뛰어다닐 장면을 떠올리니 기분이 묘했지만 어쨌거나 민망할 일이 생길 걱정은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드라마가 나왔을 때는 캐릭터만 바뀐 게 아니라 에피소드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예 <법정의 고수>가 아닌 다른 변호사들의 에세이에서 에피소드를 사용한 부분이 더 많았고 <법정의 고수>는 7, 8화 ‘소덕동 이야기’에만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캐릭터가 바뀌니 여러 설정들 - 사내 연애, 출생의 비밀 등 - 이 추가되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 변호사’와 <법정의 고수>의 화자인 ‘나’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새내기 여자변호사라는 것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20년차 변호사인 나를 기준으로 하면 공통점이란 여자변호사라는 것 뿐이었으니, 결국 엔딩 크레딧에는 ‘원작’이 아니라 ‘에피소드 원작’으로 기재되었다.

 

그런데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정작 <법정의 고수> 속의 ‘나’의 이야기라고 느낀 부분은 엔딩 크레딧에서 에피소드 원작이 <법정의 고수>라고 표시되었던 소덕동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정명석이 ‘워, 워’를 최수연한테 시켜야 할 만큼 의뢰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다던가, 패소의 기미가 짙어 보이는 사건임에도 의지를 불태우며 산더미 같은 자료를 뒤지고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직감 하나로 여기저기 탐문수사를 벌인다든가, 못다한 변론을 끝내기 위해 판사실에 뛰어 올라간다든가 하는 권민우가 우당탕탕이라고 별칭을 붙일만한 우영우의 모습에서 <법정의 고수> 속의 ‘나’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내가 나와 똑같은 주인공이 드라마에 나와서 민망함을 느껴야 한다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다행히도 문지원 작가와 박은빈 배우는 주인공 우영우 변호사를 이상하지만 매우 사랑스러운 호감형 캐릭터로 창조했고 우당퉁탕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귀여운 애교 정도로 보여서 굳이 민망하지 않아도 되긴 했다.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우영우 변호사 덕분에 <법정의 고수>를 찾아 읽고 나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이 지금의 나에게서 그 시절의 나 또는 우영우 변호사의 모습을 기대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고백하자면 2년 전 개정판을 내면서 12년 전의 초판을 다시 읽어보다가 그때의 나를 마치 다른 사람 보듯 읽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신입은 가끔 경력자가 따라 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이고 경력자라면 내지 못할 성과를 내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하건대 지금의 나는 십여 년 전의 그 변호사가 아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미리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중년이 되어서도 늘 첫사랑에 빠지고 가슴이 뛰고 설렌다면 그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년 차 변호사가 여전히 신입의 열정과 무경험을 무기로 직진한다면 과로로 조로했거나 벌써 업계를 떠났을 것이다. 대신 경력자에게는 경험지(經驗智, implicit knowledge)가 신입 때의 열정을 보충하고, 열혈 신입이 강렬한 승소와 장렬한 패소를 번갈아 할 때 노련한 경력자는 편안한 승소를 하고 예상 밖의 패소를 피할 줄 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전혀 무관한가? 나의 연속성은 무엇에 있는가?

 

 

ㅣ나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책 클라라와 태양 표지 (출처: 알라딘)

책 <클라라와 태양> 표지 (출처: 알라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에서 클라라는 AF(Artificial Friend)이다. 소설의 배경은 사람들이 교육을 통한 능력향상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유전자 결함을 교정할 뿐 아니라 강화시키는 ‘향상’이라는 시술을 받게 하는 시대이다. 아이들은 인공지능 로봇인 에이에프를 구입해서 친구로 삼는다. 에이에프들은 계속 신상품이 나오는데 클라라는 최근 모델 중에서 특히 사람들을 관찰하고 심리를 알아차리며 공감하는 능력이 인간보다도 뛰어나다. 클라라를 전시장에서 보고 한눈에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열네 살 소녀 조시는 ‘향상’이라는 유전자 조작시술을 받은 부작용으로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었고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조시의 언니 역시 그 시술을 받고 향상되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시의 엄마는 큰딸을 잃은 슬픔을 반복할까 두려워 클라라에게 조시를 복제할 정도로 똑같아지기를 요구한다. 조시가 떠난 후 클라라를 통해 조시를 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살릴 수 있는 것이 태양의 힘이라고 믿고 태양에게 전심전력을 다해 애원한다. 클라라의 애원은 인간의 간절한 기도와 비슷하다. 조시를 살리기 위해 최상의 에이에프로서 기능을 유지하는 자신의 머리 속 액체까지 희생한다. 결국 조시는 살아나고 클라라는 야적장에 버려지지만 클라라는 조시가 살아난 것에 기뻐하고 만족한다. 만일 조시가 죽었다면 클라라가 조시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거기에 대해 클라라가 야적장에서 만난 전시장의 매니저에게 한 대답은 아마도 작가가 제시하는 해답일 것이다.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찾고 찾아봤지만 그런 건 없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각자 고유하다. 그것은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다. 외모와 행동이나 능력이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소중하다. 어떤 역할을 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자녀이고 누군가의 이웃이기에 소중하다. 그러므로 고유하고 소중한 나 자신을 대신하고 이어갈 다른 사람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역할은 대신할 수 있어도 그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조시의 대용품으로 살기보다 조시를 사랑하는 친구로 남기를 선택했다. 그것이 야적장에 버려지는 길일지라도. 그리고 그러기를 잘했다고 결론짓는다. 조시를 이어가는 일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으므로. 그러니 조시가 떠나간 뒤에 클라라에게서 조시를 보기를 기대한 조시 엄마의 기대는 처음부터 그릇된 것이었으며 클라라에 그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 대한 부당한 기대는 폭력일 수 있다. 또한 기대에 찬 시선을 극복하는 것 역시 엄청난 내공을 요구한다. 왜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느냐고 상대방을 비난할 때 자신의 기대가 부당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 자신이 되는 외에는. 

