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발표된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을 나는 몇 번이나 읽었을까. 일일이 세지 않아서 그 횟수를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십여 년에 걸쳐 수시로 이 소설을 찾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심지어 몇몇 문장들은 독서를 거듭해도 여전히 새롭게 읽히기도 하는데, 그 문장들은 삶과 죽음, 문학에 대한 내 고민과 오랜 여정을 함께 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올빼미의 없음>은 독일에 거주 중인 한국인 소설가 ‘배수아’(작가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은 설정으로 이 소설은 배수아의 소설 중에서도 유독 에세이처럼 느껴진다)가 나이와 국적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었던 ‘외르그’의 죽음 이후 그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는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다른 소설처럼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의 산책과 회상, 또 다른 친구인 베르너와의 대화, 카프카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텍스트, 그리고 그녀 자신의 사유로 채워진다. 처음엔 주인공에게 상실과 불안만을 안겼던 친구의 죽음이 조금씩 개인이 아닌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되어가고, 그 긴 고민과 사유 끝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쓴다. 한 사람의 죽음은 우리의 탓이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자랄 때 그 한 사람은 늙어갔으므로,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음이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류되는 것이라고도, 그리하여 이 세계의 상태는 ‘자연은 조화를 유지하고, 인간은 운다’가 되며 남은 사람으로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 그뿐이라고…….
한 사람의 죽음과 남은 자의 애도는 소설의 보편적인 소재지만 <올빼미의 없음> 안에서 그 소재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이 소설을 읽을수록 나는 생각하곤 했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죽음의 의미를 파고드는 소설 속 문장들이 결국엔 감정적으로 다가와 마음에 파동을 남기는 것이다. 살아 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비밀이자 공통의 종착역인 죽음, 필연적으로 공포를 불러오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유하게 하는 그 문장들이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이라는 소설의 전통적인 장치 없이도 이 소설이 (적어도 내게는) 매번 매혹적으로 읽히는 이유이리라.
조해진 /소설가
2004년 등단 이후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환한 숨>,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중편소설 <완벽한 생애>, 짧은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에세이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김현 시인과 공저) 등을 출간하였다.
있음보다 더 큰 ‘없음’이 존재하는 곳
-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에 대해 -
1. ‘없음’에 대한 경험
‘없다’는 인식은 어떤 ‘존재’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할 때 생깁니다. 이미지라도 떠 올린 적 없는 대상이라면, 인식의 범위를 넘어 완벽히 그 대상에 대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없다는 인식조차 가능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 없음은 있음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속담에 “드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나간 자리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어요. 없음이 있음보다 더 큰 무게로 느껴진다는 말이지요. 신혼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전 재산을 기부하시면서 자식들에게는 집안의 계보를 새긴 똑같은 금 거북이를 유일한 유산으로 남기셨는데 도둑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결혼 예물들을 고스란히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난당하고 보니 전에는 형제들 집에 있는 금 거북이가 나의 집에도 하나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둑이 든 이후에는 잃어버린 금 거북이가 마치 아버지의 분신처럼 특별한 존재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금 거북이가 보고 싶으면 형제들 집에 가서 똑같이 생긴 그것을 볼 수 있지만 형제들 집에 있는 그것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사실 금 거북이의 현금 가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필요에 따라 쉽게 현금화 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자손들에까지 물려줄 그야말로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형제들이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금 거북이를 저에게 보여준다면 저는 그것이 없음을 더 큰 상실로 느끼며 아린 가슴을 쓸어내릴 것입니다. 이처럼 ‘없음’은 있음을 전제로 하며 어떤 대상은 ‘없음’ 후에야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대상은 ‘없음’ 후에야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2.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제목에 대해
