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한국사 전공 연구자 대다수는 거의 어김없이 어린 시절부터 ‘국뽕’이었고, 지금도 그 애국심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연구자 역시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질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일전에서 있었던 박지성의 골과 이승엽의 홈런을 수십 번씩 돌려보고 가슴 뿌듯해 한다.
다만 연구자들이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자들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서 가르치는 편협한 애국심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ㅣ대중 눈높이에 맞는 명쾌한 강의의 그림자
최근 설민석 선생이 몇 가지 논란으로 방송하차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이번 칼럼은 설민석 선생의 방송강연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논란이 불거지기 전에 투고한 것이다(본 칼럼 4회 칼럼 말미에 예고한 바 있음). 논란 이후 논지전개방식을 수정할까 고려하였으나, 본 칼럼에서 설민석 선생의 강연을 예로 든 것이 당초부터 선생 개인을 비난할 목적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표적 사례로 든 것이므로, 초고의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유지하였다.
설민석 선생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는 매력이 있다. 필자 같은 역사전공 교수ㆍ강사는 “설민석 선생님처럼 되세요.”하는 덕담(?)을 자주 듣는다. 그것을 굴욕(?)이라 여겨서인지, 역사연구자 일부는 그의 강연을 평가절하 하지만, 필자는 그의 강연에서 연구자들이 배울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설민석 선생은 언제나 청자의 눈높이에 맞게 명쾌하게 설명한다. 연구자들의 설명은 지난 4회 칼럼에서 소개한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처럼 무미건조한 반면, 설민석 선생의 설명에는 랑케에게는 없는 분노와 열정이 있다.
설민석 출연 tvN <벌거벗은 세계사> 포스터(이미지 출처 : tvN)
지난 2017년 1월 14일 tvN의 <어쩌다 어른> 67회 ‘설민석의 식史를 합시다’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다루었다. 필자의 전공분야이지만 선생의 설명방식을 배우고자 열심히 들었는데, 기대대로 명쾌했으나 결론이 이상했다. 「광개토왕비문」 연구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연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서 청중과 시청자가 불편해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처럼 우리나라에 유리하지 않은 문제를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ㅣ광개토왕비문 해석, 한·일 오랜 논란
논란의 핵심문구는 “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이신묘년래도해(而倭以辛卯年來渡海) 파백잔□□□라이위신민(波百殘□□□羅以爲臣民)”이다.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인데,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고대에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어, 지난 100여 년간 한일 역사학계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선입관 없이 해석하면, “백잔1)과 신라는 예부터 (우리 고구려의) 속민이라서, 이로 말미암아 조공하여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와 (신)라2)를 격파하고 신민(신하)으로 삼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1) 백잔 : 백잔 : ‘백제 찌꺼기’라는 뜻으로, 과거 우리가 북한을 북괴(북한괴뢰北韓傀儡)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표현법이다.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을 보면 신라군이 백제군을 ‘백제 찌끄라지’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 불렀던 데서 착안한 것이다.
2) 백잔□□□라 : 네모는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 대체로 네모 세 번째 글자를 신(新)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비문 4면과 4면 : 주운태 탁본
1883년경 중국에서 일본군 참모부 밀정으로 활동했던 사코(酒勾景信) 대위에 의해 이 비의 탁본이 일본학계에 소개되자 일본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특히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3)를 보고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서기』가 자신들 조상의 일기장인 셈이고, 기사 자체의 신빙성 문제도 있어 확신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인이 쓴 비문에서 자신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문구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3) 『일본서기』 :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한학자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일본인들의 해석이 비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문을 제시했다(1938년경 작성, 1955년 발표).4) 다소 복잡한 해석인데, 주된 논지는 이 비문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무찌른’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북한학계의 김석형5)과 박시형6)에게 계승되어, 고대에 한민족이 왜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사실을 입증해주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4) 정인보의 해석 : “…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잔은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태왕은] 신민(인 백잔과 신라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5) 김석형의 해석 :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잔을 쳐부수고 신라를 □□하여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6) 박시형의 해석 :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 백잔이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ㅣ비문변조설에 일본학계 충격 그런데...
그러나 일본학계가 정인보 등의 해석에 귀를 기울일 리 없다. 따라서 한일 역사학계의 추후 연구 경향도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에 이르러 재일한국인 사학자인 이진희가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 이른바 ‘비문변조설’인데, 비문 표면에 석회가 발려진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의 조작이 가해졌고, 조작주체는 비문의 탁본을 일본학계에 처음 소개한 사코 대위가 소속된 일본군 참모본부로 추정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일본학계는 반론을 시도하였으나 이진희의 재반론으로 공방을 거듭했고, 일본 내 대학에서도 이진희의 학설에 동의하는 학생이 적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에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 연구자들은 그동안의 편협한 연구시각을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재일한국인 사학자인 이성시는 이 책에서 신묘년조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논쟁이
순수하게 역사적 사실의 탐구였다기보다 ‘근대 일본’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근대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온 과정이었음을 지적했다.
