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계인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종차에 의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메를로-퐁티의 '고유한 몸' 이론은 크리스토퍼와 비커스,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의 존재론적 지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퐁티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입장은......
영화 <디스트릭트 9>은 2009년 개봉된 영화로, <터미네이터> 시리즈 (1984~2019년)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보인다. <터미네이터>가 인공지능의 반란을 소재로 한 휴머니즘 영화라면, <디스트릭트 9>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불시착한 환대 받지 못하는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비인간 존재들의 서사를 통해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모든 존재들의 ‘장소성’을 발견하게 된다.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
근대 휴머니즘 문명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 사상에 바탕을 둔다. 인간만이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인간 아닌 모든 비인간 존재들은 타자이거나 객체였다. 이들은 인간을 위한 대상, 수단 혹은 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존재와 비인간 존재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그어지고, 인간의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데카르트에게서 찾고 있다. 경계 밖의 존재들이 경계 안으로 들어오려 할 때 트러블은 발생하며, 통제를 위한 폭력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행된다.
영화 <디스트릭트 9>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 우주선은 고장이 난 듯 3개월간 상공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지구인들은 외계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던 외계인을 강제로 땅으로 진입시켰다. 최초로 외계인과 접촉하게 되는 순간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구인은 그들의 모습에 실망스러운 탄식을 했다. 그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으며, 건강 상태도 나빴을 뿐 아니라, 벌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시선을 의식한 정부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우주선 바로 아래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그들을 격리했다. 그리고 이 구역을 <디스트릭트 9>이라 했다. <디스트릭트 9>에는 철조망이 처지고 군대가 배치되었으며 언론은 그곳을 무법지대라 표현했다. 사람들은 외계인을 ‘보호’하기 위해 드는 돈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했다.
‘보호’라 부르지만, 실제로 격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화를 보면서 섬뜩해짐을 느낀다.
외계인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라는 뜻인 ‘프런’이라 불렸다. 외계인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으나, 지구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불려도 마땅하다고 말한다. 딱 봐도 약해 보이는 존재를 향한 지구인의 태도!. 이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근대의 이분법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지구인은 지저분하고 해로운 존재인 프런에게 ‘폭력적이기도 하다’는 낙인을 찍고,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임을 합리화한다.
영화 <디스트릭트 9>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결국 정부는 외계인 관리국 MNU를 움직여 <디스트릭트 9>을 강제 철거하고, 외계인들을 요하네스버스로부터 200km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려 한다. 위험으로부터 완전한 격리이자 지구인들의 평화를 위한 특단의 조처다. 그들을 우주로 추방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겪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희생에서 ‘자신’은 포함되면 안 된다. 이 영화가 외계인의 우주선이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것의 차별 (출처: 네이버 영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아공화국 샤프빌에서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집회 중 민간인 69명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샤프빌학살 사건’이라 한다. 남아공은 인종별로 거주지를 나누고 정해진 지역에서 벗어나면 통행증을 소지하도록 했다. 이 집회는 이러한 통행법에 반대하는 집회였다. 영화에서, 외계인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 있다는 뉴스가 나온 때가 1982년 6월 1일이다. 그리고 외계인을 <디스트릭트 9>에 살게 한 후에 강제로 퇴거 결정을 한때가 이때로부터 20년 후이다. 대략 20년간의 간격이 발생한다.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샤프빌 학살, 1960 (출처: 위키백과)
영화에서 외계인을 내몰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남아공에서 차별받던 흑인과 유색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취급받던 그 방식대로 외계인을 차별하며 내몬다. 그리고 이주를 담당했던 비커스가 감염으로 인해 외계인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지구인들이 그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차별이 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다.