얼마 전 배수아라는 예쁜 이름의 작가의 책을 처음 들게 되었습니다. 원고청탁이 아니라면 찾지 않았을 책입니다. 글쓰기 과제가 아니고는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읽기 어려운 소설에 도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편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창비, 2010)에 관한 원고 청탁이니 첫 장부터 성실하게 읽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길을 잃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절망스러웠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나’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전개되는 일이 꿈인지 현실이지, 과거인지 현재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처음 몇 편을 읽어 가다 지쳐, 다른 작품으로 하면 안 될까 싶어 알아보니 소설집의 단편, <올빼미의 없음>만 다루면 된다고 하여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다행히 <올빼미의 없음>은 죽음에 대한 에세이이고, 그 주제만큼은 어렵더라도 도전하기에 충분히 관심 있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배수아 작가의 글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 페이지는 “2008년 12월 2일. 빌레펠트:”로 시작되어 “그러니 당신, 그때까지 안녕히. 진심으로 인사를 보내며”로 두 페이지를 다 채우고 다음 세 번째 페이지에서 바로 “매장이 끝난 후 베르너는 나에게,”로 되어 있었기에 ‘2008년 12월 2일’로 시작하는 편지가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그 편지는 세 번째 페이지에 있는 장례식이 있기 전인지 후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빌레펠트’가 인명인지 지명인지 상호인지도 몰랐습니다. 몇 차례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본 후에야 ‘빌레펠트’가 독일의 지명이고, 첫 페이지의 편지는 제 짐작과 달리 작가 자신이 다른 누구에게 쓴 것이 아니라 매장된 인물, ‘외르그 드레프스’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암호 풀 듯 쓴 에세이 형식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학부 시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었을 때의 멀미가 떠올랐습니다. 왜 헤겔이 떠올랐나 생각해보니, “미네르바의 올빼미(또는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는 말을 헤겔이 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배수아 작가는 2009년 3월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독일의 비평가이자 빌레펠트대학 교수인 외르그 드레프스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 에세이 형식의 소설을 이어갔습니다. 외르그는 작가에게 작가 스스로의 말 그대로 ‘쌍둥이와 같은’ 카프카의 『꿈』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고, 작가가 제목이 멋있어서 번역하고자 한 『불안의 꽃』의 저자인 마르틴 발저를 방문하는데 동행해 주었고, 작가에게 형제와 같은 베르너와의 인연을 맺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외르그는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작가로서, 번역가로서 작업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스승 같은 인물이자 깊은 우정을 이어온 친구입니다. 비록 외르그가 70세 노년이라 해도 그 자신이 노쇠나 죽음과 타협하지 않고 문학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혈기가 왕성하였기 때문에 작가에게 외르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무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의 공격이자 충격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미네르바 여신상과 지혜의 상징 올빼미
그래서 제목, ‘올빼미의 없음’은 직접적으로 “외르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드는 물음은 왜 올빼미인가입니다. 올빼미에 대해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것은 철학을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입니다. 낮 동안 부산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황혼 녘에 가서야 지혜롭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철학이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올빼미(부엉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배수아 작가가 올빼미(부엉이)와 관련된 것을 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올빼미의 없음』에 또 다른 단편이 <올빼미>이고, 심지어 그녀가 이후 번역한 책들에도 올빼미(부엉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녀가 번역한 독일의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한겨레 출판, 2017)중 한 에세이가 <부엉이>이고, 또 다른 번역 작품인 이란의 사데크 헤다야트의 책 제목이 『눈 먼 부엉이』(문학과 지성사, 2013)입니다. 이러한 우연은 차치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올빼미에만 집중하여 보자면, 첫 페이지에 나온 편지에서부터 진짜 올빼미가 등장합니다. 외르그가 죽기 석 달 전 작가에게 자신의 집 옆 두 그루의 커다란 전나무가 베어졌다는 소식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에게 ‘난데없는 불행’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나무에 가려졌던 맞은편의 흉한 모습을 보아야 하고, 여름이면 숲에서 날아온 올빼미가 매일 저녁 머물다 가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르그의 편지에 언급된 올빼미는 그 편지를 보내기 1년 전에 손수 사진으로 찍어 작가에게 보내준 적이 있는 그 올빼미입니다. 외르그에게 그 올빼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난데없는 불행’이었는데, 그 이후 불과 세 달 만에 ‘올빼미 없음’이 작가에게 ‘외르그 없음’으로 전이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3. 죽음의 두 태도, 자연의 과정 VS 무의미의 근원
외르그의 장례식에 작가와 동행한 베르너에게 작가는 외르그의 죽음을 ‘사악한 거짓말’이자 ‘헛소동’으로, ‘그의 최악의 농담’이자 자신을 향한 ‘최대의 독설’로 표현하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안긴 충격을 토로합니다. 베르너로부터 외르그가 어떻게 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는지 정황을 듣고도 작가는 외르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생애 처음으로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작가는 베르너에게 죽음이 어떤 상태인지, 죽음과 함께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베르너는 외르그가 흙이 될 것이라고,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침울하지만 담담하게 말해 줍니다. 이처럼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베르너의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 태도입니다.
