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국민’과 ‘시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아빠’와 ‘엄마’, ‘선생’과 ‘학생’ 등으로 불린다. 이런 호칭은 제도적 호명이고 ‘~다워야 한다’는 요구가 깔려 있다. 하지만 하나의 개인은 다만 ‘국민’이거나 ‘남성’이거나 ‘엄마’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잠재성은 호명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보유한 미지의 특이성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름이 필요하다.
때로 말실수가 드러내는 잠재적 진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문학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모든 이름 부르기가 그 자체로 문학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을 ‘잘못 불렀을 때’ 역설적으로 문학적인 것이 생겨날 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에는 잘못 부른 이름에 관한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오! 수정〉은 기억과 일상의 정치학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름에 관한 영화이다. ‘수정’이라는 주인공 여성의 이름에 감탄사를 붙인 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는 연애를 둘러싼 비루한 현실 게임을 남자의 관점에서 한 번, 여자의 관점에서 한 번 보여준다. 남자의 관점에서 지나쳤던 사소한 순간이 여자에게는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 이렇게 드러나는 장면 하나가 남자가 잘못 부른 이름에 관한 것이다. 스킨십을 시작하는 순간에 남자는 무심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남자는 내 입에서 실수로 다른 이름이 나왔다 해도 그건 결국 이 안에 있는 ‘너’를 부른 것이 아니냐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진실로 남자가 부른 것은 누구일까? 예전에 만났던 상대일 수도 있지만 ‘수정’이나 다른 여자도 아닌, 어쩌면 자기 내부의 숨은 욕망일 수도 있다. 가령 특정한 개체적 대상 너머에 있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말실수가 개인의 욕망과 억압의 틈새에 숨어있는 잠재적 진실을 우연히 드러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도적 호명은 개별 존재의 잠재성 못 열어
문학의 언어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일과 연관이 있다. 문학의 언어는 대상을 정확한 사회적 지시어로 부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을 엉뚱하게 부를 준비가 늘 되어 있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대상을 익숙한 언어로 부르는 것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올 수 없고, 이런 호명은 대개 제도의 관습과 연관이 있다. 사회에서 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 당한다. 이를테면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그 사람의 개별성을 국가 제도가 승인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은 집단의 일부로서의 ‘국민’과 ‘시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아빠’와 ‘엄마’, ‘선생’과 ‘학생’ 등으로 불린다. 이런 호칭은 제도적 호명이고 여기에는 ‘~다워야 한다’라는 요구가 깔려 있다. 이를테면 ‘국민다운’, ‘남자다운’, ‘어른다운’ 등의 특정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개인은 다만 ‘국민’이거나 ‘남성’이거나 ‘엄마’이지만은 않다. 개인의 잠재성은 호명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보유한 미지의 특이성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름이 필요하다.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영화 〈늑대와 춤을〉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연인의 대화에는 ‘애칭’이 등장하고, 이 애칭은 제도적인 호명과는 무관하게 ‘토끼’, ‘허니’, ‘애기’ 등일 수 있다. 이런 이름은 사회가 호명하는 이름이 아니라 내밀한 친밀성의 공간에서 개인의 다른 측면을 연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인디언은 서로를 ‘열 마리 곰’, ‘주먹 쥐고 일어서’, ‘머리에 부는 바람’, ‘발로 차는 새’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런 호칭은 너무나 문학적인 방식으로 그 존재의 특징을 열어 보인다. 이 영화가 인디언을 야만으로 취급하는 정통 서부극에 대한 대안으로서 누가 침략자이며 누가 깊은 영혼을 가졌는가를 보여준다면, 인디언의 호명 방식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 사람을 다르게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박준, 「꾀병」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이 시에는 ‘미인’이라는 흥미로운 호칭이 등장한다. ‘미인’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호명이 아니며, ‘누이’, 혹은 ‘그녀’라고 부를 때와는 다른 뉘앙스를 만든다. 이 호명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익명화’하는 방식으로 둘 사이의 친밀함에 다른 공기를 만들고, 그래서 이 장면은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시에서 ‘나’는 ‘미인’에게 ‘꾀병’을 부리는 사람이고, ‘나’의 꾀병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며,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궁극의 그리움과 관련이 있다. 과거형의 문장들은 미인이 ‘내’ 유언을 받아 적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임을 암시한다. ‘미인’이 가진 이런 비밀스럽고 동시에 비실재적인 느낌은, ‘미인’이라는 호명 자체에서 시작된다.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 도망칠 수 없는 삶의 반복
배수아의 소설 『철수』는 ‘철수’라는 평범한 사람 이름이 제목이다. 이 이름은 너무나 흔해서 그 이름들이 생의 도식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철수’는 다른 가능성이 봉쇄된 전형적인 삶으로서의 ‘철수’이다. ‘철수’는 “무성의하지도 않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라고 요약되는 남자이다. ‘나’는 ‘철수’를 면회하러 갔다가 같은 이름의 군인이 두 명임을 알게 되고 ‘철수 찾기’는 곤경에 처한다.