정확한 연구사를 소개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는데, 설민석 선생은 이진희 선생이 비문이 변조된 것을 밝혀냈다고 소개한 후, 정인보 선생의 해석(실제로는 박시형의 해석을 소개함)대로 고구려가 왜를 무찌른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하여 청중과 시청자의 분노와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설민석 선생의 설명대로라면, 처음에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한 행태에 분노하였다가 결말에 이르러 안도하고 나아가 고구려의 승리에 감동하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 글의 행을 넘기기 전에 그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해 주시기 바란다.
답은 정인보 등의 해석과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을 모두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문이 변조되었다면 일본인들의 해석은 물론이고 정인보 등의 해석도 의미가 없다. 변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글자의 원형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이 문구는 해석할 수 없는 문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변조된 글자의 원형을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나왔다. 2018년 1월 3일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43회에서는 서예가인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병기 교수가 출연하여, 비문변조설에서 지목한 핵심문구인 ‘도해파(渡海破)’를 ‘입공우(入貢于)’로 복원(?)하여,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가야와 신라에게 조공을 들여놨으므로 (고구려가) 일본을 신민으로 삼아줬다.”고 해석했다. 그러자 패널들의 박수가 쏟아졌는데, 설민석 선생이 불러일으킨 분노와 감동을 능가했다.
ㅣ비문에 석회 바른 건 ‘위조’ 목적 아닌 ‘탁본’ 목적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은 현재로서는 따르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1980년대에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 왕젠췬)의 조사를 통해 비문변조설의 핵심근거인 석회도포(塗布)가 문구조작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왕건군은 6개월 동안 비문 근처에서 숙식하면서 비문을 탐사하고 인근 주민을 인터뷰하여, 석회도포가 일본군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 비문을 탁본하여 팔던 초씨 부자(초천부, 초균덕)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즉 순전히 대량으로 탁본을 찍기 위해 석회를 바른 것이니, 그 과정에서 변개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고의적인 조작은 아니라는 연구결과이다.
그렇다면 판독과 해석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다. 이러한 연구사를 거치면서 정인보 등의 해석에 문제가 많음이 지적되었다. 정인보의 해석은 일반적인 한문해석법이 아니라 문장 내에 중요단어가 많이 생략되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대 최고 한학자인 정인보의 해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아마도 민족의식이 많이 앞섰던 모양이다. 결국 논쟁은 다시 우리가 수세에 몰릴 처지인데, 다행히도 지금은 일본학계에서도 과거처럼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다(물론 극우파 연구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고수하지만, 양심적인 학자도 존재한다).
ㅣ합리적 해석 가능하지만 문구 자체는 불리
현재 이 문구에 대한 한일 역사학계의 통설은, 해석은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의 해석대로 하되, 실상은 고구려인의 과장과 우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선 백제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것부터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속민이 아니라 숙적으로, 오히려 광개토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백잔, 즉 백제 찌꺼기라고 쓰지 않았겠는가? 주목할 점은 이 신묘년(391)조 문구가 영락 6년(396) 광개토왕의 출병을 기술한 문장 바로 앞에 쓰였다는 것이다. 즉 출병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우기고 과장한 것이다.7) 다시 말해 백제와 신라가 원래 자신들의 속민이었는데 상황이 변하여 우리 광개토대왕께서 출병하여 토벌했다고 서술한 것인데, 상황이 변한 까닭을 설명하면서 ‘원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의 위상을 높이기는 싫어서 차선책으로 왜를 높여놓은 것이다. 왜를 그냥 굴러온 개뼈다귀로 취급한 게 아니라 강력한 악의 축, 즉 트릭스터로 묘사했는데, 그래야 이어지는 내용의 토벌사실이 빛난다고 여긴 것이다.