“시간은 격렬하게 흐르는 강물이며,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는 것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가 아는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는가 싶다가도, 곧 사나운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말려들어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그 뒤를 이어 다른 존재가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오래 존속하지는 않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역시 강물의 거센 흐름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외르그는 흙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우리의 이 무한한 전체,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갈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영혼이나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르그는 분명 그 전체에 스민 수많은 존재의 하나로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베르너의 이러한 설명을 “그건 전해 내려오는 말들에 불과”하며 “우리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죽음의 신화”일 뿐이라고 부정합니다. 개별자인 우리가 자연이라는 전체 속으로 소멸되는 내용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신화와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외르그를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지금 외르그가 어디에 있는지 라도 알기를 소원합니다. 작가의 이러한 바람은 소중한 사람을 갑자기 잃었을 때 누구나 절망적으로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그러한 바람을 체념하고 신화나 종교, 아름다운 이야기로 위안을 찾으며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며 죽음과 타협하지만 작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어디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면, “죽음이 오직 무서운 폭력, 생명에 가해지는 잔혹하고 일방적인 테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죽음 앞에 선 우리 자신보다 더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는 베르너에게 “한 생명이 가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다음 생명이 오고, 만일 그런 것이 자연이라면” 자신은 “자연 안에서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다.”며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로 생각합니다.
작가가 죽음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하듯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끝까지 날을 세우며 울부짖자, 베르너는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죽은 외르그 또한 마찬가지로 남은 자들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그를 기억하고 그의 존재를 믿고 계속 글을 써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설득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그동안 외르그가 가르쳐 준 가장 막강한 것이 ‘죽음이라는 책’이며, 이제 자신은 무력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과 상실, 허무와 상실의 도가니
그런데 대체 왜 작가는 불과 3년간 교류한 한 사람의 죽음에 그토록 무너져 내리는 걸까요? 작가는 외르그의 상실 이전에 혈육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우 독립적인 삶을 원했던 작가는 의도적으로 지인들과 자신을 분리하며 오직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만을 새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충격이 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유독 외르그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허무와 상실의 도가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올빼미’로 상징한 외르그의 존재가 작가에게 특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의 특별함은 연인이나 스승이라는 일반적인 관계에서의 특별함이 아니라 배수아 작가 자신의 실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의 만남으로 작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게 되었고, 외르그라는 존재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을 자연의 순환으로 설명하는 베르너에게 작가는 “세상의 종말보다 더 압도적인 아픔과 무너짐”, “우주 전체의 구원과 모든 종교의 진리를 전부 합한 것보다 더 커다란 무게와 의미”가 개별자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외르그의 존재가 작가에게 바로 그런 절대적인 무게와 의미라는 것을 그가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가 그의 무게와 의미를 의식하고 알았더라면 언젠가 닥칠, 또는 피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을 미리 염려하고 그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마침내 맞닥뜨린 그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작가는 갑작스러운 외르그의 죽음(없음)을 계기로 비로소 그의 존재 무게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실제 어떤 무게와 의미가 있는지를 그 존재의 부재로 알게 된 경우입니다. 뒤늦게 깨닫게 된 그의 존재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문학과 함께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나 동시에, 대륙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모든 것에,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어떤 순간에 한꺼번에 가졌다.” 이 정도의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없음’ 이후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토록 애절하게 알고 싶은 것입니다.
4. 현실과 꿈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
누구도 죽은 외르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작가 스스로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외르그가 죽기 6개월 전, 그와 베를린 슈프레 강변을 저녁에 산책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일은 ‘그 어느 순간’ 물리적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평소와 다름없이 공통의 관심사인 문학에 대해 열렬히 이야기 하는 중에 그가 산책로를 쳐다보며 멈춰 서서 ‘저 길을 한번 잘 살펴보라. 혹시 내 어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오는 모습이 보일지도 모르니. 저 숲은 전쟁이 나기 전 우리가 베를린에 살았던 1938년 당시, 어머니가 유모차에 나를 싣고 종종 산책에 나섰던 그 숲이니까.’라고 했습니다. 냉철한 그가 그날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예외적이었지만 작가는 꿈에 사로잡히듯 “난 오래전 당신 어머니도 그리고 어린 아기인 당신의 모습도 너무나 보고 싶어요.”라고 답했는데 그 말에 그가 순간 놀란 표정으로 엉뚱한 상상을 한 작가를 나무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 이후에 베르너에게 그때의 일을 전하자, 베르너는 인간이 어린 시절의 자신, 특히 갓난아이일 때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친다면, 그것은 그가 곧 죽게 된다는 전설을 알려주었습니다.