철수는 그곳에 없었다. 까마귀처럼 흰 벼랑에서 떨어졌으며 나는 철수의 죽은 닭을 들고 눈오는 군인들의 마을을 헤매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병이 들었다. 철 수는 그것을 알까. 철수는 자라서 철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나 또한 자라서 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흰 벼랑에서 떨어진 또 다른 나의 철수와 나는 비 오는 빈집의 창밖을 소리 없이 지나갈 것이다. 시간의 시체들 위로 비가 내린다.
- 배수아, 『철수』 중에서, 작가정신, 2012
‘철수’가 고유하지 않고 ‘철수’와의 관계가 고유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철저히 무감동하고 도식적이다. ‘나’ 역시 ‘철수의 감옥’을 빠져나갈 수 없다. 이 몽환적인 문장들 속에서 ‘철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철수의 시간은 끔찍하게 반복된다.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은 도망칠 수 없는 삶의 무의미를 예리하게 환기한다. 결국 ‘나’ 역시 철수와 같은 그렇고 그런 삶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철수의 시간에 갇혀 있다. 지독하게 비루한 시간의 기억과 그 비루함이 야기하는 환각의 순간들만이 교차할 뿐이다. 이 소설을 통해 철수라는 이름의 친밀함은 낯선 문학적 문맥 위에 놓이게 된다.
다정한 듯해도 참혹과 슬픔 깃든 ‘당신’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의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난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 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흙으로 돌아감 당신…… (중략)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허수경의 시에서 ‘당신’이라는 익숙한 호명은 다른 뉘앙스를 얻는다. 2인칭 ‘당신’이라는 호칭은 직접적인 대화의 대상에게 쓰는 말이다. 연인의 관계라면 그 말은 한없이 가깝고 다정한 호칭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니라는 의미이고,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참혹’이 숨어있다. ‘당신’이라는 호칭이 가진 아름다움과 참혹, 그럼에도 당신을 당신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리움은 ‘킥킥’이라는 의성어의 반복적인 리듬에 실려 예기치 못한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당신이라는 호칭과 ‘킥킥’이라는 의성어의 독특한 조합은 ‘당신’이라는 호칭을 다정하고 가벼우며 동시에 가장 뼈아픈 것으로 만든다.
정확한 호명, 불가능하지만 계속되는 까닭은
‘너’를 정확하게 부르는 일
이름은 스스로 고유한 것이고 싶어 한다. 이름 붙임이란 그것의 고유성을 호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의 이름은 그 존재의 고유함을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부르는 정확한 이름이란 없으며, 삶의 도식과 시간의 배반은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일을 실패하게 만든다. ‘너’를 정확하게 부르는 일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호명은 또한 계속된다.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와 문학이 다른 이름을 상상하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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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이광호
2021-08-18
개인은 ‘국민’과 ‘시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아빠’와 ‘엄마’, ‘선생’과 ‘학생’ 등으로 불린다. 이런 호칭은 제도적 호명이고 ‘~다워야 한다’는 요구가 깔려 있다. 하지만 하나의 개인은 다만 ‘국민’이거나 ‘남성’이거나 ‘엄마’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잠재성은 호명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보유한 미지의 특이성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름이 필요하다.