7) 이처럼 광개토왕의 출병사실을 기술하기 전에 그 까닭을 먼저 쓰는 방식은 “동부여추모왕속민(東夫餘舊是雛牟王屬民) …” 구절에도 등장한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고 서술했는데, 동부여가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나름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입장에선 불편한 게 사실이다. 고구려의 과장과 우김이 반영되었다는 것은 해석일 뿐이고, 비문상으로는 왜가 백제와 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버젓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많은 아마추어 역사논객들은 비문변조설을 고수하는데, 설민석 선생과 김병기 교수의 강연도 그러한 경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ㅣ무조건 듣고 싶은 것만 ... 편협한 ‘애국’의 한계
불편하고 불리하다고 해서 마냥 숨길 수만은 없다. 범죄수사기법이 발달하여 범죄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학문과 외교도 과학적 연구방법과 정보의 발달로 불리한 것을 무작정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이 힘을 잃었던 시대에는 유리한 것만 뽑아서 민족정신을 고취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오히려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연구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일본인들과의 토론에서 중국 학자 왕건군의 연구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을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비문변조설만 고수하다가는 국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처럼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설민석 선생이나 김병기 교수와 달리 이와 같이 불편하고 불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이러한 ‘불편한’ 설명에 대해, 이른바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에 경도된 이들은 지속적으로 비난을 쏟아왔다. 그 가운데는 터무니없는 인신공격도 있지만, “일본의 총리 등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 치의 반성도 없이 뻔뻔한 자세를 보이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굳이 불리한 걸 들춰내는 걸로 보아 식민사학의 후예임이 틀림없다.”는 그럴듯한(?) 비판도 있다. 연구자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고 항변하지만 그것은 사태파악을 못하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부각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 올바른 대처방법이라는 주장이다.
태극기
오해는 마시라.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한국사 전공 연구자 대다수는 거의 어김없이 어린 시절부터 ‘국뽕’이었고, 지금도 그 애국심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연구자 역시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질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일전에서 있었던 박지성의 골과 이승엽의 홈런을 수십 번씩 돌려보고 가슴 뿌듯해 한다. 다만 연구자들이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자들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서 가르치는 편협한 애국심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국제관계의 이권이 걸려있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리한 것을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독도문제에 있어 우리가 굳이 일본의 주장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본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가르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고 생각하지만, 허튼 주장일망정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운이 나쁘면 국제여론이 그에 현혹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이제는 무작정 유리한 것만 찾지 말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우리에게 불리한 점은 없는지 살펴서 대처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5. 역사교육,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가르치고 배워도 될까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역사교육,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가르치고 배워도 될까 '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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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가르치고 배워도 될까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1-04
오해는 마시라.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한국사 전공 연구자 대다수는 거의 어김없이 어린 시절부터 ‘국뽕’이었고, 지금도 그 애국심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연구자 역시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질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일전에서 있었던 박지성의 골과 이승엽의 홈런을 수십 번씩 돌려보고 가슴 뿌듯해 한다.
다만 연구자들이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자들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서 가르치는 편협한 애국심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ㅣ대중 눈높이에 맞는 명쾌한 강의의 그림자
최근 설민석 선생이 몇 가지 논란으로 방송하차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이번 칼럼은 설민석 선생의 방송강연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논란이 불거지기 전에 투고한 것이다(본 칼럼 4회 칼럼 말미에 예고한 바 있음). 논란 이후 논지전개방식을 수정할까 고려하였으나, 본 칼럼에서 설민석 선생의 강연을 예로 든 것이 당초부터 선생 개인을 비난할 목적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표적 사례로 든 것이므로, 초고의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유지하였다.
설민석 선생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는 매력이 있다. 필자 같은 역사전공 교수ㆍ강사는 “설민석 선생님처럼 되세요.”하는 덕담(?)을 자주 듣는다. 그것을 굴욕(?)이라 여겨서인지, 역사연구자 일부는 그의 강연을 평가절하 하지만, 필자는 그의 강연에서 연구자들이 배울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설민석 선생은 언제나 청자의 눈높이에 맞게 명쾌하게 설명한다. 연구자들의 설명은 지난 4회 칼럼에서 소개한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처럼 무미건조한 반면, 설민석 선생의 설명에는 랑케에게는 없는 분노와 열정이 있다.
설민석 출연 tvN <벌거벗은 세계사> 포스터(이미지 출처 : tvN)
지난 2017년 1월 14일 tvN의 <어쩌다 어른> 67회 ‘설민석의 식史를 합시다’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다루었다. 필자의 전공분야이지만 선생의 설명방식을 배우고자 열심히 들었는데, 기대대로 명쾌했으나 결론이 이상했다. 「광개토왕비문」 연구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연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서 청중과 시청자가 불편해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처럼 우리나라에 유리하지 않은 문제를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ㅣ광개토왕비문 해석, 한·일 오랜 논란
논란의 핵심문구는 “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이신묘년래도해(而倭以辛卯年來渡海) 파백잔□□□라이위신민(波百殘□□□羅以爲臣民)”이다.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인데,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고대에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어, 지난 100여 년간 한일 역사학계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선입관 없이 해석하면, “백잔1)과 신라는 예부터 (우리 고구려의) 속민이라서, 이로 말미암아 조공하여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와 (신)라2)를 격파하고 신민(신하)으로 삼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1) 백잔 : 백잔 : ‘백제 찌꺼기’라는 뜻으로, 과거 우리가 북한을 북괴(북한괴뢰北韓傀儡)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표현법이다.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을 보면 신라군이 백제군을 ‘백제 찌끄라지’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 불렀던 데서 착안한 것이다.
