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핵심이 단지 부도덕한 귀족을 비판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이 소설에서는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윤리적인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귀족은 자기 삶 과정 전체가 허위였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영혼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문학은 도덕관념 아닌 개인 윤리 다루는 예술
도덕
윤리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와 쓰임새를 말하기는 어렵다. 서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의 뉘앙스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도덕을 공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었고 그 덕목대로만 살아가면 되었다. 도덕적인 것을 실현하는 격식과 예의범절이 중요했다. 근대 이후에 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 삶의 태도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하며 자기 윤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현대에도 도덕과 예의범절에 대한 딜레마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제사상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 말이다. 정해진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전통사회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허례의식이며 ‘마음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간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이 자기 윤리의 행위 기준을 만드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제사도 지내지 말고 마음속으로 그분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나아가면 뭔가 불안할 것이다. 보편적인 규범을 따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자기 윤리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현대에서는 더 작은 윤리, ‘OO의 윤리’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랑의 윤리’, ‘이별의 윤리’, ‘직업의 윤리’ 같은 개념처럼 ‘문학의 윤리’, ‘글쓰기의 윤리’를 말할 수 있다. 문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큰 의미의 도덕관념이 아니라 최소한의 개인 윤리의 문제이다.
영화 〈해피 엔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정지우 감독의 영화 〈해피 엔드〉에는 불편한 장면이 등장한다. 학원을 운영하여 육아를 함께하는 여자 주인공은, 무능한 실직자인 남편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연인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아기를 돌보고 있던 시간에 연인이 집 근처로 와서 나오라고 독촉한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재우고 나갔다 오려 하지만, 아이는 잘 생각을 하지 않고 보챈다.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자 여자는 아이의 우유에 수면제 성분을 섞는다. 이 문제적인 장면에 대해 ‘모성을 저버린 여자’라고 도덕적인 비난을 할 수도 있다. 여자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얼굴을 하고 아기에게 우유를 먹인다. 영화는 그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관객이 이 여자에게 분노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분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욕망과 불안과 죄의식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고 그녀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녀의 ‘약함’에 응답한 것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욕망과 현실과 자기 윤리 사이의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여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남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데, 아주 짧은 순간 남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 눈빛에 마음이 응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규범 준수 아닌 타자에 대한 응답이 문학의 역할
문학에서 윤리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 그녀의 고통과 혼란에 응답하는 것에 가깝다.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와 다른 자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가의 문제이다. 타자의 고통을 대면하고 내가 확신해왔던 어떤 가치가 흔들릴 때 윤리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라는 철학자는 윤리라는 것은 고통받는 얼굴로 출현하는 타자들을 대면하고 응답하는 문제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이런 윤리를 ‘타자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윤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태도와 감수성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환대’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이방인과 타자를 아무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환대할 수 있음과 그 불가능성 사이에서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이 윤리적인 갈등의 시간이다.
문학적인 것 속에서 윤리는 보편적인 규범을 따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것에 대해서 응답하는 문제이다. 문학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사건, 나 아닌 것들이 나에게 들어오는 사건이다.
톨스토이(좌)의 소설 『부활』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귀족 네플류도프는 젊은 시절 자신이 유혹하고 임신시키고 버린 하녀 카튜샤가 죄인으로 법정에 선 자리에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카튜샤는 그 사건 때문에 해고되어 매춘부가 되고, 끝내는 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녀를 법정에서 다시 만난 귀족은 놀라움과 함께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녀를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 소설의 핵심은 단지 부도덕한 귀족을 비판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윤리적인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귀족은 자기 삶의 과정 전체가 허위였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영혼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뛰어난 심리 묘사로 표현된 인간의 약함과 허위에 대한 정밀한 통찰력이 있고, 죄인과 심판관이 거꾸로 되어 있는 법정의 상황을 통해 그려내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포옹, 한없이 가까이 가지만 ‘사이’는 남는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 김행숙, 시 「포옹」 전문 (출처: 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민음사)
극도로 함축적인 이 시는 ‘포옹’이라는 사건을 다룬다. 포옹은 ‘나’와 ‘너’가 신체적으로 만나는 물리적인 경험인데, 이 경험 안에서 ‘나’는 ‘나’임을 주장하지 않고 어떤 도덕관념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너’와 한없이 가까워지려 하지만 ‘사이’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포옹의 윤리’이다.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가까이'라는 부사어의 반복이다. '가까이'는 '가까이 간다' , '가까이 다가간다' 혹은 '가까이 한다'의 생략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사를 동사처럼 사용하는 것의 효과는 흥미롭다.. '가까이~', '될 때까지~', '입술처럼~', '아가리처럼~'라는 언어들 속에서 용언 혹은 동사는 생략되거나 불안한 위치에 머문다. 이 시에서 유일한 동사는 "교차하였습니다."이다. 이 동사는 앞뒤에 있는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라는 부사구와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이라는 부사구 모두의 수식을 받는다. 하나의 동사가 두 개의 부사구에 위태롭게 포위되어있다. 매력적인 것은 부사어와 부사구들의 움직임 자체이다. 동작의 주체와 결과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포옹'인 것은 포옹의 주체와 결과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 누가 포옹을 하고 있으며, 그 포옹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알 길이 없다.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라는 부사구가 암시하는 것처럼, 진행 중인 포옹의 움직임과 방향을 감각하게 할 뿐이다. "볼 수 없는"이라는 이 시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그 포옹의 동작이 가닿는 세계의 윤곽을 보여준다. 지금 진행 중인 포옹은 "볼 수 없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왜 '볼 수 없는 세계'인가? 포옹은 주체와 대상의 물리적 거리가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사라질 때, 대상에 대한 주체의 우월적 위치는 없어진다. 포옹의 세계에서 '나'는 '너'에 대한 시선의 거리를 확보하기 어렵다. 포옹이라는 사건은 '나'와 '너'의 완전한 일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지만, '사이'는 남는다. 다만 '나'와 '너'의 몸은 그 '사이'에서 '교차'할 뿐이다. 사랑을 둘러싼 몸의 감각도 이 한없이 다가가는 '교차'의 느낌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교차하는 사이'인 이상, 둘 사이의 포옹은 완성되지 않는다. 검정이 아니라, "검정에 매우 가까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처럼. 포옹이라는 사건은 몸의 교차가 벌어지는 시간이다. 시간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곧 벌어질 시간"이다.