 

 

ㅣ자신을 지켜낸다는 것-부당한 기대에 저항하기

 

왼쪽부터 배우 그레타 가르보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배우 금보라 (출처: 나무위키)

왼쪽부터 배우 그레타 가르보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배우 금보라 (출처: 나무위키)

 

그레타 가르보는 스웨덴 출신 헐리우드 배우로 1930년대 세계적인 탑클라스 여배우였다. 북유럽 미녀답게 170cm 큰 키에 금발 머리, 푸른 눈 뇌쇄적 매력을 가진 미녀 여배우의 대명사로 불렸다. 2차대전 기준으로 이후는 마릴린 먼로의 시대, 그 이전은 그레타 가르보 시대라고 할 정도의 독보적인 스타였다. 그런데 그녀는 한창 전성기이던 36세에 은퇴해서 이후 한 편의 영화도 찍지 않고 은둔한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84세에 사망했다. 그래서 대중들은 그녀의 30대 후반부터 80대 노년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지금은 여러 다른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당시 그녀가 밝힌 은퇴 이유는 ‘늙어버린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누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소멸시킨 것일까?

 

배우 금보라는 나의 어린 시절 하이틴 스타였다. 청순가련형의 주인공으로 인기가 한창이었을 때 결혼하면서 은퇴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중년 여인이 되어 코믹 드라마의 조연 역할로 출연하고 있었다. 비록 전성기 시절 매혹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반가웠다. 나중에 그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젊을 때는 주연을 맡으면서도 자기 성격과 맞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는데 나이 들어 맡는 악역이나 괄괄한 성격의 조연은 연기할 맛이 나고 재밌다고 했다. 그녀는 대중의 부당한 기대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켰다.

 

나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는 기대는 부당하다. 그레타 가르보에게 늙지 말고 영원히 아름다운 배우로 남으라고 하는 기대는 부당하다. 클라라에게 조시를 이어가기를 바라는 기대는 부당하다. 그런데 이런 부당한 기대는 사실 어쩌면 허상인지도 모른다. 대중의 기대는 허상일 가능성이 크다. 실존하는 폭력적인 기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 부모가 자식에게 엄마 친구 아들과 같이 되기를 기대하거나 자식이 치매를 앓는 부모에게 젊고 건강한 부모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부당한 기대는 때로는 나 자신에게서 오기도 한다.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지 않기를 바랄 수는 있으나 그러지 않기를 기대하거나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성장한다. 내면은 깊어지고 외적 관계는 확대된다. 변화에 적응하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은 성장의 방향과 일치한다. 누군가에게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정당한 기대에 부응하고 부당한 기대에 저항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자녀로서 누군가의 부모로서 누군가의 이웃으로서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만이 나의 변함없는 연속성이다.

 

 

[오늘, 키워드 인문학] #나를 지켜낸다는 것 #부당한 기대에 저항하기 #나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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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영 변호사 사진
신주영

변호사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합격해 현재 법무법인 대화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변호사 10년차 때 <법정의 고수>를 출간하며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세빈아 오늘은 어떤 법을 만났니?>, <헌법수업>, <옛이야기로 만나는 법이야기>,<질문하는 법사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법이야기> 등을 썼다. <법정의 고수> 중 일부가 최근 넷플릭스 1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7, 8화 에피소드의 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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