2) 백잔□□□라 : 네모는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 대체로 네모 세 번째 글자를 신(新)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비문 4면과 4면 : 주운태 탁본
1883년경 중국에서 일본군 참모부 밀정으로 활동했던 사코(酒勾景信) 대위에 의해 이 비의 탁본이 일본학계에 소개되자 일본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특히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3)를 보고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서기』가 자신들 조상의 일기장인 셈이고, 기사 자체의 신빙성 문제도 있어 확신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인이 쓴 비문에서 자신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문구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3) 『일본서기』 :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한학자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일본인들의 해석이 비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문을 제시했다(1938년경 작성, 1955년 발표).4) 다소 복잡한 해석인데, 주된 논지는 이 비문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무찌른’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북한학계의 김석형5)과 박시형6)에게 계승되어, 고대에 한민족이 왜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사실을 입증해주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4) 정인보의 해석 : “…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잔은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태왕은] 신민(인 백잔과 신라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5) 김석형의 해석 :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잔을 쳐부수고 신라를 □□하여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6) 박시형의 해석 :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 백잔이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역사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ㅣ비문변조설에 일본학계 충격 그런데...
그러나 일본학계가 정인보 등의 해석에 귀를 기울일 리 없다. 따라서 한일 역사학계의 추후 연구 경향도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에 이르러 재일한국인 사학자인 이진희가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 이른바 ‘비문변조설’인데, 비문 표면에 석회가 발려진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의 조작이 가해졌고, 조작주체는 비문의 탁본을 일본학계에 처음 소개한 사코 대위가 소속된 일본군 참모본부로 추정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일본학계는 반론을 시도하였으나 이진희의 재반론으로 공방을 거듭했고, 일본 내 대학에서도 이진희의 학설에 동의하는 학생이 적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에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 연구자들은 그동안의 편협한 연구시각을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책 표지(이미지 출처 : 알라딘).
재일한국인 사학자인 이성시는 이 책에서 신묘년조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논쟁이
순수하게 역사적 사실의 탐구였다기보다 ‘근대 일본’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근대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온 과정이었음을 지적했다.
정확한 연구사를 소개하느라고 설명이 길어졌는데, 설민석 선생은 이진희 선생이 비문이 변조된 것을 밝혀냈다고 소개한 후, 정인보 선생의 해석(실제로는 박시형의 해석을 소개함)대로 고구려가 왜를 무찌른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하여 청중과 시청자의 분노와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설민석 선생의 설명대로라면, 처음에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한 행태에 분노하였다가 결말에 이르러 안도하고 나아가 고구려의 승리에 감동하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 글의 행을 넘기기 전에 그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해 주시기 바란다.
답은 정인보 등의 해석과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을 모두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문이 변조되었다면 일본인들의 해석은 물론이고 정인보 등의 해석도 의미가 없다. 변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글자의 원형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이 문구는 해석할 수 없는 문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변조된 글자의 원형을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나왔다. 2018년 1월 3일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43회에서는 서예가인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병기 교수가 출연하여, 비문변조설에서 지목한 핵심문구인 ‘도해파(渡海破)’를 ‘입공우(入貢于)’로 복원(?)하여,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가야와 신라에게 조공을 들여놨으므로 (고구려가) 일본을 신민으로 삼아줬다.”고 해석했다. 그러자 패널들의 박수가 쏟아졌는데, 설민석 선생이 불러일으킨 분노와 감동을 능가했다.
ㅣ비문에 석회 바른 건 ‘위조’ 목적 아닌 ‘탁본’ 목적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은 현재로서는 따르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1980년대에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 왕젠췬)의 조사를 통해 비문변조설의 핵심근거인 석회도포(塗布)가 문구조작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왕건군은 6개월 동안 비문 근처에서 숙식하면서 비문을 탐사하고 인근 주민을 인터뷰하여, 석회도포가 일본군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 비문을 탁본하여 팔던 초씨 부자(초천부, 초균덕)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즉 순전히 대량으로 탁본을 찍기 위해 석회를 바른 것이니, 그 과정에서 변개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고의적인 조작은 아니라는 연구결과이다.