‘나’로부터 멀어질 때… 문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순간
시를 쓰는 주체는 자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방의 언어를 말하는 존재, 자신의 몸을 통해서 무언가가 말해지는 존재이다. 시 쓰는 주체는 그런 맥락에서 ‘나‘의 권력을 내려놓는다. 시를 쓰게 하는 이 익명의 존재는 일종의 이방인이고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이다. 타자의 언어로 말하는 글쓰기는 윤리적인 것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언어는 세상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어떤 목소리를 발설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부재, ‘내’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타자로부터 시작되고 타자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방인의 언어에 대한 ‘응답’이며, ‘받아쓰기’이다. 그 응답과 받아쓰기는 궁극적으로는 ‘나’의 침묵, ‘나’의 부재를 향해서 나간다. 확신에 찬 ‘나’의 도덕적 전언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부터 멀어지는 사태.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을 향해 나에게 떨어져 나가는 것. 문학적 장소에서 윤리적인 순간은 이렇게 온다.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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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학은 어떻게 윤리적인가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이광호
2021-11-17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핵심이 단지 부도덕한 귀족을 비판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이 소설에서는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윤리적인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귀족은 자기 삶 과정 전체가 허위였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영혼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문학은 도덕관념 아닌 개인 윤리 다루는 예술
도덕
윤리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와 쓰임새를 말하기는 어렵다. 서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의 뉘앙스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도덕을 공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었고 그 덕목대로만 살아가면 되었다. 도덕적인 것을 실현하는 격식과 예의범절이 중요했다. 근대 이후에 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 삶의 태도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하며 자기 윤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현대에도 도덕과 예의범절에 대한 딜레마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제사상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 말이다. 정해진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전통사회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허례의식이며 ‘마음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간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이 자기 윤리의 행위 기준을 만드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제사도 지내지 말고 마음속으로 그분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나아가면 뭔가 불안할 것이다. 보편적인 규범을 따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자기 윤리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현대에서는 더 작은 윤리, ‘OO의 윤리’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랑의 윤리’, ‘이별의 윤리’, ‘직업의 윤리’ 같은 개념처럼 ‘문학의 윤리’, ‘글쓰기의 윤리’를 말할 수 있다. 문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큰 의미의 도덕관념이 아니라 최소한의 개인 윤리의 문제이다.
영화 〈해피 엔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정지우 감독의 영화 〈해피 엔드〉에는 불편한 장면이 등장한다. 학원을 운영하여 육아를 함께하는 여자 주인공은, 무능한 실직자인 남편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연인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아기를 돌보고 있던 시간에 연인이 집 근처로 와서 나오라고 독촉한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재우고 나갔다 오려 하지만, 아이는 잘 생각을 하지 않고 보챈다.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자 여자는 아이의 우유에 수면제 성분을 섞는다. 이 문제적인 장면에 대해 ‘모성을 저버린 여자’라고 도덕적인 비난을 할 수도 있다. 여자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얼굴을 하고 아기에게 우유를 먹인다. 영화는 그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관객이 이 여자에게 분노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분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욕망과 불안과 죄의식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고 그녀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녀의 ‘약함’에 응답한 것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욕망과 현실과 자기 윤리 사이의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여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남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데, 아주 짧은 순간 남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 눈빛에 마음이 응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규범 준수 아닌 타자에 대한 응답이 문학의 역할
문학에서 윤리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 그녀의 고통과 혼란에 응답하는 것에 가깝다.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와 다른 자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가의 문제이다. 타자의 고통을 대면하고 내가 확신해왔던 어떤 가치가 흔들릴 때 윤리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라는 철학자는 윤리라는 것은 고통받는 얼굴로 출현하는 타자들을 대면하고 응답하는 문제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이런 윤리를 ‘타자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윤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태도와 감수성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환대’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이방인과 타자를 아무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환대할 수 있음과 그 불가능성 사이에서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이 윤리적인 갈등의 시간이다.
