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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다는 것, 역사 그 이상을 감각하는 일

김숨의 증언소설들, 히샴 마타르의 에세이에서 배운 것들

조해진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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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역사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역사 속 구체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알면 보이고 보이면 다시 진짜 앎이 온다. 창백한 정보를 습득하는 앎이 아니라 낯설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타인의 생애를 잠시나마 살아보는 앎......



두 위안부 할머니 육성에 작가가 숨결을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김숨 소설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김숨 소설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홀로-여럿의 주체가 된 삶이자, 역사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한 존재의 경험과 기억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증언 소설

▲ 김숨 작가가 펴낸 두 권의 증언소설(이미지 출처 : 현대문학)



오랜만에 김숨 작가의 증언 소설—그러나 증언 시(詩)라고 불러도 상관없다—인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를 다시 읽었다. 밖으로는 정의연(정의기억연대)과 관련된 세상의 시끄러운 발언들이 있어서고 안으로는 충분히 시적이면서도 그것 자체로 날것의 증언이기도 한 그의 문장들을 다시 읽고 싶어서였다. 두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육성에 작가가 숨결을 넣어 완성한 작품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가수가 꿈이었다. 1928년에 태어났고,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벌금을 벌러 만주에 갔다가 위안소에 끌려갔다. 할머니는 2017년, 그러니까 아흔 살에 이르러서야 ‘아리랑’ 등이 수록된 앨범 <길원옥의 평화>를 발매했다. 매스컴을 통해 본 할머니는 장난스러운 소녀 같기도 하고 수줍은 가수 같기도 한데,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를 읽으면 그런 인상과는 조금은 다른 할머니의 깊은 속내가 물결인 듯 잔잔히 전해진다.

 


“아기가 낳고 싶었어. 아기가 너무나 낳고 싶어서 내 얼굴이 아기 얼굴이 되었어. ”(11p)


"불 끄지 마. 가지 마. 잠들고 싶지 않아. "(50p)


“가진 게 노래뿐이었어. 그래서 노래했어. 가다, 가다 잊어버려서 세상을 살 수 있었어. 여태 살 수 있었어. ”(85p)


1926년생인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인 줄 알고 일본행 배를 탔다가 대만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게 됐고, 대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위안소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할머니는 1992년에야 당신의 경험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김복동 할머니는 정의연의 아이콘이기도 했는데 1993년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이후에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이끌었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에는 이런 대목들이 있다.


“고향 집 떠나던 날, 엄마가 내 머리를 땋아주었어. 머리 끄트머리가 명치쯤 왔어. ”(23p)

 

“보고 싶은 사람이 없어 눈을 잃었을까. 볼 수 없어도, 바다가 그리워. ”(32~33p)


“꿈에 또 엄마가 보였어. 처음에 내가 엄마에게 말했을 때 거짓말이래. 그런 일을 겪고 사람이 살 수 없다며. 그런 일, 내가 겪은 일. ”(44p)



문장이 아닌 누군가의 삶 자체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다 읽고 나면, 내가 읽은 것은 단지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자체였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단순히 역사적 피해자, 혹은 마이크 앞에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투사로서의 그녀들이 아니라 불만 꺼도 슬픔을 껴안아야 했던, 다만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아이 하나를 낳길 원했던 길원옥 할머니를, 여전히 엄마가 머리를 땋아주던 시절이 그리우면서도 엄마에게서 완전히 이해받지 못했다는 서글픔을 느끼는, 그저 바다가 보고 싶은 김복동 할머니를 나는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역사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역사 속 구체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알면 보이고 보이면 다시 진짜 앎이 온다. 창백한 정보를 습득하는 앎이 아니라 낯설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타인의 생애를 잠시나마 살아보는 앎…….

 

내게 문학은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2018년 퓰리쳐상 수상작(논픽션 부문)인 히샴 마타르의 『귀환-아버지들과 아들들, 그 사이의 땅』(돌베개)을 읽고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귀환-아버지들과 아들들, 그 사이의 땅』은 카다피 독재 정권 시절의 리비아를 배경으로 작가 자신의 가족사를 담은 고백적 에세이다. 히샴의 아버지는 카다피에 저항한 대가로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악명 높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훗날 영국에서 유학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한 히샴은 수감된 뒤 행방이 묘연해진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아니 그의 사라진 세월을 복구하기 위해 가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귀향』을 쓴 것이다. 인용한 문구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쓴 추천사의 일부이다.



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준 옮김

▲ 히샴 마타르의 에세이 『귀환-아버지들과 아들들, 그 사이의 땅』(이미지 출처 : 돌베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싸움과 투쟁 덕분에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가 형성되기도 이전에 독재와 혁명과 전쟁 등을 겪으며 누군가는 죽거나 사라졌고, 우리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는 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았기에 우리는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죽거나 사라진 수없이 많은 또 다른 부모가 있다고 말이다. ”



누군가의 희생과 싸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역사를 연속된 선으로 실체화한다면 우리 각자는 그 선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일정 기간 반짝이는 존재일 것이다. 그 빛은 과거에서 와서 우리를 통과한 뒤 미래로 간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앞에 누군가(들)가 살아남아서이고,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지 못한 자가 있어서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히샴의 『귀환』을 읽은 뒤에야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까지 의도와 상관없이 희생된 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 셈이다.



나는 한국에서 1976년에 태어났다.

1976년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23년이 되던 해이고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박정희 정권이 15년째 유지되던 해이다.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전쟁이 있었고 전태일의 죽음이 있었으며 유학생과 재일교포와 어민 등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간첩조작사건이 있었다. 이 근현대사를 내 가계로 축소하여 적용한다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944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식민지의 마지막 해와 전쟁을 겪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력도 갖고 있다고, 또한 1949년생인 나의 어머니는 유아기 때 전쟁을 경험했고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공장 노동자 중 한명이었다고……. 자전적 단편소설인 <문래>를 통해 나는 이렇게 고백한 적 있다.

 

“세상의 입들은 내가 읽은 소설 속 이야기들이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니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려 들었지만, 내게는 무의미한 전언일 뿐이었다. 돌아서서 발꿈치만 살짝 들어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어머니와 순진한 얼굴로 다른 나라의 전쟁에 떠밀려 들어간 아버지가 보였다. ” (<문래> 중에서)



1970년대 영등포 문래고가차도 전경(이미지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 1970년대 영등포 문래고가차도 전경(이미지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문학, 살아있는 얼굴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역사는 분명 과거의 일로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완료된 사건들의 집합체이지만, 역사에서의 진실이란 고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건은 하나일 수 있어도,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하나일 수 없으니까. 역사는 영웅만을 기억할지 몰라도 그 역사를 움직이게 한 것은 우리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사람들이므로, 너무도 다양한 얼굴들이므로. 심지어 살아남지 못한 채 시간의 바깥으로 사라진 사람들도 지금 현재를 있게 해주었다는 것을 나는 소설을 읽고 쓰며 배운 것이다. 그들 각자의 사연을 문학적인 문장으로 파고드는 것이 작가의 몫일 것이고, 그 문장을 읽으며 잊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건 독자의 몫일 것이다. 문학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고 다시 미래로 뻗어간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역사 그 이상을 감각하는 일 ②

국가 간의 역사적 화해는 가능한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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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조해진

소설가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 백신애문학상, 형평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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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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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2022-02-16

많은 거슬 느낄수 있는 시간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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