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속에 나타난 강렬한 자존감
공연계 사람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하는 농담이 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인간이 존재하는데, 남자와 여자 그리고 ‘배우’라고 말이다. 배우들은 타고난 끼와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정신세계나 심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저 우스갯소리거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배우라는 직업상의 특별함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자존감이 높지 않으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다. 무대에 서는 순간 수많은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 강렬한 존재감은 자존감에서 나온다.
뮤지컬 <헤드윅>의 한 장면
뮤지컬 <헤드윅>의 주인공 헤드윅은 자존감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한동안 필자는 헤드윅을 높은 자존감으로 세상 모든 것을 우습게 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헤드윅은 샛노란 가발에 짙은 화장을 한 불완전한 트랜스젠더 가수이다. 작품 속에서 그는 한때 자신이 가르치고 사랑했던, 지금은 록스타가 된 토미 노시스의 콘서트를 따라 다니며 스토킹 콘서트를 하는 중이다. 욕을 참 예쁘게 하는 헤드윅은 마시던 물을 기분 나쁘지 않게 뱉기도 하고 관객들을 유혹하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또는 그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금기를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고 넘기 때문이다. 헤드윅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규칙이나 규범들을 씹다 만 껌으로조차 여기지 않으며 마치 그런 것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만의 세계로 가볍게 도약한다.
헤드윅의 자존감은 남다른 개인사에서 형성된 것 같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 동베를린에 살던 소년 한센은 미군 병사를 만난다. 새로운 사랑과 세상을 찾아 동베를린을 떠나기 위해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기로 한다. 무허가 병원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성전환수술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1인치 살덩이가 남게 된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헤드윅은 세상에 분노를 쏟아낸다. 무기력하게 슬퍼하기보다는 세상을 조롱하면서 당당히 맞선다.
뮤지컬 <헤드윅>의 한 장면
금발의 가발 속에 담긴 진짜 의미
뮤지컬 <헤드윅>의 첫 곡은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이다. 플라톤의 『향연』의 내용을 노래로 만든 곡인데, 이를 근거로 이 작품의 중심 이야기를 소년 한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향연』에서 이 세상에는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여자로 결합한 세 쌍의 인간이 있는데 제우스가 거만한 인간을 반으로 나눠 현재와 같은 남자와 여자만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완전체였던 인간이 반으로 나뉘면서 불완전해졌고,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선천적 그리움을 지닌 존재로 전락한다. 『향연』은 종종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뮤지컬에서는 동성애적 사랑을 하는 헤드윅과 베를린 장벽은 물론 이 세상 모든 경계를 넘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그의 여정에 근거가 된다. 뮤지컬 <헤드윅>은 미군인 루터를 따라 미국에 왔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모든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물려준, 풋내기 고등학생에서 록스타가 된 토미 노시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뮤지컬 <헤드윅>의 한 장면
그러나 얼마 전부터 <헤드윅>이 다른 작품으로 보였다.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못한 헤드윅 그 자체로 인정받으려는 이야기로 보인 것이다. 세상에 지나칠 정도로 당당한 헤드윅의 태도가 여자도 남자도 아닌 특별한 존재로서의 자존감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헤드윅은 남장여자나 복장도착자가 아님에도 항상 짙은 화장에 샛노란 가발을 쓴다. 그것이 헤드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그것은 경계에 선 헤드윅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자나 여자 어느 한 쪽으로 편입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크게 한 방 날리는 헤드윅다운 위악적인 포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쏟아부은 토미 노시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용서와 사랑을 구하자 헤드윅은 위악적인 포즈를 해제한다. 가짜 가슴을 만든 토마토를 으깨버리고 반바지만 입은 채 화장이 뭉개진 얼굴로 허허로이 세상을 본다. 토미가 불러준 용서의 노래는 헤드윅이 풋내기였던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불러주었던 ‘위험한 작은 마을(Wicked Little Town)’을 변형한 곡이다. 토미 노래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당신은 신이 계획한 어떤 남자와 여자보다도 완벽하다.”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겼던 토미 노시스에게 남자나 여자가 아닌 헤드윅 그 자체로 인정받은 그는 마침내 우악스런 화장을 지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헤드윅의 당당함과 호기는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다. 헤드윅은 자신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는 토미에게 인정받으면서 비로소 자존감을 얻게 된다.
뮤지컬 <애비뉴 Q> 의 군무 장면 / 케이트몬스터와 트레키몬스터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얻는 위로
뮤지컬 <애비뉴 Q> 역시 자존감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애비뉴 Q라는 곳이 있는데, 실제 지명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애비뉴 Q는 루저들이 모여 사는 상징적인 가상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게이, 야동 마니아, 국문과를 막 졸업해서 직업을 구하는 졸업생, 한물 간 여배우, 홈리스에 가까운 무직자, 안 웃긴 코미디언 지망생 등등 정말 대책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들은 심지어 서로 자신의 삶이 최악이라며 루저 배틀을 하는 ‘엿 같은 내 인생(It Sucked to Be Me)’을 부른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들의 삶은 큰 변화가 없다. 이 작품은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거나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않지만, 작품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나보다 더 걱정스러운 상태의 인물들이 긍정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의 상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은 인종차별을 하고, 대다수의 남자는 가끔 야동을 보며, 누구나 조금씩은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체감한다”는 숨기고 싶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작품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루저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희망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알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크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존감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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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자존감, 나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뮤지컬 <헤드윅>과 <애비뉴 Q>
박병성
2017-12-07
자존감
뮤지컬 속에 나타난 강렬한 자존감
공연계 사람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하는 농담이 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인간이 존재하는데, 남자와 여자 그리고 ‘배우’라고 말이다. 배우들은 타고난 끼와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정신세계나 심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저 우스갯소리거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배우라는 직업상의 특별함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자존감이 높지 않으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다. 무대에 서는 순간 수많은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 강렬한 존재감은 자존감에서 나온다.
