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아이 재이가 생일을 맞은 어느 겨울밤이다. 엄마는 생일 상차림을 위해 요리를 한다. 손놀림은 능숙하지만 엄마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복잡하다. 재이가 연루된 사건 때문이다. 물론 재이에게는 혐의점이 없다. 십대 아이들과 폐지 줍는 노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가 노인에게 발차기를 했다. 고꾸라진 노인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사건 장면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에서 재이는 저 멀리 서 있는 구경꾼일 뿐이다. 구경꾼. 신고하지 않고 도망간 게 죄라면 죄이겠으나 재이는 살인과 관련이 없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는 경찰의 질문에 재이는 학원을 빠진 사실을 들켜 엄마에게 혼날까 봐 그랬다고 답했다. 그날 가야 할 학원은 없었으므로 엄마는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안다. 혐의가 없는 구경꾼이 거짓말할 까닭이 없으므로 엄마의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엄마에게 재이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지만 내 아이로 태어난 아이”다. 엄마와 아이로 구성된 이 단출한 식구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다. 동남아 출신인 아빠는 이혼한 뒤 그들의 삶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빠의 흔적은 재이에게 뚜렷이 남았다. 아이는 언제부턴가 선크림에 집착한다. 비가 와도 캄캄한 저녁에 외출을 해도 아이는 선크림을 잊지 않는다. 까만 피부색을 가리기 위해서일 테고 더 까맣게 타는 걸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할 테다. “엄만 한국인이라 몰라.”라는 아이의 말에 엄마가 “너도 한국인이야.”라고 답한대도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재이의 혐오는 재이와 더불어 태어났다. 재이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재이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가 만난 세상은 아이가 기대하던 세상은 아니다. 쌀쌀맞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다. “재이도 재이가 재이라는 이유로 치른 비용”이 있고 그 값을 치르고 얻게 된 건 바로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할 줄 아는 능력이다. 십대 아이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타당해 죽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틀딱”이라고 조롱할 수 있는 능력. 그건 재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유서 깊은 혐오다.
엄마는 이미 안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기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해도 괜찮다고 가르쳐온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에 속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혐오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혐오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 나와 더불어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미 태어났기에.
손홍규/소설가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 『그 남자의 가출』(창비)이 있고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산문집 『다정한 편견』(교유서가),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교유서가)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가리는 손>에는 그 ‘척’이 없다.
그 ‘척’의 자리에 아이러니가 전면에 배치된다.
2차 집단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할 때 편견을 드러내고 그게 편견인지도 모르면서 편견을 반복한다.
재이는 “그러게, 아무래도 그런 애들이 울분이 좀 많겠죠?”라는 2차 집단이 수시로 뱉어내는 ‘편견’의 언어 속에서 세상을 산다.
ㅣ사회학자에게 문학의 언어는 마치 외국어 같다
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분명하고 완고한 관습으로 무장된 두 세계를 갈라놓는 장벽이 있다. 스노우(Snow)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해 갈라진 세계를 ‘두 문화’라고 표현하면서 아쉬워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상호무지와 오해, 반목은 문학의 언어와 사회과학의 언어 사이에도 있다. 동일한 단어여도 문학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와 사회과학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 뉘앙스는 달라진다. 심지어 한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수십만 개의 단어를 쓰임의 빈도에 따라 분류해보면 문학에서 사용되면서도 사회과학에서도 사용되는 단어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이해보다는 분석을 선호한다. 그 언어는 객관적인 사태를 표현을 목표로 삼는다.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과학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화하여 그 결과로 개념 언어를 만들어내고, 개념언어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설명한다. 개념언어로 무장한 사회과학은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정교하게 설명해낼 수 있지만 무엇인가를 얻으면 불가피하게 다른 것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이치처럼 댓가를 치른다. 정교해질수록 추상적일수록 분석적일수록 설명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설명은 정교해졌기에 추상화되었기에 분석적이었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세상을 설명하려 했고 그 세상을 더 정교하게 포착하려 정교한 언어를 발굴했지만, 그렇게 발굴하고 가다듬은 정교한 언어가 정작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근원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사회과학이 세상을 설명해보겠다고 나섰던 애초의 출발 이유가 무색해진다.
사회과학 언어의 한계
ㅣLost in Translation
Iktsuarpok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이누이트 어에 있는 단어라 한다. 한국어로는 “누군가가 혹은 누구라도 오는지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하고 기다리는 행동”이라고 길게 설명해야 하는 마음의 상태를 이누이트어는 ‘익스에르포크(Iktsuarpok)’라는 한 단어로 간결하게 표현한다.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는 혹은 옮기지 못하는 뉘앙스, 억지로 번역한다 해도 의미 손실 없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불가능에 가까운 뉘앙스를 이누이트 어 ‘익스에르포크’는 품고 있다. 사회과학의 언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은 문학에서 또 다른 ‘익스에르포크’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현생인류는 모여 살았기에 살아남았다. 함께 거주했기에 생존했지만, 모여 산다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영향을 개인에게 미치지는 않는다. 때로 모여 산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개인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모여 사는 규모가 커질수록 모여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로는 강해진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 개인이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숫자는 덩달아 늘어나지만, 상호작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심과 이해를 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의 총량은 불변이다.
