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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리에도 앉고 천천히 옆으로도 뒤로도 가보기!!

-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

류동춘

2022-01-17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은?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빈부격차, 혐오와 차별 등 우리 사회에는 갈등거리들이 지뢰밭 같이 널려있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높이면서도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을 방안은 무엇일까요? 파시즘처럼 ‘전체’를 강요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를 가꾸어갈 방법은 무엇일지요?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인문 석학들이 공동체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혜안을 열어 드립니다.


채점을 하면서 한 학생의 답안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웃었고 곧이어 감탄한 적이 있다. 이 학생은 중국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해서 중국어 구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중국어로 쓰는 문제에서, 할아버지란 단어는 생각이 났지만, 한자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중국어로 쓴 것이다. 모범 답안과는 차이가 있지만, ‘궁즉통(窮則通)’의 묘미를 살린 것을 인정하여…….



매일 같은 길, 같은 정류장, 같은 버스에서 놓친 것들



반복되는 일상, 버스정류장

반복되는 일상, 버스 정류장



나는 매번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되도록 같은 자리에 앉아 출근을 한다. 출근 때와는 다른 경로이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도 늘 똑같이 같은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같은 역에서 내려 버스를 옮겨 타고 돌아온다. 이렇게 같은 경로를 반복하며 출근과 퇴근을 하는 이유는 선택의 고민을 거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생활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순하게 생각하려는 내 무의식의 반작용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봄 어느 날 이런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가 여전히 수그러들 줄 모르던 시기라서 그런지 버스는 전보다 더 한가해졌지만 내가 늘 앉던 자리를 누군가 선점해서 나는 부득불 다른 자리에 앉아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에 그때는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이 이미 다 지고, 벚나무 가지에 파란 잎들이 커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이날에 가졌던 느낌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가 평소에 타던 버스 노선에서 자리만 다른 곳에 앉았는데 전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내 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는 늘 버스 앞쪽의 오른편 좌석에 앉아서 출근하는데, 이날 왼쪽 뒤편에 앉아서 보는 바깥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오른편 앞좌석을 차지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때는 무엇을 했었는지 바깥 풍경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날 이후로 내가 늘 1순위로 생각했던 앞자리를 선점한 사람에 대하여 품었던 약간의 원망(?)을 깨끗이 접어 버렸고, 심지어 이 자리가 비어 있어도 때로는 일부러 다른 자리에 앉기도 한다. 이렇게 앉다 보니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시설물들에 대해서도 저렇게 있는 것이 무슨 이유일까? 등을 생각하느라 버스를 타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게 되었다. 꼼꼼히 살펴보고 열린 생각으로 바라보니 대부분의 시설물들은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아니, 이유가 없었더라도 내가 스스로 찾아 만들어 준 것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 없이 편하게 살아가려던 나의 귀차니즘을 버리니, 낯설음, 새로움, 호기심 등으로 평소에 무심하게 보내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소소한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찾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유전자를 깨운 것일까?



같은 사안 다른 결론, 낯설게 보기, 역지사지의 힘



사실 익숙한 것이 우리에게 편한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은 또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욕망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은 변화나 발전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의 편리성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변화를 추구했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밥을 먹는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이 변화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늘 우리를 괴롭히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런 고민을 피하고 편하게 살고자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질리지 않게 매일 먹어야 하는 밥처럼 자극적 맛은 없는 주식을 빼고는 말이다. 번거롭다 하더라도 우리는 늘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하며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다른 자리에 앉으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란 성어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배려의 어구인데, 생명체는 늘 자신의 보존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 한 가지 원칙을 정해 놓는다면, 매번 다양한 상황을 요모조모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아도 되므로 아주 편할 것이다. 물론 정해 놓은 원칙을 견지하는 데에도 큰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것저것 따져 보고 판단하는 수고로움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자리에서 풍경을 보는 것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행위와 유사하다. 남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낯선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풍경이 보이듯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같은 사안에 대하여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사고의 유연성이 생긴다고나 할까? 전에 읽은 책에서 인간만이 혼자서 출산을 감당할 수 없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유일한 생물종이라고 하였다. 물론 예전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출산했을 수도 있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사회 속에서 남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남의 생각을 알고자 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답이 하나뿐일 수는 없다



답안지

답안지



세상에 유일한 답안은 없다. 그러므로 내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여러 가지 다른 답안을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에 중국어 수강 자격 면제 인정시험 답안지를 채점했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 시험은 이전에 중국어를 학습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에게 실력 측정을 통해 초급 수준의 중국어 수업의 학점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이다. 실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학생들이 처음부터 중국어를 배우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이다. 그런데 이 시험도 시험인지라 긴장하게 되면 평소 알던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채점을 하면서 한 학생의 답안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웃었고 곧이어 감탄한 적이 있다. 이 학생은 중국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해 중국어 구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중국어로 쓰는 문제에서, 할아버지란 단어는 생각이 났지만, 한자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중국어로 쓴 것이다. 모범 답안과는 차이가 있지만, ‘궁즉통(窮則通)’의 묘미를 살린 것을 인정하여 부분 점수를 주었다. 시험에는 반드시 모범 답안이 있다는 점과 정확성과 간결성을 추구하는 언어의 일반적 경향에 비춰볼 때 이상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개념을 나타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표현이고, 꼭 하나의 정답을 정해야 하는가를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시험의 답안처럼 살아가는 데에 꼭 하나의 모범적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안을 여러 각도로 비틀어 보면 다양한 해결 방안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가장 빠르거나 효율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방법일지라도.


관련하여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다가 이것이 없으면 아예 운전하기가 두려운 상황까지 이를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제시하는 것처럼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만이 아니다.(이 표현은 중의적이다. 내비게이션이 가장 빠른 하나의 길만 제시한다는 의미와 여러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기계의 도움을 받다가 점점 기계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 스스로 자신의 능력, 창의성을 제한한 결과이다. 나는 늘 사람들이 모두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른다면 그 길로 차량이 몰려서 결국 시간을 더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다. 설사 실시간으로 교통량을 반영하며 계속해서 경로를 수정하여 빨라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운전자는 훨씬 더 피곤해질 것이다.



목표 달성 최우선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와 안 맞아



천천히 걷기

천천히 걷기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목적지를 향한 단 하나의 길로만 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나가면서 옆으로도, 뒤로도 가며 얻어 가는 즐거움도 적지 않다. 빨리 가는 것보다 즐기며 가자. 풍경 좋은 곳에서 목적지만 생각하고 운전한다면 주위의 경치를 감상할 수 없고, 그야말로 운전만 한 기억만 남지 않던가? 세상의 모든 일에서 목적의 달성만을 최우선 가치로 둔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또한 목적만을 좇는다면 설계되지 않은, 예정되지 않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삶이 지속된다면 창의성의 결여라는 결과가 돌아올 것이다. 현재의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강조하는 창의성과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자리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자리에 앉아 보자. 하나의 길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길을 걸어가 보자. 새로운 세상과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다른 자리에도 앉고 천천히 옆으로도 뒤로도 가보기!!

- 지난 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관계들의 총합’으로서의 나 그리고 대학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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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춘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
국립대만대(National Taiwan University)에서 갑골문을 공부하였다. 전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장과 한중인문학포럼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 공동회장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 중국문화학과에 재직하며 고문자와 중국 고대 언어와 문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중국어학개론』, 『The Story of Nine Asian Alphabets』, 『한자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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