외르그는 꿈이나 환상과 거리가 먼 평론가입니다. 오히려 작가가 작품에 자신의 꿈을 담는 것에 대해 작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노출이라며 비판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그 어느 순간’ 산책길에 현실과 다른 세계의 환상, 갓난아이일 때의 자신을 본 꿈을 꾼 것이라면(또는 환상을 본 것이라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주어진 물리적 세계가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작가에게 현실에서의 ‘외르그 없음’에 대한 하나의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쌍둥이라고 했던 작가는 카프카가 “잠”과 “깨어남”이 혼재하는 순간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체험하며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자신의 바깥으로 “꺼내 올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한 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자신의 꿈이기도 하다는 카프카의 『꿈』의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꿈. 한 사람이 가고 있다. 모든 사물이 물속처럼 정지한 채 온몸으로 느리게 흐느끼는 강변. 한 사람이 가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카프카의 꿈이자 작가의 꿈속의 ‘그 사람’은 그들이 만나기 열망하는 무한한 무게의 의미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 '없음' 의 존재 공간
종교는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약속합니다. 철학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요청하거나 논리적으로 한계를 정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물리적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느낍니다. 종교는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신화로 만들고 철학은 현실의 세계 너머를 사유하고 분석하고 인식하려 하지만 문학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단지 느낄 뿐입니다. 이것이 철학자인 제가 배수아 작가의 작품에서 길을 잃었던 이유입니다. 작가는 물리적인 세계에 없는 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를 느낄 수 있기에 작가는 계속 글을 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학은 철학보다 더 넓은 ‘없음’의 존재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철학 교육, 성인을 위한 인문학 교육에 힘쓰고 있다. 당연한 것에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불편한 것에 불편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저술한 책으로 『나나의 논리대왕 도전기』, 『소설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2018 세종도서 선정),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등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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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 소설 x 인문 -
박연숙
2022-07-29
<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창비, 2010 (출처: 알라딘)
존재의 정언: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
2009년에 발표된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을 나는 몇 번이나 읽었을까. 일일이 세지 않아서 그 횟수를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십여 년에 걸쳐 수시로 이 소설을 찾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심지어 몇몇 문장들은 독서를 거듭해도 여전히 새롭게 읽히기도 하는데, 그 문장들은 삶과 죽음, 문학에 대한 내 고민과 오랜 여정을 함께 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올빼미의 없음>은 독일에 거주 중인 한국인 소설가 ‘배수아’(작가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은 설정으로 이 소설은 배수아의 소설 중에서도 유독 에세이처럼 느껴진다)가 나이와 국적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었던 ‘외르그’의 죽음 이후 그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는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다른 소설처럼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의 산책과 회상, 또 다른 친구인 베르너와의 대화, 카프카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텍스트, 그리고 그녀 자신의 사유로 채워진다. 처음엔 주인공에게 상실과 불안만을 안겼던 친구의 죽음이 조금씩 개인이 아닌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되어가고, 그 긴 고민과 사유 끝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쓴다. 한 사람의 죽음은 우리의 탓이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자랄 때 그 한 사람은 늙어갔으므로,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음이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류되는 것이라고도, 그리하여 이 세계의 상태는 ‘자연은 조화를 유지하고, 인간은 운다’가 되며 남은 사람으로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 그뿐이라고…….
한 사람의 죽음과 남은 자의 애도는 소설의 보편적인 소재지만 <올빼미의 없음> 안에서 그 소재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이 소설을 읽을수록 나는 생각하곤 했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죽음의 의미를 파고드는 소설 속 문장들이 결국엔 감정적으로 다가와 마음에 파동을 남기는 것이다. 살아 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비밀이자 공통의 종착역인 죽음, 필연적으로 공포를 불러오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유하게 하는 그 문장들이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이라는 소설의 전통적인 장치 없이도 이 소설이 (적어도 내게는) 매번 매혹적으로 읽히는 이유이리라.
조해진 /소설가
2004년 등단 이후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환한 숨>,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중편소설 <완벽한 생애>, 짧은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에세이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김현 시인과 공저) 등을 출간하였다.