뮤지컬 <헤드윅>의 주인공 헤드윅은 자존감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한동안 필자는 헤드윅을 높은 자존감으로 세상 모든 것을 우습게 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헤드윅은 샛노란 가발에 짙은 화장을 한 불완전한 트랜스젠더 가수이다. 작품 속에서 그는 한때 자신이 가르치고 사랑했던, 지금은 록스타가 된 토미 노시스의 콘서트를 따라 다니며 스토킹 콘서트를 하는 중이다. 욕을 참 예쁘게 하는 헤드윅은 마시던 물을 기분 나쁘지 않게 뱉기도 하고 관객들을 유혹하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또는 그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금기를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고 넘기 때문이다. 헤드윅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규칙이나 규범들을 씹다 만 껌으로조차 여기지 않으며 마치 그런 것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만의 세계로 가볍게 도약한다.
헤드윅의 자존감은 남다른 개인사에서 형성된 것 같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 동베를린에 살던 소년 한센은 미군 병사를 만난다. 새로운 사랑과 세상을 찾아 동베를린을 떠나기 위해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기로 한다. 무허가 병원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성전환수술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1인치 살덩이가 남게 된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헤드윅은 세상에 분노를 쏟아낸다. 무기력하게 슬퍼하기보다는 세상을 조롱하면서 당당히 맞선다.
금발의 가발 속에 담긴 진짜 의미
뮤지컬 <헤드윅>의 첫 곡은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이다. 플라톤의 『향연』의 내용을 노래로 만든 곡인데, 이를 근거로 이 작품의 중심 이야기를 소년 한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향연』에서 이 세상에는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여자로 결합한 세 쌍의 인간이 있는데 제우스가 거만한 인간을 반으로 나눠 현재와 같은 남자와 여자만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완전체였던 인간이 반으로 나뉘면서 불완전해졌고,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선천적 그리움을 지닌 존재로 전락한다. 『향연』은 종종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뮤지컬에서는 동성애적 사랑을 하는 헤드윅과 베를린 장벽은 물론 이 세상 모든 경계를 넘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그의 여정에 근거가 된다. 뮤지컬 <헤드윅>은 미군인 루터를 따라 미국에 왔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모든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물려준, 풋내기 고등학생에서 록스타가 된 토미 노시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뮤지컬 <헤드윅>의 한 장면
그러나 얼마 전부터 <헤드윅>이 다른 작품으로 보였다.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못한 헤드윅 그 자체로 인정받으려는 이야기로 보인 것이다. 세상에 지나칠 정도로 당당한 헤드윅의 태도가 여자도 남자도 아닌 특별한 존재로서의 자존감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헤드윅은 남장여자나 복장도착자가 아님에도 항상 짙은 화장에 샛노란 가발을 쓴다. 그것이 헤드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그것은 경계에 선 헤드윅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자나 여자 어느 한 쪽으로 편입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크게 한 방 날리는 헤드윅다운 위악적인 포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쏟아부은 토미 노시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용서와 사랑을 구하자 헤드윅은 위악적인 포즈를 해제한다. 가짜 가슴을 만든 토마토를 으깨버리고 반바지만 입은 채 화장이 뭉개진 얼굴로 허허로이 세상을 본다. 토미가 불러준 용서의 노래는 헤드윅이 풋내기였던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불러주었던 ‘위험한 작은 마을(Wicked Little Town)’을 변형한 곡이다. 토미 노래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당신은 신이 계획한 어떤 남자와 여자보다도 완벽하다.”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겼던 토미 노시스에게 남자나 여자가 아닌 헤드윅 그 자체로 인정받은 그는 마침내 우악스런 화장을 지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헤드윅의 당당함과 호기는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다. 헤드윅은 자신의 반쪽이라고 생각하는 토미에게 인정받으면서 비로소 자존감을 얻게 된다.
뮤지컬 <애비뉴 Q> 의 군무 장면 / 케이트몬스터와 트레키몬스터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얻는 위로
뮤지컬 <애비뉴 Q> 역시 자존감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애비뉴 Q라는 곳이 있는데, 실제 지명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애비뉴 Q는 루저들이 모여 사는 상징적인 가상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게이, 야동 마니아, 국문과를 막 졸업해서 직업을 구하는 졸업생, 한물 간 여배우, 홈리스에 가까운 무직자, 안 웃긴 코미디언 지망생 등등 정말 대책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들은 심지어 서로 자신의 삶이 최악이라며 루저 배틀을 하는 ‘엿 같은 내 인생(It Sucked to Be Me)’을 부른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들의 삶은 큰 변화가 없다. 이 작품은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거나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않지만, 작품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나보다 더 걱정스러운 상태의 인물들이 긍정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의 상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은 인종차별을 하고, 대다수의 남자는 가끔 야동을 보며, 누구나 조금씩은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체감한다”는 숨기고 싶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작품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루저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희망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알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크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존감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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