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경험한 존재는 그것을 말할 언어를 찾기 어렵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애도의 언어는 완성되지 못한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증인은 이미 차마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ㅣ시인은 노래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자
애도를 둘러싼 매력적인 신화적인 인물은 안티고네와 오르페우스이다. 안티고네는 공식적인 애도의 금지와 싸운 인물이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죽은 아들인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애도와 장례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 오빠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서 애도가 금지되었고, 그의 시신 위에 흙과 술을 뿌리는 안티고네의 행위는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었다. 안티고네가 따른 것은 국가의 법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윤리적 요청이다. 안티고네에게 오빠를 장례 지내는 일은 애도를 금지하는 세계와의 목숨을 건 싸움을 의미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금지된 애도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애도 행위가 애도를 독점하는 체제와 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닫힌 국가 체제가 어떤 애도를 금지하는 것은 그 애도의 파괴력 때문이다. 이것이 애도가 갖는 정치적·윤리적 측면이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체 앞에 선 안티고네(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시인의 원형적인 모습으로 상징되는 오르페우스의 애도는 좀 더 문학적이다. 음유 시인이며 리라(고대 그리스의 현악기로 하프와 비슷하게 생겼음)의 명수인 오르페우스는 노래와 리라 연주로 초목과 짐승들까지도 감동시켰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지낸다.
문제는 그 이후 오르페우스의 행적이다. 실의에 잠겨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만을 부를 뿐 어떤 여인과도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으며,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트라키아 여인들의 축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트라키아의 여인들은 오르페우스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겨 분노했으며, 그의 몸을 찢어 죽이고 강물에 던졌다. 강물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시신은 떠내려갔지만 그 머리는 여전히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이 참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죽음의 경험이 노래를 만들고, 그 애도의 노래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를 시인의 원형이라고 한다면 노래(시와 문학)는 어떤 대상의 상실과 부재를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부재를 노래하는 자, 부재에 매혹된 자이며, 노래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무한히 죽는 자’이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미지 출처: BOOK DB)
ㅣ내가 아닌 이곳에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은 애도에 관한 영화다. 어린 시절 행방불명된 할머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유미코는 동네에서 함께 자란 ‘이쿠오’와의 결혼 후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며 소소한 행복 속에 살아간다. 너무나 평범하던 어느 날, 남편의 자살은 평화롭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애도는 완결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상처를 안고 재혼하게 된 그녀는 문득문득 파고드는 죽은 이의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재혼 후 살게 된 어촌 마을에 어느 날 태풍이 불어온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기억이 다시 살아난 그녀는 홀린 것처럼 바닷가의 장례 행렬을 따라간다. 영화의 마지막 10분 바닷가의 장례 행렬을 넋이 나간 채 따라가는 유미코를 롱샷, 롱테이크로 잡은 미장센이 이 영화의 절정이다. 이 장면에서 유미코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은 돌아간 사람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를 끝낼 수 없다.
영화 〈환상의 빛〉 포스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중학생 외손자를 데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할머니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사는 미자는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처음으로 시를 쓸 기회를 갖게 된다.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로 써보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해서 고유명사의 이름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꽃의 이름을 잊어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물들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 큰 윤리적 딜레마는 자신이 키우는 외손자가 동네 여중생 성폭행과 자살 사건의 집단 가해자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미자는 합의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돌봐주는 장애인 노인에게 성적 봉사를 대가로 돈을 얻어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문화센터의 마지막 날 수강생 중에 시를 제출하고 사라진 사람은 미자뿐이다.
영화 〈시〉 의 스틸컷(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문학적인 질문은 ‘미자는 정말 사라졌을까’가 아니라, ‘미자는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었는가’ 일 것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사라진 미자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화면은 그녀가 머물던 동네의 일상적 장면들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서 시를 낭송하는 사람은 갑자기 돌아간 여중생의 목소리로 바뀌고 그 학생이 머물렀던 일상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미자는 돌아간 여학생의 자리에서 여학생의 목소리로 시를 쓴 것이다. 여학생에 대한 미자의 애도는 여학생의 목소리로 시를 쓰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 시를 쓰는 순간이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 김행숙 시, 『에코의 초상』 중 「에코의 초상」 일부, 문학과지성사, 2014
에코(메아리)는 스스로 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소리를 환대하고 되돌려준다. 그런데 ‘초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초상이 눈에 보이는 존재를 그리는 이미지라면, 육체와 목소리를 갖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에코의 초상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에코의 소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의 목소리에 화답하고 되돌려준다. 에코는 하나의 입술이 아니라, “입술들의 물결”이다.
