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대주의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역사에서 ‘실증은 의무’, 신채호 학설도 맹목적 답습은 곤란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은 단재 신채호(1880년~1936년)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효시로 꼽는다. 신채호는 이 논설 첫머리에서 국사(國史)의 주체(主體)를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 성하고 쇠퇴함)’로 설정하였다.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이러한 시각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채호의 학설 가운데 상당수는 후학 연구자들의 사료 비판에 의해 논파(論破,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을 깨뜨림)되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연구사(硏究史)적으로만 언급되는 것이 많다. 신채호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역사학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되 신채호의 말과 글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실증의 자세로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기극복에 매진한 결과이다.1)
1) 이상의 서술은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강종훈 교수의 2008년 논문 「최근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탈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52) 59쪽의 논지를 옮긴 것이다.
단재 신채호(1880년~1936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실증’이라는 단어에 ‘식민사학’이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대중이 적지 않은데, 한 역사가의 말처럼 역사학에서 “실증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한국사를 사랑하는 대중 가운데는 이러한 역사학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신채호의 학설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고, 유사역사가들은 이를 기민하게 포착하여 신채호의 이름을 팔아 장삿속을 채우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위대한 민족운동가이며 역사가라는 점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채호의 역사학은 근대역사학의 초보적인 태동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가 많았고. 더불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신채호의 비판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역사서”
필자가 13회 칼럼(<'사회진화론'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에서 소개했듯이, 신채호는 우승열패・약육강식을 인정하는 사회진화론을 깊이 받아들여 우리 민족이 원래는 열등하고 약소한 족속이 아니라 우등하고 강대한 족속이라고 주장한 사상가로서, 그런 우등・강대한 민족이 왜 식민지 족속으로 전락했는가를 설명해야 할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으로) 신채호는 고구려의 멸망과 묘청의 좌절을 꼽았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가까운 시기, 즉 조선후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의 악정(惡政)에 있었지만 패배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신채호는 원인을 먼 시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묘청의 난(신채호의 표현은 ‘서경전역’)이 진압된 것을 민족정기가 궤멸된 안타까운 사건, 즉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가하였던 바, 난을 진압한 정부군(政府軍)의 사령관인 김부식(1075년~1151년)을 민족정기를 궤멸시킨 민족반역자로 여겼으며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진 저급한 역사서로 폄하하였다.
김부식(1075년~1151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이며,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반론하는 견해도 적지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김부식이 직접 쓴 『삼국사기』 논찬(사론)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사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한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외교에서 ‘사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국시(國是)로 삼은 것이 사대교린, 숭유억불, 농본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현대의 국제질서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허울 아래 ‘사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당시엔 ‘도덕적’이었던 사대주의, 그리고 김부식의 문제의식
문제는 ‘사대(事大)’라는 말의 ‘뉘앙스’이다. 신채호의 언급뿐 아니라 ‘양키 고 홈’을 외치던 80년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뒤섞여, 현대의 교양인 다수는 ‘사대주의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외세를 업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나 권력에 기생하는 간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사』 김부식 열전을 살펴보면, 국왕(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자, 다수의 신하들이 이자겸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자겸은 임금에게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되는 특별법 제정을 발의하고,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처럼 높이자고 발의하자, 매번 김부식이 나서서 강력하게 반대하여 저지한 것이 확인된다. 또한 사대주의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은 김부식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국왕과 신하들이 공감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관료 가운데 우리나라의 역사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많지 않았던 풍토도 확인된다.
… 성상폐하(聖上陛下)께서는 요(堯)임금과 같은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우(禹)임금과 같은 근검(勤儉)을 체득하시어, 정무에 골몰하던 여가에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시고, “요즈음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중에 『오경(五經)』, 『제자(諸子)』와 같은 책이나 진(秦)・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자가 간혹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생각컨대,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范曄)의 『(후)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신)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이를 국왕에게 바치면서 첨부한 글인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의 문장이다. 따옴표와 굵은 글씨로 표기된 부분은 성상폐하, 즉 고려 인종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김부식이 인종의 명의로 꾸며 쓴 것이거나 인종과 김부식이 공유한 시각으로 이해한다. 김부식의 주장인 셈인데, 그렇더라도 언급한 비판대상인 ‘학사와 대부’가 직접 열람할 수 있는 국가의 공식문서이므로 없는 사실을 꾸며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매료되고 우리나라 역사·문화에 소홀한 것은 당시 관료사회의 일반적 풍토였고, 김부식은 그런 가운데서도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두 드러내 경계로 삼겠다’는 김부식의 역사관 드러낸 책
유의해서 살펴볼 것은 끝부분의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저술 목적이며, 역사관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김부식은 사료를 선택하였고, 때로는 기사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고쳐 쓰기도 하였다. 실례를 들어보겠다.