있음보다 더 큰 ‘없음’이 존재하는 곳
-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에 대해 -
1. ‘없음’에 대한 경험
‘없다’는 인식은 어떤 ‘존재’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할 때 생깁니다. 이미지라도 떠 올린 적 없는 대상이라면, 인식의 범위를 넘어 완벽히 그 대상에 대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없다는 인식조차 가능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 없음은 있음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속담에 “드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나간 자리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어요. 없음이 있음보다 더 큰 무게로 느껴진다는 말이지요. 신혼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전 재산을 기부하시면서 자식들에게는 집안의 계보를 새긴 똑같은 금 거북이를 유일한 유산으로 남기셨는데 도둑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결혼 예물들을 고스란히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난당하고 보니 전에는 형제들 집에 있는 금 거북이가 나의 집에도 하나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둑이 든 이후에는 잃어버린 금 거북이가 마치 아버지의 분신처럼 특별한 존재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금 거북이가 보고 싶으면 형제들 집에 가서 똑같이 생긴 그것을 볼 수 있지만 형제들 집에 있는 그것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사실 금 거북이의 현금 가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필요에 따라 쉽게 현금화 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자손들에까지 물려줄 그야말로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형제들이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금 거북이를 저에게 보여준다면 저는 그것이 없음을 더 큰 상실로 느끼며 아린 가슴을 쓸어내릴 것입니다. 이처럼 ‘없음’은 있음을 전제로 하며 어떤 대상은 ‘없음’ 후에야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대상은 ‘없음’ 후에야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2.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제목에 대해
얼마 전 배수아라는 예쁜 이름의 작가의 책을 처음 들게 되었습니다. 원고청탁이 아니라면 찾지 않았을 책입니다. 글쓰기 과제가 아니고는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읽기 어려운 소설에 도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편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창비, 2010)에 관한 원고 청탁이니 첫 장부터 성실하게 읽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길을 잃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절망스러웠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나’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전개되는 일이 꿈인지 현실이지, 과거인지 현재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처음 몇 편을 읽어 가다 지쳐, 다른 작품으로 하면 안 될까 싶어 알아보니 소설집의 단편, <올빼미의 없음>만 다루면 된다고 하여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다행히 <올빼미의 없음>은 죽음에 대한 에세이이고, 그 주제만큼은 어렵더라도 도전하기에 충분히 관심 있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배수아 작가의 글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 페이지는 “2008년 12월 2일. 빌레펠트:”로 시작되어 “그러니 당신, 그때까지 안녕히. 진심으로 인사를 보내며”로 두 페이지를 다 채우고 다음 세 번째 페이지에서 바로 “매장이 끝난 후 베르너는 나에게,”로 되어 있었기에 ‘2008년 12월 2일’로 시작하는 편지가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그 편지는 세 번째 페이지에 있는 장례식이 있기 전인지 후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빌레펠트’가 인명인지 지명인지 상호인지도 몰랐습니다. 몇 차례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본 후에야 ‘빌레펠트’가 독일의 지명이고, 첫 페이지의 편지는 제 짐작과 달리 작가 자신이 다른 누구에게 쓴 것이 아니라 매장된 인물, ‘외르그 드레프스’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암호 풀 듯 쓴 에세이 형식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학부 시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었을 때의 멀미가 떠올랐습니다. 왜 헤겔이 떠올랐나 생각해보니, “미네르바의 올빼미(또는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는 말을 헤겔이 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배수아 작가는 2009년 3월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독일의 비평가이자 빌레펠트대학 교수인 외르그 드레프스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 에세이 형식의 소설을 이어갔습니다. 외르그는 작가에게 작가 스스로의 말 그대로 ‘쌍둥이와 같은’ 카프카의 『꿈』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고, 작가가 제목이 멋있어서 번역하고자 한 『불안의 꽃』의 저자인 마르틴 발저를 방문하는데 동행해 주었고, 작가에게 형제와 같은 베르너와의 인연을 맺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외르그는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작가로서, 번역가로서 작업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스승 같은 인물이자 깊은 우정을 이어온 친구입니다. 비록 외르그가 70세 노년이라 해도 그 자신이 노쇠나 죽음과 타협하지 않고 문학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혈기가 왕성하였기 때문에 작가에게 외르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무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의 공격이자 충격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미네르바 여신상과 지혜의 상징 올빼미