흘러가는 시간
어떤 사람에겐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어떤 사람에게만 많은 시간이 할애되면 불가피하게 다른 어떤 사람에겐 지독하게도 야박하게 시간이 할애된다. 지독하게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 사람과 야박하게 시간을 할애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상황을 사회과학의 언어로는 1차 집단과 2차 집단이라 표현한다. 1차 집단에 속한 사람끼리는 친밀하다.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재이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가리는 손>의 어머니처럼, 1차 집단에 속한 사람은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 1차 집단이 아닌 타인의 관계로 얽혀 있는 2차 집단끼리는 상호이해가 부족하다. 각자 1차 집단에게 한정된 시간 총량의 대부분을 사용하다 보니, 2차 집단 사이에선 서로의 이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2차 집단은 서로 섣부른 판단과 미숙한 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재이의 2차 집단인 이웃 여자들에게 재이는 맥락이 제거된 채 한 단어로 환원된다. “거 뭐라 그러지? 그런 애도 있던데. …… 맞다, 다문화”
모여 사는 사람들
<가리는 손>은 1차 집단과 2차 집단이 모여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에 문학으로 개입하여 그 사회적 상황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다. 사회과학이 ‘편견’이라는 개념으로 추상화하고 분석적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상황이 소설에서는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연속된 사건의 전개와 전개되는 사건을 해석하는 상이한 시선의 병렬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학문의 언어가 아니라 ‘생활의 언어’로 재현된다.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데 익숙한 게 사회과학의 언어라면 문학의 언어는 그 생략되기 이전의 상황과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옮겨지지 않은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붙잡는다. 사회과학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리하여 문학이라는 외국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뉘앙스가 사라진 삶의 맥락을 문학 속에서 발견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과학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회과학적 언어의 설명의 한계를 느낄 때 문학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된 삶, 사회과학의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 본 삶에는 아이러니가 없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아이러니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의 언어에 아이러니가 남아 있으면 사회과학적 언어의 명료성은 분석능력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은 삶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아이러니를 증발시킨다. 아이러니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아이러니까지 번역하는 언어를 개발하거나, 아이러니에 대해 침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후자보다 절차는 단순하고 용이하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난이도 있는 방법보다 아이러니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마치 삶에는 애당초 아이러니가 없었던 ‘척’ 하거나 아이러니가 사회과학의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정교함 속으로 승화된 ‘척’ 하는 편리한 방법을 선택한다.
<가리는 손>에는 그 ‘척’이 없다. 그 ‘척’의 자리에 아이러니가 전면에 배치된다. 2차 집단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할 때 편견을 드러내고 그게 편견인지도 모르면서 편견을 반복한다. 재이는 “그러게, 아무래도 그런 애들이 울분이 좀 많겠죠?”라는 2차 집단이 수시로 뱉어내는 ‘편견’의 언어 속에서 세상을 산다. 그런 재이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재이가 ‘그런 애들’로 ‘다문화’로 수시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1차집단에 속한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그런 애들’이라는 기호를 ‘내 자식’이라는 기호로 환원하며 지켜낸다. 편견은 그들의 것이다.
생일상엔 1차 집단만 모여 있다. 여기엔 편견이 없어야 한다. ‘우리 아들’의 열 다섯 번째 생일 밥상에서 어머니로 환원되었던 한 사람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어머니로서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의혹의 대상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2차 집단의 편견에 대항하는 1차 집단 또한 편견의 토대인 무조건적인 믿음과 섣부른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순간이다.
편견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졌던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사회과학의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을지, 사회과학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는 외국어로 된 김애란의 <가리는 손>을 읽고 난 후 자문한다.