이 시에서 보이지 않는 에코를 보이는 존재들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같고”라는 직유를 통해서이다. “어떤 입술”, “어떤 가슴”, “어떤 눈동자”, “어떤 손짓”, “어떤 얼굴” 같은 이미지들은 메아리의 공간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더 풍부한 시간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마지막 이미지 “어떤 얼굴”이 “너의 마지막 얼굴”과 만날 때 ‘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출몰한다. ‘너’는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존재, 에코의 초상이다. ‘너’는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말을 되돌려주는 존재이다. 에코는 죽음 너머에서 ‘나’에게 공명하는 ‘너’의 목소리이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 진은영 시, 『훔쳐가는 노래』 중 「있다」 일부, 창비, 2012
이 시는 ‘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있다’라는 종결어미를 가진 1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14번의 술어 ‘있다’와 13개의 각기 다른 주어들로 구축되어 있다. 그 각기 다른 주어들은 다만 독립적으로 ‘있으며’,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의 특이성은 단 하나의 시적 자아의 동일성이 아니라, 익명적인 주체들이 만드는 이미지들의 병치이다. ‘~처럼’이라는 조사가 등장하는 문장들에서 반복적으로 직유가 나타나는데, 이 직유들은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시킨다. 이미지들은 하나의 주체에 속하지 않고 떨어져 나와서 다른 존재들의 가능성과 만난다. 이미지들은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라는 강렬한 직유가 환기시키는, “집 둘레의 노래”로서의 타자들의 시간을 불러들인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있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긍정,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애도로서의 시 쓰기가 여기 ‘있다.’
ㅣ남은 '나'는 사라진 '너'를 통해서 말할 수 있고
애도의 글을 쓰는 사람은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경험한 존재는 그것을 말할 언어를 찾기 어렵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애도의 언어는 완성되지 못한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증인은 이미 차마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윤리적 무력감과 글쓰기의 무기력 속에서 침묵이 찾아오지만, 그 침묵 안에서 다른 애도의 언어가 시작된다. 이때 남은 자로서의 ‘나’라는 존재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고,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다른 목소리를 찾게 된다. 남은 자는 사라진 사람의 자리에서 남은 자이다. 남아 있는 ‘나’는 사라진 ‘너’와 구별되지 않고 남아 있는 ‘나’는 사라진 '너'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남은 자는 죽은 자도 아니며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자도 아니다. 남은 자는 '그들 사이'에서 남은 자들이다. 남은 자가 글 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사라진 '누구'의 목소리 안에서이다.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문학은 왜 애도하는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문학은 왜 애도하는가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이광호
2022-04-26
애도의 글을 쓰는 사람은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경험한 존재는 그것을 말할 언어를 찾기 어렵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애도의 언어는 완성되지 못한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증인은 이미 차마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ㅣ시인은 노래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자
애도를 둘러싼 매력적인 신화적인 인물은 안티고네와 오르페우스이다. 안티고네는 공식적인 애도의 금지와 싸운 인물이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죽은 아들인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애도와 장례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 오빠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서 애도가 금지되었고, 그의 시신 위에 흙과 술을 뿌리는 안티고네의 행위는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었다. 안티고네가 따른 것은 국가의 법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윤리적 요청이다. 안티고네에게 오빠를 장례 지내는 일은 애도를 금지하는 세계와의 목숨을 건 싸움을 의미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금지된 애도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애도 행위가 애도를 독점하는 체제와 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닫힌 국가 체제가 어떤 애도를 금지하는 것은 그 애도의 파괴력 때문이다. 이것이 애도가 갖는 정치적·윤리적 측면이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체 앞에 선 안티고네(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시인의 원형적인 모습으로 상징되는 오르페우스의 애도는 좀 더 문학적이다. 음유 시인이며 리라(고대 그리스의 현악기로 하프와 비슷하게 생겼음)의 명수인 오르페우스는 노래와 리라 연주로 초목과 짐승들까지도 감동시켰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지낸다.
문제는 그 이후 오르페우스의 행적이다. 실의에 잠겨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만을 부를 뿐 어떤 여인과도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으며,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트라키아 여인들의 축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트라키아의 여인들은 오르페우스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겨 분노했으며, 그의 몸을 찢어 죽이고 강물에 던졌다. 강물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시신은 떠내려갔지만 그 머리는 여전히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이 참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죽음의 경험이 노래를 만들고, 그 애도의 노래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를 시인의 원형이라고 한다면 노래(시와 문학)는 어떤 대상의 상실과 부재를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부재를 노래하는 자, 부재에 매혹된 자이며, 노래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무한히 죽는 자’이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미지 출처: BOOK DB)
ㅣ내가 아닌 이곳에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은 애도에 관한 영화다. 어린 시절 행방불명된 할머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유미코는 동네에서 함께 자란 ‘이쿠오’와의 결혼 후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며 소소한 행복 속에 살아간다. 너무나 평범하던 어느 날, 남편의 자살은 평화롭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애도는 완결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상처를 안고 재혼하게 된 그녀는 문득문득 파고드는 죽은 이의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재혼 후 살게 된 어촌 마을에 어느 날 태풍이 불어온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기억이 다시 살아난 그녀는 홀린 것처럼 바닷가의 장례 행렬을 따라간다. 영화의 마지막 10분 바닷가의 장례 행렬을 넋이 나간 채 따라가는 유미코를 롱샷, 롱테이크로 잡은 미장센이 이 영화의 절정이다. 이 장면에서 유미코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은 돌아간 사람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를 끝낼 수 없다.