그래서 제목, ‘올빼미의 없음’은 직접적으로 “외르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드는 물음은 왜 올빼미인가입니다. 올빼미에 대해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것은 철학을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입니다. 낮 동안 부산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황혼 녘에 가서야 지혜롭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철학이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올빼미(부엉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배수아 작가가 올빼미(부엉이)와 관련된 것을 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올빼미의 없음』에 또 다른 단편이 <올빼미>이고, 심지어 그녀가 이후 번역한 책들에도 올빼미(부엉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녀가 번역한 독일의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한겨레 출판, 2017)중 한 에세이가 <부엉이>이고, 또 다른 번역 작품인 이란의 사데크 헤다야트의 책 제목이 『눈 먼 부엉이』(문학과 지성사, 2013)입니다. 이러한 우연은 차치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올빼미에만 집중하여 보자면, 첫 페이지에 나온 편지에서부터 진짜 올빼미가 등장합니다. 외르그가 죽기 석 달 전 작가에게 자신의 집 옆 두 그루의 커다란 전나무가 베어졌다는 소식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에게 ‘난데없는 불행’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나무에 가려졌던 맞은편의 흉한 모습을 보아야 하고, 여름이면 숲에서 날아온 올빼미가 매일 저녁 머물다 가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르그의 편지에 언급된 올빼미는 그 편지를 보내기 1년 전에 손수 사진으로 찍어 작가에게 보내준 적이 있는 그 올빼미입니다. 외르그에게 그 올빼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난데없는 불행’이었는데, 그 이후 불과 세 달 만에 ‘올빼미 없음’이 작가에게 ‘외르그 없음’으로 전이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3. 죽음의 두 태도, 자연의 과정 VS 무의미의 근원
외르그의 장례식에 작가와 동행한 베르너에게 작가는 외르그의 죽음을 ‘사악한 거짓말’이자 ‘헛소동’으로, ‘그의 최악의 농담’이자 자신을 향한 ‘최대의 독설’로 표현하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안긴 충격을 토로합니다. 베르너로부터 외르그가 어떻게 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는지 정황을 듣고도 작가는 외르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생애 처음으로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작가는 베르너에게 죽음이 어떤 상태인지, 죽음과 함께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베르너는 외르그가 흙이 될 것이라고,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침울하지만 담담하게 말해 줍니다. 이처럼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베르너의 태도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 태도입니다.
“시간은 격렬하게 흐르는 강물이며,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는 것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며 자랐다. 우리가 아는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는가 싶다가도, 곧 사나운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말려들어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그 뒤를 이어 다른 존재가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오래 존속하지는 않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역시 강물의 거센 흐름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외르그는 흙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우리의 이 무한한 전체,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갈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영혼이나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르그는 분명 그 전체에 스민 수많은 존재의 하나로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베르너의 이러한 설명을 “그건 전해 내려오는 말들에 불과”하며 “우리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죽음의 신화”일 뿐이라고 부정합니다. 개별자인 우리가 자연이라는 전체 속으로 소멸되는 내용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신화와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외르그를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지금 외르그가 어디에 있는지 라도 알기를 소원합니다. 작가의 이러한 바람은 소중한 사람을 갑자기 잃었을 때 누구나 절망적으로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그러한 바람을 체념하고 신화나 종교, 아름다운 이야기로 위안을 찾으며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며 죽음과 타협하지만 작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어디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면, “죽음이 오직 무서운 폭력, 생명에 가해지는 잔혹하고 일방적인 테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죽음 앞에 선 우리 자신보다 더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는 베르너에게 “한 생명이 가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다음 생명이 오고, 만일 그런 것이 자연이라면” 자신은 “자연 안에서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다.”며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로 생각합니다.
