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점에서 의미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어차피 역사는 주관”이라든가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남들이 “그것이 무슨 객관적인 것이냐?”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이어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아예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관을 설파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ㅣ완벽하게 객관적인 증거와 판단은 가능한가
지난 칼럼(<범죄수사ㆍ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에서는 ‘증거’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증거가 필요한 까닭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증거와 판단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사법절차를 예로 들면, 제출된 증거에 대한 1심ㆍ2심ㆍ3심의 판단이 각각 다른 경우도 많고, 1심ㆍ2심ㆍ3심의 판단이 합치하더라도 대중이 생각하는 공정성 및 객관성과는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천인공노할 흉악범에 대해 대중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적용할 것을 기대하지만, 판사는 현행 법률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역사서술의 공정성 및 객관성 문제도 사법행위의 공정성 및 객관성 문제처럼 오랜 논란거리였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동서양의 고대 역사가들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비편향적인 역사서술을 추구했고, 자신의 저술이 그에 충실했다고 자부했다.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1)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페르시아의 제도 등을 높게 평가한 점, 아테네 사람 투키디데스2)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동맹을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동맹과 동등하게 다룬 점 등이 그러했고, 동양에서도 공자가 “기술(記述)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 술이부작).”고 천명한 점이 그러했다.
1) 헤로도토스 : 그리스 역사가. 키케로가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역사》를 썼다.
2) 투키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남긴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실증주의적 역사 기술과 현실주의적 정치 해석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런데 이러한 객관성과 비편향성 추구는 이상에 불과했다. 서양의 경우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심정적으로는 객관을 추구했으나 개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역사서술을 한 까닭에 이야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들은 순수한 편에 속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철학과 역사학이 종교의 시녀로 전락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등이 추구한 ‘진실에 대한 탐구와 구명’ 정신은 설 자리를 잃었고, 사료(史料) 조작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ㅣ처음부터 편향된 공자의 ‘술이부작’ 선언
동양에서는 공자의 술이부작 선언이 역사학의 기본자세로 계승되었지만, 그 술이부작은 처음부터 편향된 것이었다. 공자는 요순(堯舜)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는 복고주의와 말세마다 걸주(桀紂)3)같은폭군이 나타났지만 탕무(湯武)4)가 이를 토벌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순환사관을 제시했는데, 이후의 유학자들은 그에 따라 요와 순이 성인이고, 걸과 주가 폭군이라는 데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전국시대 말의 법가사상가 한비자(韓非子)가 ‘어떤 방패라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함께 놓고 파는 장사꾼 이야기, 즉 모순(矛盾) 이야기5)를 만들어 요와 순을 함께 추앙하는 것을 홀로 비판했는데, 유학이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이후로는 ‘모순’이라는 단어만 남고 그것이 본래는 ‘요순’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3) 걸주 :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가리키는 말로, 포악무도(暴惡無道)의 대명사로 쓰임
4) 탕무(湯武) : 중국 은(殷)나라의 상(商)나라의 건국자 탕왕과 주(周)나라 건국자 무왕을 함께 이르는 말
5) 요순(堯舜)과 모순(矛盾) : 모순 이야기는 『한비자』 논난(論難)편에 등장한다, 한비자가 모순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요와 순이 공존한 시기가 있는데, 순이 완전무결한 현자라면 요가 왜 필요했으며 요가 완전무결한 성인이라면 순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ㅣ역사서술 객관성 믿었던 독일 역사학자 랑케
이처럼 객관성과 비편향성은 이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과 부합하지 않았는데,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6)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여기고 역사서술의 기본자세로 삼았다. 랑케는, 역사서술은 감정이나 가치 판단에 있어 주관성이 철저히 배제된 중립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천명하면서, 역사가란 “단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알리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랑케는 역사 사실에 대한 해석보다 사실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두고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료를 발굴하고, 역사학에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적극 도입하였다. 이러한 랑케의 자세는 한동안 ‘무색중립의 정신’이라며 추앙되며, 역사학이 근대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6) 랑케 : 독일의 역사가인 랑케(1795~1886)의 역사 서술 방법은 원래의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면서 사료의 개념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저술하였다는 특징이 있다고 함.
