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킬링 디어>의 주인공 스티븐(콜린 파렐)은 안과 의사인 아내 애나(니콜 키드먼)와 두 자녀를 둔 성공한 심장 전문의다. 그는 소년 마틴을 알게 된다. 마틴은 스티븐이 담당한 수술 도중에 죽은 남자의 아들이다. 스티븐과 마틴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낸다. 스티븐은 마틴을 소개할 때, 자신이 죽게 한 환자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딸의 친구라고 소개한다. 유능한 의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스티븐은 마틴의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이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식을 숨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스티븐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마틴이 입은 피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주는 선물, 손목시계가 그 증거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선물을 주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모든 면에서 스티븐은 마틴보다 강자다. 강자가 약자에게 선물을 한다? 오히려 약자가 강자에게 대가성 선물 즉, 뇌물을 주어야 마땅함에도 말이다.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ㅣ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선물에 작동하는 원리는 등가의 원리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무감이 등가의 심리다. 고급 만년필에 대한 반응이 볼펜 한 자루라면 심리적으로 한쪽이 꿀리기 마련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이 책무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스티븐은 마틴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마틴에게는 과분한 선물이다. 소년은 이 시계의 가치만큼을 스티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동등한 관계가 이어진다. 마틴이 스티븐에게 내민 것은 스위스칼이다. 세계적인 다용도 칼이니 손목시계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마틴은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비에는 문외한이다. 손목시계와 스위스칼은 마틴의 관념 속에서만 그 가치가 동일하다.
도량형이 정비된 상태에서 교환의 대상이 같은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등가의 원리. 대칭성의 논리, 이는 익숙한 논리다. 시장을 지배하는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지불한 만큼의 서비스와 재화를 제공한다는 거래의 원칙이자. 네가 나에게 한만큼 나도 너에게 돌려준다는 형벌의 논리.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다. 정신적 피해보상의 원리도 이에 따른다. 피해의 깊이를 양적 무게로 계산하는 하는 것이 법이다.
탈리오의 법칙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 한 대를 맞았으면 두 대를 때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 몰라도 그렇게 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 있다. 무제한의 복수가 가해지는 원시 상태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함무라비 법전으로 대표되는 고대국가의 법질서 체제가 이 탈리오 법칙을 베이스로 한다. 스티븐이 마틴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 마틴도 스티븐을 자기 집에 초대한다. 선물에는 선물로 초대에는 초대로. 그러나 이 대칭의 논리는 오래 가지 못한다.
ㅣ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대가
일단 스티븐과 마틴은 사는 ‘급’이 다르다. 먼저 수입과 주택규모가 다르고, 옷을 입은 입성과 스타일이 다르다. 마틴은 홀어머니와 같이 사니, 4:2로 가족수로도 스티븐에게 마틴이 열세다. 스티븐의 아내는 안과의사이니 학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가계지출에서도 마틴의 홀어머니와 큰 차이가 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마틴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비대칭관계를 대칭관계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돈없이 그것이 가능할까. 궁여지책일까. 마틴은 스티븐에게 자신의 어머니와의 사귐을 은근히 종용한다.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반전이 시작된다. 마틴의 복수가 시작된다. 당신이 나에게 한 만큼을 당신에게 돌려준다는 것. 이 복수의 논리가 영화 후반의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영화 <킬링 디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마침내, 스티븐의 아들 밥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마치 자신이 주술사라도 된 듯 마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설명한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한 명의 죽음을 요구한다.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스티븐이 채워주는 ‘등가교환’을 제안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스티븐도 가족 중 한 명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새 아버지로 채우겠다는 등가의 논리다. 스티븐은 이 제의를 뿌리친다.
ㅣ가족의 위험한 선택과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
가족 중 한 명을 없앤다면 누구를 없애야 할까. 스티븐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공리주의가 고개를 든다. 남편은 딸과 아들 중 누가 우수한가를 묻는다. 현실 적합도로 생사를 결정하겠다는 공리주의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아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려 아버지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머리칼을 자른다. 한 가정에 침투한 비정한 시장논리. 좋게 말해서 경제적 합리주의, 효율지향의 공리주의에 호응하듯 아내는 아이를 또 낳으면 된다고 위안한다.