차별의 근원에는 이해(利害)관계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으면, 반대로 해를 입는 이가 있다. 철저한 경쟁 관계이다. 이분법 아래에서 공생은 불가능해진다. 지구인들은 외계인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그들을 해로운 존재로 취급했던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인 몸과 벌레인 몸은 그저 다른 몸일 뿐
<디스트릭트 9>에서의 외계인은 인간보다 열등한 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해버린 ‘잠자’처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생각은 인간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 즉 그들은 벌레여야 했다. 지구인들은 ‘사실 자체’를 보려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비인간 존재를 향한 혐오
그러나 외계인 크리스토퍼는 생각하는, 지능적인 벌레였다. 크리스토퍼는 모선으로 가기 위한 비행선을 움직이기 위한 유동체가 필요했고, 폐컴퓨터를 통해 유동체의 수집에 성공한다. 하지만 하필 그때 강제 철거를 담당한 책임자 비커스가 나타나 유동체를 뺏기고 만다. 비커스에게 프런의 존재들은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동체가 얼굴에 뿌려지면서 감염되어버린 비커스는 더 이상 경계 안의 사람이 아닌 경계 밖의 사람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크리스토퍼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비커스는 자신의 몸을 외계 신무기로 사용하려는 정부로부터 도망치며, 모선에 가게 된다면 자신의 감염병을 고칠 수 있다는 크리스토퍼를 돕기 시작한다. 필요에 의한 동맹관계였지만, 둘은 동지애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비커스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남고 크리스토퍼가 아들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메를로-퐁티와 에일리언 현상학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계인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종차에 의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메를로-퐁티의 ‘고유한 몸’이론은 크리스토퍼와 비커스,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의 존재론적 지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퐁티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입장은 에일리언 현상학을 가능하게 한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타자 즉 객체 지향적 철학이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타자 즉 객체의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학문이다. 배제되어왔던 존재들의 귀환이다.
<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 퐁티(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출처: 알라딘)
<디스트릭트 9>은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 그리고 비커스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경계를 허문다. 거기에는 거주지를 잃은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반(半)인간인 비커스는 인간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남겨진 프런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비커스는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비커스는 인간의 외형을 잃고 외계인의 모습이 되었고, 인간들에게 잊혔다. 그는 살아있음에도 죽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쓰레기더미에서 꽃을 만들고 있다. 이 꽃은 아내가 사는 집 현관에 놓일 것이다.
비커스는 인간일까, 비인간일까? 아니 인간은 왜 인간일까? 이제 이런 물음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왜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학술연구교수
경상국립대학교에서 메를로-퐁티의 자유개념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경상국립대, 경남과기대, 한남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는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와 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 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새한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 『신체와 자유』,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취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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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윤리를 생각하다-디스트릭트 9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심귀연
2022-07-12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계인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종차에 의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메를로-퐁티의 '고유한 몸' 이론은 크리스토퍼와 비커스,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의 존재론적 지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퐁티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입장은......
영화 <디스트릭트 9>은 2009년 개봉된 영화로, <터미네이터> 시리즈 (1984~2019년)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보인다. <터미네이터>가 인공지능의 반란을 소재로 한 휴머니즘 영화라면, <디스트릭트 9>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불시착한 환대 받지 못하는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비인간 존재들의 서사를 통해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모든 존재들의 ‘장소성’을 발견하게 된다.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
근대 휴머니즘 문명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 사상에 바탕을 둔다. 인간만이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인간 아닌 모든 비인간 존재들은 타자이거나 객체였다. 이들은 인간을 위한 대상, 수단 혹은 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존재와 비인간 존재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그어지고, 인간의 경계밖에 놓인 존재들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데카르트에게서 찾고 있다. 경계 밖의 존재들이 경계 안으로 들어오려 할 때 트러블은 발생하며, 통제를 위한 폭력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행된다.
영화 <디스트릭트 9>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 우주선은 고장이 난 듯 3개월간 상공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지구인들은 외계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던 외계인을 강제로 땅으로 진입시켰다. 최초로 외계인과 접촉하게 되는 순간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구인은 그들의 모습에 실망스러운 탄식을 했다. 그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으며, 건강 상태도 나빴을 뿐 아니라, 벌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시선을 의식한 정부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우주선 바로 아래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그들을 격리했다. 그리고 이 구역을 <디스트릭트 9>이라 했다. <디스트릭트 9>에는 철조망이 처지고 군대가 배치되었으며 언론은 그곳을 무법지대라 표현했다. 사람들은 외계인을 ‘보호’하기 위해 드는 돈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했다.
‘보호’라 부르지만, 실제로 격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화를 보면서 섬뜩해짐을 느낀다.
외계인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라는 뜻인 ‘프런’이라 불렸다. 외계인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으나, 지구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불려도 마땅하다고 말한다. 딱 봐도 약해 보이는 존재를 향한 지구인의 태도!. 이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근대의 이분법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지구인은 지저분하고 해로운 존재인 프런에게 ‘폭력적이기도 하다’는 낙인을 찍고,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임을 합리화한다.