교수, 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열정을 물려받았고, 버밍엄학파의 문화 연구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민감한 촉수의 필요성을 배웠다.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대학교수보다는 사회학자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캠퍼스에 갇혀 있는 교수보다는 평범한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대리하는 헤르메스이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니은서점이라는 골목길 독립서점에서 마스터 북텐더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책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아도르노와 쇤베르크』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구경꾼의 탄생』 『사회학의 쓸모』 『변증법적 상상력』 등이 있다. 대표작은 언제나 아직 집필하지 않은 다음에 나올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진실은 항상 선명하지 않다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 대하여)'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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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항상 선명하지 않다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 대하여)
- 소설×인문 -
노명우
2022-08-31
단편소설 <가리는 손> 책 표지/김애란/문학동네 (출처: 교보문고)
열다섯 살 아이 재이가 생일을 맞은 어느 겨울밤이다. 엄마는 생일 상차림을 위해 요리를 한다. 손놀림은 능숙하지만 엄마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복잡하다. 재이가 연루된 사건 때문이다. 물론 재이에게는 혐의점이 없다. 십대 아이들과 폐지 줍는 노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가 노인에게 발차기를 했다. 고꾸라진 노인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사건 장면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에서 재이는 저 멀리 서 있는 구경꾼일 뿐이다. 구경꾼. 신고하지 않고 도망간 게 죄라면 죄이겠으나 재이는 살인과 관련이 없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는 경찰의 질문에 재이는 학원을 빠진 사실을 들켜 엄마에게 혼날까 봐 그랬다고 답했다. 그날 가야 할 학원은 없었으므로 엄마는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안다. 혐의가 없는 구경꾼이 거짓말할 까닭이 없으므로 엄마의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엄마에게 재이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지만 내 아이로 태어난 아이”다. 엄마와 아이로 구성된 이 단출한 식구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다. 동남아 출신인 아빠는 이혼한 뒤 그들의 삶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빠의 흔적은 재이에게 뚜렷이 남았다. 아이는 언제부턴가 선크림에 집착한다. 비가 와도 캄캄한 저녁에 외출을 해도 아이는 선크림을 잊지 않는다. 까만 피부색을 가리기 위해서일 테고 더 까맣게 타는 걸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할 테다. “엄만 한국인이라 몰라.”라는 아이의 말에 엄마가 “너도 한국인이야.”라고 답한대도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재이의 혐오는 재이와 더불어 태어났다. 재이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재이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가 만난 세상은 아이가 기대하던 세상은 아니다. 쌀쌀맞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다. “재이도 재이가 재이라는 이유로 치른 비용”이 있고 그 값을 치르고 얻게 된 건 바로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할 줄 아는 능력이다. 십대 아이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타당해 죽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틀딱”이라고 조롱할 수 있는 능력. 그건 재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유서 깊은 혐오다.
엄마는 이미 안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기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해도 괜찮다고 가르쳐온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에 속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혐오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혐오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 나와 더불어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미 태어났기에.
손홍규/소설가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 『그 남자의 가출』(창비)이 있고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산문집 『다정한 편견』(교유서가),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교유서가)이 있다. 노근리 평화문학상, 백신애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가리는 손>에는 그 ‘척’이 없다.
그 ‘척’의 자리에 아이러니가 전면에 배치된다.
2차 집단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할 때 편견을 드러내고 그게 편견인지도 모르면서 편견을 반복한다.
재이는 “그러게, 아무래도 그런 애들이 울분이 좀 많겠죠?”라는 2차 집단이 수시로 뱉어내는 ‘편견’의 언어 속에서 세상을 산다.
ㅣ사회학자에게 문학의 언어는 마치 외국어 같다
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분명하고 완고한 관습으로 무장된 두 세계를 갈라놓는 장벽이 있다. 스노우(Snow)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해 갈라진 세계를 ‘두 문화’라고 표현하면서 아쉬워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상호무지와 오해, 반목은 문학의 언어와 사회과학의 언어 사이에도 있다. 동일한 단어여도 문학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와 사회과학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 뉘앙스는 달라진다. 심지어 한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수십만 개의 단어를 쓰임의 빈도에 따라 분류해보면 문학에서 사용되면서도 사회과학에서도 사용되는 단어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이해보다는 분석을 선호한다. 그 언어는 객관적인 사태를 표현을 목표로 삼는다.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과학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화하여 그 결과로 개념 언어를 만들어내고, 개념언어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설명한다. 개념언어로 무장한 사회과학은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정교하게 설명해낼 수 있지만 무엇인가를 얻으면 불가피하게 다른 것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이치처럼 댓가를 치른다. 정교해질수록 추상적일수록 분석적일수록 설명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설명은 정교해졌기에 추상화되었기에 분석적이었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세상을 설명하려 했고 그 세상을 더 정교하게 포착하려 정교한 언어를 발굴했지만, 그렇게 발굴하고 가다듬은 정교한 언어가 정작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근원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사회과학이 세상을 설명해보겠다고 나섰던 애초의 출발 이유가 무색해진다.
사회과학 언어의 한계
ㅣLost in Translation
Iktsuarpok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 이누이트 어에 있는 단어라 한다. 한국어로는 “누군가가 혹은 누구라도 오는지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하고 기다리는 행동”이라고 길게 설명해야 하는 마음의 상태를 이누이트어는 ‘익스에르포크(Iktsuarpok)’라는 한 단어로 간결하게 표현한다.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는 혹은 옮기지 못하는 뉘앙스, 억지로 번역한다 해도 의미 손실 없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불가능에 가까운 뉘앙스를 이누이트 어 ‘익스에르포크’는 품고 있다. 사회과학의 언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은 문학에서 또 다른 ‘익스에르포크’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현생인류는 모여 살았기에 살아남았다. 함께 거주했기에 생존했지만, 모여 산다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영향을 개인에게 미치지는 않는다. 때로 모여 산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개인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모여 사는 규모가 커질수록 모여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로는 강해진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 개인이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숫자는 덩달아 늘어나지만, 상호작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심과 이해를 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의 총량은 불변이다.