이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등장하는 방법이 이른바 존 롤즈의 <정의론>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선택의 주체인 선발자(뽑는 자)와 선발될 자(뽑힐 자)에게 선발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차단시키고 여기에서 우연히 선택된 결과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fairness)하다. 선발자의 눈이 피선발자의 외모와 신분과 출신을 알아보는 순간 선발은 불공평한 것이 된다. 스티븐은 복면으로 눈을 가리고 제자리에서 돌다가 총을 쏜다. 누가 총에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막내인 밥이 총에 맞는다. 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은 오직 우연일 뿐이다. 어떤 이해관계도 동정심도 개입하지 않았다. 같이 살아온 부인이라고 해서, 어린 아들이라 해서,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하다 해서 그 사실들이 스티브의 방아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직 러시안룰렛처럼 우연만이 작동한 것이다.
존 롤즈 <정의론> 책 표지 (출처: 알라딘)
한 아이 목숨의 무게가 밥의 아버지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논리다. 아이의 목숨이 더 쓸모가 있다는 논리. 새것이 헌것보다 사용가치가 있다는 논리, 그러나 영화는 공리주의를 버리고 스티븐으로 하여금 무지의 베일을 쓰게 한다. 스티븐은 무지의 베일을 기꺼이 씀으로써 모든 목숨이 공평하다는 것, 목숨의 가치가 쓸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막강 파워를 가진 외계인이 지구인 2명을 요구했다면 러시안룰렛이 옳지 않을까. 그 두 명 중에 한 명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셰익스피어라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이 노숙자라고 할지라도 두 사람의 목숨의 무게는 같다는 것, 그것이 무지의 베일을 말하는 롤즈의 정의가 아닐까? 효용성, 쓸모로 자치를 판단하는 공리주의자들은 펄쩍할 일이지만 말이다.
영화 <킬링 디어>와 롤즈의 <정의론>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김보일
2022-09-07
가족 중 한 명을 없앤다면 누구를 없애야 할까.
스티븐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공리주의가 고개를 든다.
남편은 딸과 아들 중 누가 우수한가를 묻는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킬링 디어>의 주인공 스티븐(콜린 파렐)은 안과 의사인 아내 애나(니콜 키드먼)와 두 자녀를 둔 성공한 심장 전문의다. 그는 소년 마틴을 알게 된다. 마틴은 스티븐이 담당한 수술 도중에 죽은 남자의 아들이다. 스티븐과 마틴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낸다. 스티븐은 마틴을 소개할 때, 자신이 죽게 한 환자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딸의 친구라고 소개한다. 유능한 의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스티븐은 마틴의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이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식을 숨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스티븐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마틴이 입은 피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주는 선물, 손목시계가 그 증거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선물을 주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모든 면에서 스티븐은 마틴보다 강자다. 강자가 약자에게 선물을 한다? 오히려 약자가 강자에게 대가성 선물 즉, 뇌물을 주어야 마땅함에도 말이다.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ㅣ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선물에 작동하는 원리는 등가의 원리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무감이 등가의 심리다. 고급 만년필에 대한 반응이 볼펜 한 자루라면 심리적으로 한쪽이 꿀리기 마련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이 책무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스티븐은 마틴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마틴에게는 과분한 선물이다. 소년은 이 시계의 가치만큼을 스티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동등한 관계가 이어진다. 마틴이 스티븐에게 내민 것은 스위스칼이다. 세계적인 다용도 칼이니 손목시계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마틴은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비에는 문외한이다. 손목시계와 스위스칼은 마틴의 관념 속에서만 그 가치가 동일하다.
도량형이 정비된 상태에서 교환의 대상이 같은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등가의 원리. 대칭성의 논리, 이는 익숙한 논리다. 시장을 지배하는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지불한 만큼의 서비스와 재화를 제공한다는 거래의 원칙이자. 네가 나에게 한만큼 나도 너에게 돌려준다는 형벌의 논리.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다. 정신적 피해보상의 원리도 이에 따른다. 피해의 깊이를 양적 무게로 계산하는 하는 것이 법이다.
탈리오의 법칙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 한 대를 맞았으면 두 대를 때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 몰라도 그렇게 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 있다. 무제한의 복수가 가해지는 원시 상태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함무라비 법전으로 대표되는 고대국가의 법질서 체제가 이 탈리오 법칙을 베이스로 한다. 스티븐이 마틴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 마틴도 스티븐을 자기 집에 초대한다. 선물에는 선물로 초대에는 초대로. 그러나 이 대칭의 논리는 오래 가지 못한다.