때로 말실수가 드러내는 잠재적 진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문학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모든 이름 부르기가 그 자체로 문학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을 ‘잘못 불렀을 때’ 역설적으로 문학적인 것이 생겨날 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에는 잘못 부른 이름에 관한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오! 수정〉은 기억과 일상의 정치학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름에 관한 영화이다. ‘수정’이라는 주인공 여성의 이름에 감탄사를 붙인 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는 연애를 둘러싼 비루한 현실 게임을 남자의 관점에서 한 번, 여자의 관점에서 한 번 보여준다. 남자의 관점에서 지나쳤던 사소한 순간이 여자에게는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 이렇게 드러나는 장면 하나가 남자가 잘못 부른 이름에 관한 것이다. 스킨십을 시작하는 순간에 남자는 무심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남자는 내 입에서 실수로 다른 이름이 나왔다 해도 그건 결국 이 안에 있는 ‘너’를 부른 것이 아니냐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진실로 남자가 부른 것은 누구일까? 예전에 만났던 상대일 수도 있지만 ‘수정’이나 다른 여자도 아닌, 어쩌면 자기 내부의 숨은 욕망일 수도 있다. 가령 특정한 개체적 대상 너머에 있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말실수가 개인의 욕망과 억압의 틈새에 숨어있는 잠재적 진실을 우연히 드러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도적 호명은 개별 존재의 잠재성 못 열어
문학의 언어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일과 연관이 있다. 문학의 언어는 대상을 정확한 사회적 지시어로 부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을 엉뚱하게 부를 준비가 늘 되어 있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대상을 익숙한 언어로 부르는 것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올 수 없고, 이런 호명은 대개 제도의 관습과 연관이 있다. 사회에서 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 당한다. 이를테면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그 사람의 개별성을 국가 제도가 승인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은 집단의 일부로서의 ‘국민’과 ‘시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아빠’와 ‘엄마’, ‘선생’과 ‘학생’ 등으로 불린다. 이런 호칭은 제도적 호명이고 여기에는 ‘~다워야 한다’라는 요구가 깔려 있다. 이를테면 ‘국민다운’, ‘남자다운’, ‘어른다운’ 등의 특정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개인은 다만 ‘국민’이거나 ‘남성’이거나 ‘엄마’이지만은 않다. 개인의 잠재성은 호명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보유한 미지의 특이성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름이 필요하다.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영화 〈늑대와 춤을〉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연인의 대화에는 ‘애칭’이 등장하고, 이 애칭은 제도적인 호명과는 무관하게 ‘토끼’, ‘허니’, ‘애기’ 등일 수 있다. 이런 이름은 사회가 호명하는 이름이 아니라 내밀한 친밀성의 공간에서 개인의 다른 측면을 연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인디언은 서로를 ‘열 마리 곰’, ‘주먹 쥐고 일어서’, ‘머리에 부는 바람’, ‘발로 차는 새’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런 호칭은 너무나 문학적인 방식으로 그 존재의 특징을 열어 보인다. 이 영화가 인디언을 야만으로 취급하는 정통 서부극에 대한 대안으로서 누가 침략자이며 누가 깊은 영혼을 가졌는가를 보여준다면, 인디언의 호명 방식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 사람을 다르게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박준, 「꾀병」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이 시에는 ‘미인’이라는 흥미로운 호칭이 등장한다. ‘미인’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호명이 아니며, ‘누이’, 혹은 ‘그녀’라고 부를 때와는 다른 뉘앙스를 만든다. 이 호명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익명화’하는 방식으로 둘 사이의 친밀함에 다른 공기를 만들고, 그래서 이 장면은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시에서 ‘나’는 ‘미인’에게 ‘꾀병’을 부리는 사람이고, ‘나’의 꾀병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며,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궁극의 그리움과 관련이 있다. 과거형의 문장들은 미인이 ‘내’ 유언을 받아 적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임을 암시한다. ‘미인’이 가진 이런 비밀스럽고 동시에 비실재적인 느낌은, ‘미인’이라는 호명 자체에서 시작된다.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 도망칠 수 없는 삶의 반복
배수아의 소설 『철수』는 ‘철수’라는 평범한 사람 이름이 제목이다. 이 이름은 너무나 흔해서 그 이름들이 생의 도식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철수’는 다른 가능성이 봉쇄된 전형적인 삶으로서의 ‘철수’이다. ‘철수’는 “무성의하지도 않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라고 요약되는 남자이다. ‘나’는 ‘철수’를 면회하러 갔다가 같은 이름의 군인이 두 명임을 알게 되고 ‘철수 찾기’는 곤경에 처한다.