작가가 죽음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하듯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끝까지 날을 세우며 울부짖자, 베르너는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죽은 외르그 또한 마찬가지로 남은 자들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그를 기억하고 그의 존재를 믿고 계속 글을 써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설득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그동안 외르그가 가르쳐 준 가장 막강한 것이 ‘죽음이라는 책’이며, 이제 자신은 무력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과 상실, 허무와 상실의 도가니
그런데 대체 왜 작가는 불과 3년간 교류한 한 사람의 죽음에 그토록 무너져 내리는 걸까요? 작가는 외르그의 상실 이전에 혈육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우 독립적인 삶을 원했던 작가는 의도적으로 지인들과 자신을 분리하며 오직 ‘걸어라, 울어라, 그리고 써라.’만을 새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충격이 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유독 외르그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허무와 상실의 도가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올빼미’로 상징한 외르그의 존재가 작가에게 특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의 특별함은 연인이나 스승이라는 일반적인 관계에서의 특별함이 아니라 배수아 작가 자신의 실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의 만남으로 작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게 되었고, 외르그라는 존재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을 자연의 순환으로 설명하는 베르너에게 작가는 “세상의 종말보다 더 압도적인 아픔과 무너짐”, “우주 전체의 구원과 모든 종교의 진리를 전부 합한 것보다 더 커다란 무게와 의미”가 개별자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외르그의 존재가 작가에게 바로 그런 절대적인 무게와 의미라는 것을 그가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가 그의 무게와 의미를 의식하고 알았더라면 언젠가 닥칠, 또는 피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을 미리 염려하고 그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마침내 맞닥뜨린 그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작가는 갑작스러운 외르그의 죽음(없음)을 계기로 비로소 그의 존재 무게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실제 어떤 무게와 의미가 있는지를 그 존재의 부재로 알게 된 경우입니다. 뒤늦게 깨닫게 된 그의 존재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문학과 함께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나 동시에, 대륙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모든 것에,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어떤 순간에 한꺼번에 가졌다.” 이 정도의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없음’ 이후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토록 애절하게 알고 싶은 것입니다.
4. 현실과 꿈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
누구도 죽은 외르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작가 스스로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외르그가 죽기 6개월 전, 그와 베를린 슈프레 강변을 저녁에 산책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일은 ‘그 어느 순간’ 물리적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평소와 다름없이 공통의 관심사인 문학에 대해 열렬히 이야기 하는 중에 그가 산책로를 쳐다보며 멈춰 서서 ‘저 길을 한번 잘 살펴보라. 혹시 내 어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오는 모습이 보일지도 모르니. 저 숲은 전쟁이 나기 전 우리가 베를린에 살았던 1938년 당시, 어머니가 유모차에 나를 싣고 종종 산책에 나섰던 그 숲이니까.’라고 했습니다. 냉철한 그가 그날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예외적이었지만 작가는 꿈에 사로잡히듯 “난 오래전 당신 어머니도 그리고 어린 아기인 당신의 모습도 너무나 보고 싶어요.”라고 답했는데 그 말에 그가 순간 놀란 표정으로 엉뚱한 상상을 한 작가를 나무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 이후에 베르너에게 그때의 일을 전하자, 베르너는 인간이 어린 시절의 자신, 특히 갓난아이일 때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친다면, 그것은 그가 곧 죽게 된다는 전설을 알려주었습니다.
외르그는 꿈이나 환상과 거리가 먼 평론가입니다. 오히려 작가가 작품에 자신의 꿈을 담는 것에 대해 작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노출이라며 비판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그 어느 순간’ 산책길에 현실과 다른 세계의 환상, 갓난아이일 때의 자신을 본 꿈을 꾼 것이라면(또는 환상을 본 것이라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주어진 물리적 세계가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작가에게 현실에서의 ‘외르그 없음’에 대한 하나의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쌍둥이라고 했던 작가는 카프카가 “잠”과 “깨어남”이 혼재하는 순간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체험하며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자신의 바깥으로 “꺼내 올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한 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자신의 꿈이기도 하다는 카프카의 『꿈』의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꿈. 한 사람이 가고 있다. 모든 사물이 물속처럼 정지한 채 온몸으로 느리게 흐느끼는 강변. 한 사람이 가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카프카의 꿈이자 작가의 꿈속의 ‘그 사람’은 그들이 만나기 열망하는 무한한 무게의 의미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 '없음' 의 존재 공간
종교는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약속합니다. 철학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요청하거나 논리적으로 한계를 정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물리적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느낍니다. 종교는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신화로 만들고 철학은 현실의 세계 너머를 사유하고 분석하고 인식하려 하지만 문학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단지 느낄 뿐입니다. 이것이 철학자인 제가 배수아 작가의 작품에서 길을 잃었던 이유입니다. 작가는 물리적인 세계에 없는 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를 느낄 수 있기에 작가는 계속 글을 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학은 철학보다 더 넓은 ‘없음’의 존재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 x 인문]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철학 교육, 성인을 위한 인문학 교육에 힘쓰고 있다. 당연한 것에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불편한 것에 불편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저술한 책으로 『나나의 논리대왕 도전기』, 『소설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2018 세종도서 선정),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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