ㅣ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대가
일단 스티븐과 마틴은 사는 ‘급’이 다르다. 먼저 수입과 주택규모가 다르고, 옷을 입은 입성과 스타일이 다르다. 마틴은 홀어머니와 같이 사니, 4:2로 가족수로도 스티븐에게 마틴이 열세다. 스티븐의 아내는 안과의사이니 학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가계지출에서도 마틴의 홀어머니와 큰 차이가 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마틴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비대칭관계를 대칭관계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돈없이 그것이 가능할까. 궁여지책일까. 마틴은 스티븐에게 자신의 어머니와의 사귐을 은근히 종용한다.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반전이 시작된다. 마틴의 복수가 시작된다. 당신이 나에게 한 만큼을 당신에게 돌려준다는 것. 이 복수의 논리가 영화 후반의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영화 <킬링 디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마침내, 스티븐의 아들 밥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마치 자신이 주술사라도 된 듯 마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설명한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한 명의 죽음을 요구한다.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스티븐이 채워주는 ‘등가교환’을 제안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스티븐도 가족 중 한 명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새 아버지로 채우겠다는 등가의 논리다. 스티븐은 이 제의를 뿌리친다.
ㅣ가족의 위험한 선택과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
가족 중 한 명을 없앤다면 누구를 없애야 할까. 스티븐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공리주의가 고개를 든다. 남편은 딸과 아들 중 누가 우수한가를 묻는다. 현실 적합도로 생사를 결정하겠다는 공리주의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아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려 아버지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머리칼을 자른다. 한 가정에 침투한 비정한 시장논리. 좋게 말해서 경제적 합리주의, 효율지향의 공리주의에 호응하듯 아내는 아이를 또 낳으면 된다고 위안한다.
이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등장하는 방법이 이른바 존 롤즈의 <정의론>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선택의 주체인 선발자(뽑는 자)와 선발될 자(뽑힐 자)에게 선발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차단시키고 여기에서 우연히 선택된 결과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fairness)하다. 선발자의 눈이 피선발자의 외모와 신분과 출신을 알아보는 순간 선발은 불공평한 것이 된다. 스티븐은 복면으로 눈을 가리고 제자리에서 돌다가 총을 쏜다. 누가 총에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막내인 밥이 총에 맞는다. 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은 오직 우연일 뿐이다. 어떤 이해관계도 동정심도 개입하지 않았다. 같이 살아온 부인이라고 해서, 어린 아들이라 해서,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하다 해서 그 사실들이 스티브의 방아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직 러시안룰렛처럼 우연만이 작동한 것이다.
존 롤즈 <정의론> 책 표지 (출처: 알라딘)
한 아이 목숨의 무게가 밥의 아버지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논리다. 아이의 목숨이 더 쓸모가 있다는 논리. 새것이 헌것보다 사용가치가 있다는 논리, 그러나 영화는 공리주의를 버리고 스티븐으로 하여금 무지의 베일을 쓰게 한다. 스티븐은 무지의 베일을 기꺼이 씀으로써 모든 목숨이 공평하다는 것, 목숨의 가치가 쓸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막강 파워를 가진 외계인이 지구인 2명을 요구했다면 러시안룰렛이 옳지 않을까. 그 두 명 중에 한 명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셰익스피어라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이 노숙자라고 할지라도 두 사람의 목숨의 무게는 같다는 것, 그것이 무지의 베일을 말하는 롤즈의 정의가 아닐까? 효용성, 쓸모로 자치를 판단하는 공리주의자들은 펄쩍할 일이지만 말이다.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영화 <킬링 디어>와 롤즈의 <정의론>
- 지난 글: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살아낸다는 것에 대해 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건네는 말
시인
전 배문고 국어교사. 시인. 저서로는 『한국의 교양을 말한다」(과학편), 『과학책 읽는 국어선생님의 사이언스 블로그』, 『14살 인생멘토』,『국어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 읽기』,시집 『살구나무빵집』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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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항상 선명하지 않다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 ...
노명우
#나를 지켜낸다는 것 #부당한 기대에 저항하기 #나의 ...
신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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