그런데 ‘중립’이란 무엇인가? 이 아름다운 말은 실제로는 아름답지 못한 이의 입과 손끝에서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첨예한 논쟁 중에 갑자기 ‘중립’이나 ‘조건 없는 화해’를 꺼내드는 이들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런 말을 하는 이는 대개 ‘가진 자’나 ‘가해자’ 또는 그에 기생하는 자이거나 생각 없이 도인행세를 하는 이들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던 이의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거나 사태파악을 못하는 이의 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랑케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랑케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했지만, 실상 그의 입장과 처신은 19세기 혁명기에 프러시아 왕정을 지지했으므로 역사학에 대한 그의 시각마저 기득권을 지지하는 뻔한 말장난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랑케는 13세 연하의 역사가 드로이젠(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7)으로부터 “랑케처럼 분노와 열정이 없는 객관성은 제왕 아래 굽실대며 아양을 떠는 ‘환관(宦官)적 객관성’일 뿐”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7) 드로이젠(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 : 독일의 역사가·정치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시대에 대해 헬레니즘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그 문화적 가치를 강조했음.
중립
이러한 점 외에도, 공자와 랑케가 ‘술이부작’과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천명하면서 객관성과 비(非)편향성을 추구한다고 자부한 것은 사실상 만용이었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Francis Bacon)8)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우상에 빠져 있는 존재’라 완전히 객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처럼 프롤레타리아 시각의 주관성과 당파성을 당당히 내세우는 역사학이 등장하기도 했고, 현대에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또는 “누구를 위해 역사를 쓸 것인가” 하는 외침이 많아지고 있다.
8) 베이컨의 우상론 :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21-1626)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한 허위를 우상이라고 명명하고 ① 종족의 우상(집단의 공통된 성질에서 생기는 문제) ②동굴의 우상(환경, 습관, 교육, 취미 등의 영향으로 인한 문제) ③시장의 우상(사람들의 교제, 특히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 ④극장의 우상(역사, 종교, 전통, 전설 등의 신봉에서 생기는 문제) 등 네 가지를 지적하였다.
키스 젠킨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이미지 출처 : 알라딘)
ㅣ그래도 소중한 객관성 추구, 노골적 편향은 피해야
드로이젠의 비판과 이후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례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점에서 의미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어차피 역사는 주관”이라든가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살펴보았듯이 랑케의 처신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했지만, 랑케가 말한 객관적 실증의 정신은 굳게 지킬 필요가 있다. 남들이 “그것이 무슨 객관적인 것이냐?”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이어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아예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관을 설파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가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부각하여 후련함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 5회 칼럼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한중일 연구자들의 논박과 그것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소비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겠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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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가?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0-12-08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점에서 의미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어차피 역사는 주관”이라든가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남들이 “그것이 무슨 객관적인 것이냐?”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이어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아예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관을 설파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ㅣ완벽하게 객관적인 증거와 판단은 가능한가
지난 칼럼(<범죄수사ㆍ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에서는 ‘증거’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증거가 필요한 까닭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증거와 판단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사법절차를 예로 들면, 제출된 증거에 대한 1심ㆍ2심ㆍ3심의 판단이 각각 다른 경우도 많고, 1심ㆍ2심ㆍ3심의 판단이 합치하더라도 대중이 생각하는 공정성 및 객관성과는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천인공노할 흉악범에 대해 대중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적용할 것을 기대하지만, 판사는 현행 법률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역사서술의 공정성 및 객관성 문제도 사법행위의 공정성 및 객관성 문제처럼 오랜 논란거리였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동서양의 고대 역사가들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비편향적인 역사서술을 추구했고, 자신의 저술이 그에 충실했다고 자부했다.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1)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페르시아의 제도 등을 높게 평가한 점, 아테네 사람 투키디데스2)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동맹을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동맹과 동등하게 다룬 점 등이 그러했고, 동양에서도 공자가 “기술(記述)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 술이부작).”고 천명한 점이 그러했다.
1) 헤로도토스 : 그리스 역사가. 키케로가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역사》를 썼다.