철수는 그곳에 없었다. 까마귀처럼 흰 벼랑에서 떨어졌으며 나는 철수의 죽은 닭을 들고 눈오는 군인들의 마을을 헤매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병이 들었다. 철 수는 그것을 알까. 철수는 자라서 철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나 또한 자라서 나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흰 벼랑에서 떨어진 또 다른 나의 철수와 나는 비 오는 빈집의 창밖을 소리 없이 지나갈 것이다. 시간의 시체들 위로 비가 내린다.
- 배수아, 『철수』 중에서, 작가정신, 2012
‘철수’가 고유하지 않고 ‘철수’와의 관계가 고유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철저히 무감동하고 도식적이다. ‘나’ 역시 ‘철수의 감옥’을 빠져나갈 수 없다. 이 몽환적인 문장들 속에서 ‘철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철수의 시간은 끔찍하게 반복된다.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은 도망칠 수 없는 삶의 무의미를 예리하게 환기한다. 결국 ‘나’ 역시 철수와 같은 그렇고 그런 삶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철수의 시간에 갇혀 있다. 지독하게 비루한 시간의 기억과 그 비루함이 야기하는 환각의 순간들만이 교차할 뿐이다. 이 소설을 통해 철수라는 이름의 친밀함은 낯선 문학적 문맥 위에 놓이게 된다.
다정한 듯해도 참혹과 슬픔 깃든 ‘당신’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의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난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 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흙으로 돌아감 당신…… (중략)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허수경의 시에서 ‘당신’이라는 익숙한 호명은 다른 뉘앙스를 얻는다. 2인칭 ‘당신’이라는 호칭은 직접적인 대화의 대상에게 쓰는 말이다. 연인의 관계라면 그 말은 한없이 가깝고 다정한 호칭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니라는 의미이고,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참혹’이 숨어있다. ‘당신’이라는 호칭이 가진 아름다움과 참혹, 그럼에도 당신을 당신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리움은 ‘킥킥’이라는 의성어의 반복적인 리듬에 실려 예기치 못한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당신이라는 호칭과 ‘킥킥’이라는 의성어의 독특한 조합은 ‘당신’이라는 호칭을 다정하고 가벼우며 동시에 가장 뼈아픈 것으로 만든다.
정확한 호명, 불가능하지만 계속되는 까닭은
‘너’를 정확하게 부르는 일
이름은 스스로 고유한 것이고 싶어 한다. 이름 붙임이란 그것의 고유성을 호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의 이름은 그 존재의 고유함을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부르는 정확한 이름이란 없으며, 삶의 도식과 시간의 배반은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일을 실패하게 만든다. ‘너’를 정확하게 부르는 일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호명은 또한 계속된다.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와 문학이 다른 이름을 상상하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 3.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
- 지난 글: [문학이 아닌 모든 것] 2. 문학 언어는 어떻게 발명되는가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3.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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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윤진석
왜 환상적인 이야기야말로 진실한가?
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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