영화 <디스트릭트 9>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결국 정부는 외계인 관리국 MNU를 움직여 <디스트릭트 9>을 강제 철거하고, 외계인들을 요하네스버스로부터 200km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려 한다. 위험으로부터 완전한 격리이자 지구인들의 평화를 위한 특단의 조처다. 그들을 우주로 추방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겪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희생에서 ‘자신’은 포함되면 안 된다. 이 영화가 외계인의 우주선이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것의 차별 (출처: 네이버 영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아공화국 샤프빌에서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집회 중 민간인 69명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샤프빌학살 사건’이라 한다. 남아공은 인종별로 거주지를 나누고 정해진 지역에서 벗어나면 통행증을 소지하도록 했다. 이 집회는 이러한 통행법에 반대하는 집회였다. 영화에서, 외계인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 있다는 뉴스가 나온 때가 1982년 6월 1일이다. 그리고 외계인을 <디스트릭트 9>에 살게 한 후에 강제로 퇴거 결정을 한때가 이때로부터 20년 후이다. 대략 20년간의 간격이 발생한다.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샤프빌 학살, 1960 (출처: 위키백과)
영화에서 외계인을 내몰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남아공에서 차별받던 흑인과 유색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취급받던 그 방식대로 외계인을 차별하며 내몬다. 그리고 이주를 담당했던 비커스가 감염으로 인해 외계인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지구인들이 그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차별이 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다.
차별의 근원에는 이해(利害)관계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으면, 반대로 해를 입는 이가 있다. 철저한 경쟁 관계이다. 이분법 아래에서 공생은 불가능해진다. 지구인들은 외계인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그들을 해로운 존재로 취급했던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인 몸과 벌레인 몸은 그저 다른 몸일 뿐
<디스트릭트 9>에서의 외계인은 인간보다 열등한 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해버린 ‘잠자’처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생각은 인간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 즉 그들은 벌레여야 했다. 지구인들은 ‘사실 자체’를 보려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비인간 존재를 향한 혐오
그러나 외계인 크리스토퍼는 생각하는, 지능적인 벌레였다. 크리스토퍼는 모선으로 가기 위한 비행선을 움직이기 위한 유동체가 필요했고, 폐컴퓨터를 통해 유동체의 수집에 성공한다. 하지만 하필 그때 강제 철거를 담당한 책임자 비커스가 나타나 유동체를 뺏기고 만다. 비커스에게 프런의 존재들은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동체가 얼굴에 뿌려지면서 감염되어버린 비커스는 더 이상 경계 안의 사람이 아닌 경계 밖의 사람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크리스토퍼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비커스는 자신의 몸을 외계 신무기로 사용하려는 정부로부터 도망치며, 모선에 가게 된다면 자신의 감염병을 고칠 수 있다는 크리스토퍼를 돕기 시작한다. 필요에 의한 동맹관계였지만, 둘은 동지애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비커스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남고 크리스토퍼가 아들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메를로-퐁티와 에일리언 현상학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계인은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종차에 의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메를로-퐁티의 ‘고유한 몸’이론은 크리스토퍼와 비커스, 달리 말하자면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의 존재론적 지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퐁티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입장은 에일리언 현상학을 가능하게 한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타자 즉 객체 지향적 철학이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타자 즉 객체의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학문이다. 배제되어왔던 존재들의 귀환이다.
<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 퐁티(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출처: 알라딘)
<디스트릭트 9>은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 그리고 비커스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경계를 허문다. 거기에는 거주지를 잃은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반(半)인간인 비커스는 인간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남겨진 프런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비커스는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비커스는 인간의 외형을 잃고 외계인의 모습이 되었고, 인간들에게 잊혔다. 그는 살아있음에도 죽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쓰레기더미에서 꽃을 만들고 있다. 이 꽃은 아내가 사는 집 현관에 놓일 것이다.
비커스는 인간일까, 비인간일까? 아니 인간은 왜 인간일까? 이제 이런 물음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왜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공생의 윤리를 생각하다-디스트릭트 9
- 지난 글: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파친코(Pachinko)〉, 쌀 한 톨에 깃든 우주적 기억과 사랑
학술연구교수
경상국립대학교에서 메를로-퐁티의 자유개념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경상국립대, 경남과기대, 한남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는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와 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 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새한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 『신체와 자유』,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취향』 등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공생의 윤리를 생각하다-디스트릭트 9'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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