가-1.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시조동명성왕)
가-2.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
나-1. “왕은 몸이 몹시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삼국사기』지증마립간)
나-2.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1자 5치가 되어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삼국유사』지철로왕)
다-1. “왕은 특이한 기골을 가졌고 몸이 컸으며 의지가 굳고 식견이 뛰어났다.”(『삼국사기』진평왕)
다-2. “왕은 키가 11척이며 내제석궁을 밟자 돌사닥다리가 한꺼번에 두 개가 부러졌다” (『삼국유사』천사옥대)
가-1과 가-2, 나-1과 나-2, 다-1과 다-2는 모두 같은 내용을 달리 서술한 것인데, 가-2, 나-2, 다-2의 「동명왕편」과 『삼국유사』의 기록이 원래 기록(이전부터 내려오던 『구(舊)삼국사』와 고기(古記)류의 기록)에 가깝다. 김부식은 성곽·궁실·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거나 사람의 음경이 1자 5치라거나 키가 11척이라는 것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으므로 나름 합리적인 표현으로 바꾸어가며 『삼국사기』를 저술했고, 이러한 것들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아예 싣지 않았다. 「동명왕편」과 『삼국유사』를 각각 지은 이규보(1168년~1241년)와 일연(1206년~1289년)은 김부식의 이러한 역사관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원래의 문장을 살려 쓴 것이다.
삼국유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김부식의 이러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문제들, 즉 기사 선택의 편중성이나 삭제 등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필자 같은 한국고대사 연구자 대다수도 신채호와 같은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김부식처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역사가인 권근(1352년~1409년)과 안정복(1712년~1791년)은 김부식이 위와 같이 비합리적인 것들을 좀 더 철저하게 삭제하지 못하고 굳이 실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쪽에선 원래대로 쓰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걸 굳이 왜 썼냐고 비판했으니 아무에게도 욕먹지 않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권한도 없는 김부식이 참고했던 역사서를 모두 없앴다고?
김부식과 『삼국사기』와 관련한 또 하나의 오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난 뒤 저술에 참고했던 사서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다. 막연하게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글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 말은 연원이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이런 말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최초의 글은 함석헌(1901년~1989년)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인데, 사실 이는 신채호의 글을 오독한 데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신채호는 “선유(先儒, 옛 유학자)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대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焚滅, 불질러 없앰)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함석헌이 이 글을 오독하여 구체화했던 것이다.
함석헌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신채호의 표현은 김부식이 역사가로서의 책무를 게을리했다는 비판이다. 즉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원래의 소중한 기록들을 일일이 다 수록해 두었더라면 설령 역대의 병화로 이전의 사서들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내용은 알 수 있을 텐데 사대주의적 사관으로 그것을 적지 않았으니 기록을 잃은 책임에서 김부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분멸’이라는 말 그대로 김부식이 사료를 불 질러 없앴다고 읽었던 것이다.
역사를 사랑하는 현대 교양인의 관념으로는 역사를 편찬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역사서를 없앤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근대 중국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자행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당태종이 『진서(晉書)』(중국 서진과 동진의 역사를 담은 정사)를 편찬한 후 그 밖의 진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샅샅이 찾아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당태종은 자신이 『진서』 내용 가운데 몇 군데 논찬을 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므로, 『진서』 외의 진나라에 대한 역사서의 존재는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청나라 건륭제 시기 『사고전서』 편찬 시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만주족인 청 황실의 위상을 세우려는 목적과 주된 관련이 있다.