그렇다면 판독과 해석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다. 이러한 연구사를 거치면서 정인보 등의 해석에 문제가 많음이 지적되었다. 정인보의 해석은 일반적인 한문해석법이 아니라 문장 내에 중요단어가 많이 생략되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대 최고 한학자인 정인보의 해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아마도 민족의식이 많이 앞섰던 모양이다. 결국 논쟁은 다시 우리가 수세에 몰릴 처지인데, 다행히도 지금은 일본학계에서도 과거처럼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다(물론 극우파 연구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고수하지만, 양심적인 학자도 존재한다).
ㅣ합리적 해석 가능하지만 문구 자체는 불리
현재 이 문구에 대한 한일 역사학계의 통설은, 해석은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의 해석대로 하되, 실상은 고구려인의 과장과 우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선 백제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것부터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속민이 아니라 숙적으로, 오히려 광개토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백잔, 즉 백제 찌꺼기라고 쓰지 않았겠는가? 주목할 점은 이 신묘년(391)조 문구가 영락 6년(396) 광개토왕의 출병을 기술한 문장 바로 앞에 쓰였다는 것이다. 즉 출병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우기고 과장한 것이다.7) 다시 말해 백제와 신라가 원래 자신들의 속민이었는데 상황이 변하여 우리 광개토대왕께서 출병하여 토벌했다고 서술한 것인데, 상황이 변한 까닭을 설명하면서 ‘원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의 위상을 높이기는 싫어서 차선책으로 왜를 높여놓은 것이다. 왜를 그냥 굴러온 개뼈다귀로 취급한 게 아니라 강력한 악의 축, 즉 트릭스터로 묘사했는데, 그래야 이어지는 내용의 토벌사실이 빛난다고 여긴 것이다.
7) 이처럼 광개토왕의 출병사실을 기술하기 전에 그 까닭을 먼저 쓰는 방식은 “동부여추모왕속민(東夫餘舊是雛牟王屬民) …” 구절에도 등장한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고 서술했는데, 동부여가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나름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입장에선 불편한 게 사실이다. 고구려의 과장과 우김이 반영되었다는 것은 해석일 뿐이고, 비문상으로는 왜가 백제와 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버젓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많은 아마추어 역사논객들은 비문변조설을 고수하는데, 설민석 선생과 김병기 교수의 강연도 그러한 경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ㅣ무조건 듣고 싶은 것만 ... 편협한 ‘애국’의 한계
불편하고 불리하다고 해서 마냥 숨길 수만은 없다. 범죄수사기법이 발달하여 범죄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학문과 외교도 과학적 연구방법과 정보의 발달로 불리한 것을 무작정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이 힘을 잃었던 시대에는 유리한 것만 뽑아서 민족정신을 고취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오히려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연구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일본인들과의 토론에서 중국 학자 왕건군의 연구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을 준비하지 않고 무작정 비문변조설만 고수하다가는 국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처럼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설민석 선생이나 김병기 교수와 달리 이와 같이 불편하고 불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이러한 ‘불편한’ 설명에 대해, 이른바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에 경도된 이들은 지속적으로 비난을 쏟아왔다. 그 가운데는 터무니없는 인신공격도 있지만, “일본의 총리 등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 치의 반성도 없이 뻔뻔한 자세를 보이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굳이 불리한 걸 들춰내는 걸로 보아 식민사학의 후예임이 틀림없다.”는 그럴듯한(?) 비판도 있다. 연구자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고 항변하지만 그것은 사태파악을 못하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부각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 올바른 대처방법이라는 주장이다.
태극기
오해는 마시라.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한국사 전공 연구자 대다수는 거의 어김없이 어린 시절부터 ‘국뽕’이었고, 지금도 그 애국심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연구자 역시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질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일전에서 있었던 박지성의 골과 이승엽의 홈런을 수십 번씩 돌려보고 가슴 뿌듯해 한다. 다만 연구자들이 자칭 애국사학ㆍ민족사학자들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서 가르치는 편협한 애국심은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국제관계의 이권이 걸려있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리한 것을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독도문제에 있어 우리가 굳이 일본의 주장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본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가르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고 생각하지만, 허튼 주장일망정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운이 나쁘면 국제여론이 그에 현혹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이제는 무작정 유리한 것만 찾지 말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우리에게 불리한 점은 없는지 살펴서 대처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5. 역사교육,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가르치고 배워도 될까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4. 역사서술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가?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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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정**
2021-01-04정말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세계 속의 'K'를 말한다
박지원
장자, ‘발리에서 생긴 일’에 빠지다.
명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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