흘러가는 시간
어떤 사람에겐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어떤 사람에게만 많은 시간이 할애되면 불가피하게 다른 어떤 사람에겐 지독하게도 야박하게 시간이 할애된다. 지독하게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 사람과 야박하게 시간을 할애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상황을 사회과학의 언어로는 1차 집단과 2차 집단이라 표현한다. 1차 집단에 속한 사람끼리는 친밀하다.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재이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가리는 손>의 어머니처럼, 1차 집단에 속한 사람은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 1차 집단이 아닌 타인의 관계로 얽혀 있는 2차 집단끼리는 상호이해가 부족하다. 각자 1차 집단에게 한정된 시간 총량의 대부분을 사용하다 보니, 2차 집단 사이에선 서로의 이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2차 집단은 서로 섣부른 판단과 미숙한 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재이의 2차 집단인 이웃 여자들에게 재이는 맥락이 제거된 채 한 단어로 환원된다. “거 뭐라 그러지? 그런 애도 있던데. …… 맞다, 다문화”
모여 사는 사람들
<가리는 손>은 1차 집단과 2차 집단이 모여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에 문학으로 개입하여 그 사회적 상황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다. 사회과학이 ‘편견’이라는 개념으로 추상화하고 분석적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상황이 소설에서는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연속된 사건의 전개와 전개되는 사건을 해석하는 상이한 시선의 병렬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학문의 언어가 아니라 ‘생활의 언어’로 재현된다.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데 익숙한 게 사회과학의 언어라면 문학의 언어는 그 생략되기 이전의 상황과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옮겨지지 않은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붙잡는다. 사회과학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리하여 문학이라는 외국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뉘앙스가 사라진 삶의 맥락을 문학 속에서 발견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과학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회과학적 언어의 설명의 한계를 느낄 때 문학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된 삶, 사회과학의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 본 삶에는 아이러니가 없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아이러니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의 언어에 아이러니가 남아 있으면 사회과학적 언어의 명료성은 분석능력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은 삶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아이러니를 증발시킨다. 아이러니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아이러니까지 번역하는 언어를 개발하거나, 아이러니에 대해 침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후자보다 절차는 단순하고 용이하다. 사회과학의 언어는 난이도 있는 방법보다 아이러니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마치 삶에는 애당초 아이러니가 없었던 ‘척’ 하거나 아이러니가 사회과학의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정교함 속으로 승화된 ‘척’ 하는 편리한 방법을 선택한다.
<가리는 손>에는 그 ‘척’이 없다. 그 ‘척’의 자리에 아이러니가 전면에 배치된다. 2차 집단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할 때 편견을 드러내고 그게 편견인지도 모르면서 편견을 반복한다. 재이는 “그러게, 아무래도 그런 애들이 울분이 좀 많겠죠?”라는 2차 집단이 수시로 뱉어내는 ‘편견’의 언어 속에서 세상을 산다. 그런 재이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재이가 ‘그런 애들’로 ‘다문화’로 수시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1차집단에 속한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그런 애들’이라는 기호를 ‘내 자식’이라는 기호로 환원하며 지켜낸다. 편견은 그들의 것이다.
생일상엔 1차 집단만 모여 있다. 여기엔 편견이 없어야 한다. ‘우리 아들’의 열 다섯 번째 생일 밥상에서 어머니로 환원되었던 한 사람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어머니로서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의혹의 대상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2차 집단의 편견에 대항하는 1차 집단 또한 편견의 토대인 무조건적인 믿음과 섣부른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순간이다.
편견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졌던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사회과학의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을지, 사회과학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는 외국어로 된 김애란의 <가리는 손>을 읽고 난 후 자문한다.
[소설 x 인문] 김애란 <가리는 손>
- 지난 글: [소설 x 인문]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교수, 사회학자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열정을 물려받았고, 버밍엄학파의 문화 연구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민감한 촉수의 필요성을 배웠다.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대학교수보다는 사회학자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캠퍼스에 갇혀 있는 교수보다는 평범한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대리하는 헤르메스이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니은서점이라는 골목길 독립서점에서 마스터 북텐더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책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아도르노와 쇤베르크』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구경꾼의 탄생』 『사회학의 쓸모』 『변증법적 상상력』 등이 있다. 대표작은 언제나 아직 집필하지 않은 다음에 나올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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