하지만 김부식은 당 태종과 청 건륭제 같은 황제가 아니라 일개 신하일 뿐이므로, 당시까지 전해온 사서들을 찾아서 분멸할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삼국사기』 이후로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을 쓰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는 것이 가능했던 사실로도 김부식이 죽은 후 이규보와 일연의 시대까지 『구삼국사』나 여러 고기(古記, 옛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삼국사기』 편찬 당시 존재했던 사서들이 후대까지 전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는 흔한 것이었다. 책과 종이가 귀하고 보존도 용이하지 않은 점도 있고, 베스트셀러만 남고 나머지는 잊혀지는 까닭도 있다. 『삼국사기』만 남고 『구삼국사』는 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2)
2) 조선 중종 때 경주부윤 이계복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후세까지 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두 사서를 중찬하였는데 완질을 구하기까지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있다. 『후한서』의 경우 적어도 범엽이 『후한서』를 저술하기 전에 적어도 7명 이상의 역사가가 『후한서』를 지었는데 범엽의 『후한서』가 저술된 이후에는 그것만 남고 그 이전의 7종류 책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청나라 경학자 혜동의 『후한서』 주석에서 그 조각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이미 언급했듯이 신채호에 앞서 일찍이 이규보와 일연부터 그런 비판의식을 드러내었고, 20세기 이후의 역사연구자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논평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선이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어느 하나밖에 지니지 못할 경우가 있다 하면 대부분이 중국의 서적을 끌어다 쓴 『삼국사기』를 내어놓고 비록 내용이 충실하지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본래의 맛을 전하는 『삼국유사』를 잡는 것이 마땅하다.”3)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한 비판만 받아들이고 『삼국사기』를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책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런 인식에는 언제나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라는 선입견이 동반된다.
3) 20세기 초반의 국한문 혼용의 문장을 필자가 현대어법에 맞게 조금 수정하였다.
최남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부질없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월 따지기
사실 최남선의 말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를 그동안 소홀히 대해왔던 점에 대해 지적하고 『삼국유사』의 소중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두 꼼꼼히 검토한 연구자의 입장과 『삼국사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전통시대의 경향이 전제(前提)된 입장표명이었던 것이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하는 물음은 부질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어느 한쪽의 ‘분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가 대학원 시절 은사에게 들은 논평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따라 해도 좋은 말이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사의 두 수레바퀴다.”
덧붙이는 이야기 : 『삼국사기』와 관련한 논의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논쟁’이다. 일제식민사학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늘날 유사역사가들이 제 입맛대로 악용하면서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주메뉴 중 하나이다. 전공자로서 이에 대한 답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지면상 다루기 어려워 뒷날을 기약한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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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11-11
문제는 ‘사대(事大)’라는 말의 ‘뉘앙스’이다.
신채호의 언급뿐 아니라 ‘양키 고 홈’을 외치던 80년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뒤섞여,
현대의 교양인 다수는 ‘사대주의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외세를 업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나 권력에 기생하는 간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사대주의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역사에서 ‘실증은 의무’, 신채호 학설도 맹목적 답습은 곤란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은 단재 신채호(1880년~1936년)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효시로 꼽는다. 신채호는 이 논설 첫머리에서 국사(國史)의 주체(主體)를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 성하고 쇠퇴함)’로 설정하였다.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이러한 시각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채호의 학설 가운데 상당수는 후학 연구자들의 사료 비판에 의해 논파(論破,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을 깨뜨림)되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연구사(硏究史)적으로만 언급되는 것이 많다. 신채호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역사학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되 신채호의 말과 글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실증의 자세로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기극복에 매진한 결과이다.1)
1) 이상의 서술은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강종훈 교수의 2008년 논문 「최근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탈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52) 59쪽의 논지를 옮긴 것이다.
단재 신채호(1880년~1936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실증’이라는 단어에 ‘식민사학’이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대중이 적지 않은데, 한 역사가의 말처럼 역사학에서 “실증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한국사를 사랑하는 대중 가운데는 이러한 역사학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신채호의 학설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고, 유사역사가들은 이를 기민하게 포착하여 신채호의 이름을 팔아 장삿속을 채우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위대한 민족운동가이며 역사가라는 점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채호의 역사학은 근대역사학의 초보적인 태동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가 많았고. 더불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신채호의 비판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역사서”
필자가 13회 칼럼(<'사회진화론'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에서 소개했듯이, 신채호는 우승열패・약육강식을 인정하는 사회진화론을 깊이 받아들여 우리 민족이 원래는 열등하고 약소한 족속이 아니라 우등하고 강대한 족속이라고 주장한 사상가로서, 그런 우등・강대한 민족이 왜 식민지 족속으로 전락했는가를 설명해야 할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으로) 신채호는 고구려의 멸망과 묘청의 좌절을 꼽았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가까운 시기, 즉 조선후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의 악정(惡政)에 있었지만 패배의식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신채호는 원인을 먼 시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묘청의 난(신채호의 표현은 ‘서경전역’)이 진압된 것을 민족정기가 궤멸된 안타까운 사건, 즉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가하였던 바, 난을 진압한 정부군(政府軍)의 사령관인 김부식(1075년~1151년)을 민족정기를 궤멸시킨 민족반역자로 여겼으며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진 저급한 역사서로 폄하하였다.