문학적인 것 속에서 윤리는 보편적인 규범을 따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것에 대해서 응답하는 문제이다. 문학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사건, 나 아닌 것들이 나에게 들어오는 사건이다.
톨스토이(좌)의 소설 『부활』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교보문고)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귀족 네플류도프는 젊은 시절 자신이 유혹하고 임신시키고 버린 하녀 카튜샤가 죄인으로 법정에 선 자리에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카튜샤는 그 사건 때문에 해고되어 매춘부가 되고, 끝내는 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녀를 법정에서 다시 만난 귀족은 놀라움과 함께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녀를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 소설의 핵심은 단지 부도덕한 귀족을 비판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윤리적인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귀족은 자기 삶의 과정 전체가 허위였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영혼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뛰어난 심리 묘사로 표현된 인간의 약함과 허위에 대한 정밀한 통찰력이 있고, 죄인과 심판관이 거꾸로 되어 있는 법정의 상황을 통해 그려내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포옹, 한없이 가까이 가지만 ‘사이’는 남는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 김행숙, 시 「포옹」 전문 (출처: 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민음사)
극도로 함축적인 이 시는 ‘포옹’이라는 사건을 다룬다. 포옹은 ‘나’와 ‘너’가 신체적으로 만나는 물리적인 경험인데, 이 경험 안에서 ‘나’는 ‘나’임을 주장하지 않고 어떤 도덕관념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너’와 한없이 가까워지려 하지만 ‘사이’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포옹의 윤리’이다.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가까이'라는 부사어의 반복이다. '가까이'는 '가까이 간다' , '가까이 다가간다' 혹은 '가까이 한다'의 생략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사를 동사처럼 사용하는 것의 효과는 흥미롭다.. '가까이~', '될 때까지~', '입술처럼~', '아가리처럼~'라는 언어들 속에서 용언 혹은 동사는 생략되거나 불안한 위치에 머문다. 이 시에서 유일한 동사는 "교차하였습니다."이다. 이 동사는 앞뒤에 있는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라는 부사구와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이라는 부사구 모두의 수식을 받는다. 하나의 동사가 두 개의 부사구에 위태롭게 포위되어있다. 매력적인 것은 부사어와 부사구들의 움직임 자체이다. 동작의 주체와 결과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포옹'인 것은 포옹의 주체와 결과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 누가 포옹을 하고 있으며, 그 포옹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알 길이 없다.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라는 부사구가 암시하는 것처럼, 진행 중인 포옹의 움직임과 방향을 감각하게 할 뿐이다. "볼 수 없는"이라는 이 시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그 포옹의 동작이 가닿는 세계의 윤곽을 보여준다. 지금 진행 중인 포옹은 "볼 수 없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왜 '볼 수 없는 세계'인가? 포옹은 주체와 대상의 물리적 거리가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사라질 때, 대상에 대한 주체의 우월적 위치는 없어진다. 포옹의 세계에서 '나'는 '너'에 대한 시선의 거리를 확보하기 어렵다. 포옹이라는 사건은 '나'와 '너'의 완전한 일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지만, '사이'는 남는다. 다만 '나'와 '너'의 몸은 그 '사이'에서 '교차'할 뿐이다. 사랑을 둘러싼 몸의 감각도 이 한없이 다가가는 '교차'의 느낌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교차하는 사이'인 이상, 둘 사이의 포옹은 완성되지 않는다. 검정이 아니라, "검정에 매우 가까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처럼. 포옹이라는 사건은 몸의 교차가 벌어지는 시간이다. 시간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곧 벌어질 시간"이다.
‘나’로부터 멀어질 때… 문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순간
시를 쓰는 주체는 자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방의 언어를 말하는 존재, 자신의 몸을 통해서 무언가가 말해지는 존재이다. 시 쓰는 주체는 그런 맥락에서 ‘나‘의 권력을 내려놓는다. 시를 쓰게 하는 이 익명의 존재는 일종의 이방인이고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이다. 타자의 언어로 말하는 글쓰기는 윤리적인 것이다. 타자에 응답하는 언어는 세상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어떤 목소리를 발설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부재, ‘내’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타자로부터 시작되고 타자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방인의 언어에 대한 ‘응답’이며, ‘받아쓰기’이다. 그 응답과 받아쓰기는 궁극적으로는 ‘나’의 침묵, ‘나’의 부재를 향해서 나간다. 확신에 찬 ‘나’의 도덕적 전언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부터 멀어지는 사태.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을 향해 나에게 떨어져 나가는 것. 문학적 장소에서 윤리적인 순간은 이렇게 온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 6. 문학은 어떻게 윤리적인가
- 지난 글: [문학이 아닌 모든 것] 5. ‘주제’가 말하지 못하는 것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6. 문학은 어떻게 윤리적인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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