영화 〈환상의 빛〉 포스터(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중학생 외손자를 데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할머니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사는 미자는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처음으로 시를 쓸 기회를 갖게 된다.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로 써보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해서 고유명사의 이름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꽃의 이름을 잊어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물들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 큰 윤리적 딜레마는 자신이 키우는 외손자가 동네 여중생 성폭행과 자살 사건의 집단 가해자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미자는 합의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돌봐주는 장애인 노인에게 성적 봉사를 대가로 돈을 얻어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문화센터의 마지막 날 수강생 중에 시를 제출하고 사라진 사람은 미자뿐이다.
영화 〈시〉 의 스틸컷(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문학적인 질문은 ‘미자는 정말 사라졌을까’가 아니라, ‘미자는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었는가’ 일 것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사라진 미자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화면은 그녀가 머물던 동네의 일상적 장면들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서 시를 낭송하는 사람은 갑자기 돌아간 여중생의 목소리로 바뀌고 그 학생이 머물렀던 일상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미자는 돌아간 여학생의 자리에서 여학생의 목소리로 시를 쓴 것이다. 여학생에 대한 미자의 애도는 여학생의 목소리로 시를 쓰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 시를 쓰는 순간이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 김행숙 시, 『에코의 초상』 중 「에코의 초상」 일부, 문학과지성사, 2014
에코(메아리)는 스스로 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소리를 환대하고 되돌려준다. 그런데 ‘초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초상이 눈에 보이는 존재를 그리는 이미지라면, 육체와 목소리를 갖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에코의 초상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에코의 소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의 목소리에 화답하고 되돌려준다. 에코는 하나의 입술이 아니라, “입술들의 물결”이다.
이 시에서 보이지 않는 에코를 보이는 존재들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같고”라는 직유를 통해서이다. “어떤 입술”, “어떤 가슴”, “어떤 눈동자”, “어떤 손짓”, “어떤 얼굴” 같은 이미지들은 메아리의 공간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더 풍부한 시간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마지막 이미지 “어떤 얼굴”이 “너의 마지막 얼굴”과 만날 때 ‘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출몰한다. ‘너’는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존재, 에코의 초상이다. ‘너’는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말을 되돌려주는 존재이다. 에코는 죽음 너머에서 ‘나’에게 공명하는 ‘너’의 목소리이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 진은영 시, 『훔쳐가는 노래』 중 「있다」 일부, 창비, 2012
이 시는 ‘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있다’라는 종결어미를 가진 1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14번의 술어 ‘있다’와 13개의 각기 다른 주어들로 구축되어 있다. 그 각기 다른 주어들은 다만 독립적으로 ‘있으며’,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의 특이성은 단 하나의 시적 자아의 동일성이 아니라, 익명적인 주체들이 만드는 이미지들의 병치이다. ‘~처럼’이라는 조사가 등장하는 문장들에서 반복적으로 직유가 나타나는데, 이 직유들은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시킨다. 이미지들은 하나의 주체에 속하지 않고 떨어져 나와서 다른 존재들의 가능성과 만난다. 이미지들은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라는 강렬한 직유가 환기시키는, “집 둘레의 노래”로서의 타자들의 시간을 불러들인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있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긍정,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애도로서의 시 쓰기가 여기 ‘있다.’
ㅣ남은 '나'는 사라진 '너'를 통해서 말할 수 있고
애도의 글을 쓰는 사람은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경험한 존재는 그것을 말할 언어를 찾기 어렵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애도의 언어는 완성되지 못한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증인은 이미 차마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윤리적 무력감과 글쓰기의 무기력 속에서 침묵이 찾아오지만, 그 침묵 안에서 다른 애도의 언어가 시작된다. 이때 남은 자로서의 ‘나’라는 존재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고,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다른 목소리를 찾게 된다. 남은 자는 사라진 사람의 자리에서 남은 자이다. 남아 있는 ‘나’는 사라진 ‘너’와 구별되지 않고 남아 있는 ‘나’는 사라진 '너'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남은 자는 죽은 자도 아니며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자도 아니다. 남은 자는 '그들 사이'에서 남은 자들이다. 남은 자가 글 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사라진 '누구'의 목소리 안에서이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 문학은 왜 애도하는가
- 지난 글: [문학이 아닌 모든 것] 사랑의 불가능성과 낯선 사랑의 논리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문학은 왜 애도하는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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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의 불가능성과 낯선 사랑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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