김부식(1075년~1151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이며,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반론하는 견해도 적지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김부식이 직접 쓴 『삼국사기』 논찬(사론)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사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한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외교에서 ‘사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국시(國是)로 삼은 것이 사대교린, 숭유억불, 농본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현대의 국제질서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허울 아래 ‘사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당시엔 ‘도덕적’이었던 사대주의, 그리고 김부식의 문제의식
문제는 ‘사대(事大)’라는 말의 ‘뉘앙스’이다. 신채호의 언급뿐 아니라 ‘양키 고 홈’을 외치던 80년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뒤섞여, 현대의 교양인 다수는 ‘사대주의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외세를 업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나 권력에 기생하는 간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사』 김부식 열전을 살펴보면, 국왕(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자, 다수의 신하들이 이자겸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자겸은 임금에게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되는 특별법 제정을 발의하고,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처럼 높이자고 발의하자, 매번 김부식이 나서서 강력하게 반대하여 저지한 것이 확인된다. 또한 사대주의는 유교적 도덕주의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은 김부식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국왕과 신하들이 공감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관료 가운데 우리나라의 역사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많지 않았던 풍토도 확인된다.
… 성상폐하(聖上陛下)께서는 요(堯)임금과 같은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우(禹)임금과 같은 근검(勤儉)을 체득하시어, 정무에 골몰하던 여가에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시고, “요즈음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중에 『오경(五經)』, 『제자(諸子)』와 같은 책이나 진(秦)・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자가 간혹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생각컨대,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范曄)의 『(후)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신)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이를 국왕에게 바치면서 첨부한 글인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의 문장이다. 따옴표와 굵은 글씨로 표기된 부분은 성상폐하, 즉 고려 인종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김부식이 인종의 명의로 꾸며 쓴 것이거나 인종과 김부식이 공유한 시각으로 이해한다. 김부식의 주장인 셈인데, 그렇더라도 언급한 비판대상인 ‘학사와 대부’가 직접 열람할 수 있는 국가의 공식문서이므로 없는 사실을 꾸며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매료되고 우리나라 역사·문화에 소홀한 것은 당시 관료사회의 일반적 풍토였고, 김부식은 그런 가운데서도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두 드러내 경계로 삼겠다’는 김부식의 역사관 드러낸 책
유의해서 살펴볼 것은 끝부분의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저술 목적이며, 역사관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김부식은 사료를 선택하였고, 때로는 기사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고쳐 쓰기도 하였다. 실례를 들어보겠다.
가-1.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시조동명성왕)
가-2.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
나-1. “왕은 몸이 몹시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삼국사기』지증마립간)
나-2.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1자 5치가 되어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삼국유사』지철로왕)
다-1. “왕은 특이한 기골을 가졌고 몸이 컸으며 의지가 굳고 식견이 뛰어났다.”(『삼국사기』진평왕)
다-2. “왕은 키가 11척이며 내제석궁을 밟자 돌사닥다리가 한꺼번에 두 개가 부러졌다” (『삼국유사』천사옥대)
가-1과 가-2, 나-1과 나-2, 다-1과 다-2는 모두 같은 내용을 달리 서술한 것인데, 가-2, 나-2, 다-2의 「동명왕편」과 『삼국유사』의 기록이 원래 기록(이전부터 내려오던 『구(舊)삼국사』와 고기(古記)류의 기록)에 가깝다. 김부식은 성곽·궁실·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거나 사람의 음경이 1자 5치라거나 키가 11척이라는 것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으므로 나름 합리적인 표현으로 바꾸어가며 『삼국사기』를 저술했고, 이러한 것들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아예 싣지 않았다. 「동명왕편」과 『삼국유사』를 각각 지은 이규보(1168년~1241년)와 일연(1206년~1289년)은 김부식의 이러한 역사관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원래의 문장을 살려 쓴 것이다.
삼국유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김부식의 이러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문제들, 즉 기사 선택의 편중성이나 삭제 등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필자 같은 한국고대사 연구자 대다수도 신채호와 같은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김부식처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역사가인 권근(1352년~1409년)과 안정복(1712년~1791년)은 김부식이 위와 같이 비합리적인 것들을 좀 더 철저하게 삭제하지 못하고 굳이 실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쪽에선 원래대로 쓰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걸 굳이 왜 썼냐고 비판했으니 아무에게도 욕먹지 않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권한도 없는 김부식이 참고했던 역사서를 모두 없앴다고?