2) 투키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남긴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실증주의적 역사 기술과 현실주의적 정치 해석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런데 이러한 객관성과 비편향성 추구는 이상에 불과했다. 서양의 경우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심정적으로는 객관을 추구했으나 개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역사서술을 한 까닭에 이야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들은 순수한 편에 속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철학과 역사학이 종교의 시녀로 전락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등이 추구한 ‘진실에 대한 탐구와 구명’ 정신은 설 자리를 잃었고, 사료(史料) 조작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ㅣ처음부터 편향된 공자의 ‘술이부작’ 선언
동양에서는 공자의 술이부작 선언이 역사학의 기본자세로 계승되었지만, 그 술이부작은 처음부터 편향된 것이었다. 공자는 요순(堯舜)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는 복고주의와 말세마다 걸주(桀紂)3)같은 폭군이 나타났지만 탕무(湯武)4)가 이를 토벌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순환사관을 제시했는데, 이후의 유학자들은 그에 따라 요와 순이 성인이고, 걸과 주가 폭군이라는 데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전국시대 말의 법가사상가 한비자(韓非子)가 ‘어떤 방패라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함께 놓고 파는 장사꾼 이야기, 즉 모순(矛盾) 이야기5)를 만들어 요와 순을 함께 추앙하는 것을 홀로 비판했는데, 유학이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이후로는 ‘모순’이라는 단어만 남고 그것이 본래는 ‘요순’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3) 걸주 :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가리키는 말로, 포악무도(暴惡無道)의 대명사로 쓰임
4) 탕무(湯武) : 중국 은(殷)나라의 상(商)나라의 건국자 탕왕과 주(周)나라 건국자 무왕을 함께 이르는 말
5) 요순(堯舜)과 모순(矛盾) : 모순 이야기는 『한비자』 논난(論難)편에 등장한다, 한비자가 모순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요와 순이 공존한 시기가 있는데, 순이 완전무결한 현자라면 요가 왜 필요했으며 요가 완전무결한 성인이라면 순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ㅣ역사서술 객관성 믿었던 독일 역사학자 랑케
이처럼 객관성과 비편향성은 이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과 부합하지 않았는데,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6)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여기고 역사서술의 기본자세로 삼았다. 랑케는, 역사서술은 감정이나 가치 판단에 있어 주관성이 철저히 배제된 중립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천명하면서, 역사가란 “단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알리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랑케는 역사 사실에 대한 해석보다 사실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두고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료를 발굴하고, 역사학에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적극 도입하였다. 이러한 랑케의 자세는 한동안 ‘무색중립의 정신’이라며 추앙되며, 역사학이 근대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6) 랑케 : 독일의 역사가인 랑케(1795~1886)의 역사 서술 방법은 원래의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면서 사료의 개념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저술하였다는 특징이 있다고 함.
그런데 ‘중립’이란 무엇인가? 이 아름다운 말은 실제로는 아름답지 못한 이의 입과 손끝에서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첨예한 논쟁 중에 갑자기 ‘중립’이나 ‘조건 없는 화해’를 꺼내드는 이들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런 말을 하는 이는 대개 ‘가진 자’나 ‘가해자’ 또는 그에 기생하는 자이거나 생각 없이 도인행세를 하는 이들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던 이의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거나 사태파악을 못하는 이의 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랑케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랑케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했지만, 실상 그의 입장과 처신은 19세기 혁명기에 프러시아 왕정을 지지했으므로 역사학에 대한 그의 시각마저 기득권을 지지하는 뻔한 말장난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랑케는 13세 연하의 역사가 드로이젠(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7)으로부터 “랑케처럼 분노와 열정이 없는 객관성은 제왕 아래 굽실대며 아양을 떠는 ‘환관(宦官)적 객관성’일 뿐”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7) 드로이젠(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 : 독일의 역사가·정치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시대에 대해 헬레니즘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그 문화적 가치를 강조했음.
중립
이러한 점 외에도, 공자와 랑케가 ‘술이부작’과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천명하면서 객관성과 비(非)편향성을 추구한다고 자부한 것은 사실상 만용이었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Francis Bacon)8)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우상에 빠져 있는 존재’라 완전히 객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처럼 프롤레타리아 시각의 주관성과 당파성을 당당히 내세우는 역사학이 등장하기도 했고, 현대에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또는 “누구를 위해 역사를 쓸 것인가” 하는 외침이 많아지고 있다.
8) 베이컨의 우상론 :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21-1626)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한 허위를 우상이라고 명명하고 ① 종족의 우상(집단의 공통된 성질에서 생기는 문제) ②동굴의 우상(환경, 습관, 교육, 취미 등의 영향으로 인한 문제) ③시장의 우상(사람들의 교제, 특히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 ④극장의 우상(역사, 종교, 전통, 전설 등의 신봉에서 생기는 문제) 등 네 가지를 지적하였다.
키스 젠킨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이미지 출처 : 알라딘)
ㅣ그래도 소중한 객관성 추구, 노골적 편향은 피해야
드로이젠의 비판과 이후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례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점에서 의미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어차피 역사는 주관”이라든가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살펴보았듯이 랑케의 처신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했지만, 랑케가 말한 객관적 실증의 정신은 굳게 지킬 필요가 있다. 남들이 “그것이 무슨 객관적인 것이냐?”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이어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아예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관을 설파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가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부각하여 후련함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 5회 칼럼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한중일 연구자들의 논박과 그것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소비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겠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4. 역사서술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3. 범죄수사·사법절차와 역사학의 닮은 점 : <사료와 사료비판>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역사서술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2)
정**
2020-12-10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이**
2020-12-08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못보던 멋진 모습을 꾸준히... 활짝 열린 일본 안방
박철현
영화《맥전》과 뉴노멀, 혹은 어제까지의 세계에 대한 향...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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