김부식과 『삼국사기』와 관련한 또 하나의 오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난 뒤 저술에 참고했던 사서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다. 막연하게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글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 말은 연원이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이런 말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최초의 글은 함석헌(1901년~1989년)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인데, 사실 이는 신채호의 글을 오독한 데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신채호는 “선유(先儒, 옛 유학자)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대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焚滅, 불질러 없앰)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함석헌이 이 글을 오독하여 구체화했던 것이다.
함석헌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신채호의 표현은 김부식이 역사가로서의 책무를 게을리했다는 비판이다. 즉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원래의 소중한 기록들을 일일이 다 수록해 두었더라면 설령 역대의 병화로 이전의 사서들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내용은 알 수 있을 텐데 사대주의적 사관으로 그것을 적지 않았으니 기록을 잃은 책임에서 김부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분멸’이라는 말 그대로 김부식이 사료를 불 질러 없앴다고 읽었던 것이다.
역사를 사랑하는 현대 교양인의 관념으로는 역사를 편찬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역사서를 없앤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근대 중국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자행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당태종이 『진서(晉書)』(중국 서진과 동진의 역사를 담은 정사)를 편찬한 후 그 밖의 진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샅샅이 찾아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당태종은 자신이 『진서』 내용 가운데 몇 군데 논찬을 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므로, 『진서』 외의 진나라에 대한 역사서의 존재는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청나라 건륭제 시기 『사고전서』 편찬 시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만주족인 청 황실의 위상을 세우려는 목적과 주된 관련이 있다.
하지만 김부식은 당 태종과 청 건륭제 같은 황제가 아니라 일개 신하일 뿐이므로, 당시까지 전해온 사서들을 찾아서 분멸할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삼국사기』 이후로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을 쓰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는 것이 가능했던 사실로도 김부식이 죽은 후 이규보와 일연의 시대까지 『구삼국사』나 여러 고기(古記, 옛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삼국사기』 편찬 당시 존재했던 사서들이 후대까지 전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는 흔한 것이었다. 책과 종이가 귀하고 보존도 용이하지 않은 점도 있고, 베스트셀러만 남고 나머지는 잊혀지는 까닭도 있다. 『삼국사기』만 남고 『구삼국사』는 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2)
2) 조선 중종 때 경주부윤 이계복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후세까지 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두 사서를 중찬하였는데 완질을 구하기까지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있다. 『후한서』의 경우 적어도 범엽이 『후한서』를 저술하기 전에 적어도 7명 이상의 역사가가 『후한서』를 지었는데 범엽의 『후한서』가 저술된 이후에는 그것만 남고 그 이전의 7종류 책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청나라 경학자 혜동의 『후한서』 주석에서 그 조각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이미 언급했듯이 신채호에 앞서 일찍이 이규보와 일연부터 그런 비판의식을 드러내었고, 20세기 이후의 역사연구자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논평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선이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어느 하나밖에 지니지 못할 경우가 있다 하면 대부분이 중국의 서적을 끌어다 쓴 『삼국사기』를 내어놓고 비록 내용이 충실하지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본래의 맛을 전하는 『삼국유사』를 잡는 것이 마땅하다.”3)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한 비판만 받아들이고 『삼국사기』를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책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런 인식에는 언제나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라는 선입견이 동반된다.
3) 20세기 초반의 국한문 혼용의 문장을 필자가 현대어법에 맞게 조금 수정하였다.
최남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부질없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월 따지기
사실 최남선의 말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를 그동안 소홀히 대해왔던 점에 대해 지적하고 『삼국유사』의 소중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두 꼼꼼히 검토한 연구자의 입장과 『삼국사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전통시대의 경향이 전제(前提)된 입장표명이었던 것이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하는 물음은 부질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어느 한쪽의 ‘분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가 대학원 시절 은사에게 들은 논평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따라 해도 좋은 말이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사의 두 수레바퀴다.”
덧붙이는 이야기 : 『삼국사기』와 관련한 논의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논쟁’이다. 일제식민사학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늘날 유사역사가들이 제 입맛대로 악용하면서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주메뉴 중 하나이다. 전공자로서 이에 대한 답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지면상 다루기 어려워 뒷날을 기약한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지난 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停滯性論)과 그 영향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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