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가 청년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 2007년이다. 이전처럼 버릇이 없다거나, 너무 방탕하고 나태한 삶을 살고 있다거나 한 평범한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문제 말이다. 부랴부랴 청년으로 생각되는 이들을 불러들이고 말을 좀 해보라며 자리를 깔기 시작한 이후, 나도 그 ‘청년’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왔다. 참신하고, 톡톡 튀고, 새롭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라며 다그치는 ‘어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어린애’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청년의 목소리를 떠들던 나는 이제 33살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나이가 되었다.
누가 진짜 청년인가?
아직도 나는 종종 ‘청년 논객(필자)’이라는 이상한 직함으로 소개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국사회가 청년실업 통계를 사용할 때 잡는 연령층인 만 15~29세를 한참 벗어났다. 각종 청년정책이나 혜택에서도 청년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또 각 정당에서는 명실상부 청년 후보이고, 어느샌가 슬그머니 바뀐 2040이라는 기준에 비추어보면 다시 또 청년권으로 재돌입한다. 무엇보다도 글이나 말로서 발표되는 나의 의견들에는 이것이 아직 새파랗고 세상 물정 모르지만 뭔가 떠들고 있는 청년의 견해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는다. 대체 나는 청년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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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 - 점점 많은 사람들, 청년들을 ‘잉여’로 만들어가는 사회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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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설명 - 이른바 ‘열정 페이’ ‘열정 노동’으로 불리는 청년 노동 착취 현상에 대해 다룬 책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사실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청년에 관해 오랫동안 떠들면서 알게 된 단 하나의 사실은 ‘청년’이라고 묶어서 부를 법한 단일하고 잘 구획되어 있는 존재들은 없다는 것이다. 크게는, 청년의 기준이 되는 나이부터 혼란스러울 뿐더러 그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러나 가령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20대만 잡아본다고 해도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며 입장은 제각각이다. 청년 문제라는 경향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막상 그 문제의 당사자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단일한 청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생각나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한때, 민주주의와 공익을 외치는 이들마저도 일각에서는 자녀를 주류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들끓었고, 다른 일각에서는 자신의 숭고한 대의를 위해 자녀를 향해 교조주의를 휘둘렀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된 왕년의 청년들은 아무도 믿어선 안 되며, 다 경쟁자이고,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자녀들에게 주입했다. 여기에 청년세대가 한국사회에서 겪었던 사회적 경험들이 더해져, 유아독존의 세계관이 이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사정 따윈 알바 아니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비정한 세계관은 뭉치는 것은 극도로 어렵게, 흩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만들었다. 뭉치면 손해고 흩어지는 게 낫다. 게다가 이것은 현재 사회에서 경향적 진실이다.
환대가 곧바로 손해와 동의어가 되는 세계에서 타인에 건넬 것은 오로지 모욕뿐이다. 딱히 나에게 실질적 이득이 되거나 말거나 딱히 상관은 없고, 나보다 더 기분 나쁜 한 사람, 나보다 더 약한 한 사람을 차례차례 밟고 올라서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 되었다. 모여서 무언가를 바꾸거나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각자도생’이라는 네 글자가 오롯이 남는다.
이 시대, 청년 정신은 없다
▲ ⓒAnadolu Agency/ Gettyimage
2016년 3~4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집회에서의 청년들의 모습. 밤샘하며 토론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청년들이 마주하는 사회와 이들의 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청년 정신 같은 것은 없다. 청년 정신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이미 청년이 한창 지난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몇몇 청년들뿐이다. 지침으로 삼을만한 모든 인물과 사상들이 퇴색되거나 스러져갔다. 롤모델은 없고 반면교사와 타산지석만 넘쳐난다. 결국 청년 어쩌구에 대해 청년들이 날리는 냉소는 역사적으로 쌓여왔던 배신의 기억이 얼어붙은 것이다. 굳이 청년들의 ‘시대정신’을 하나 억지로 만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돌파구가 가능할까? ‘청년 문제’에서 ‘청년’과 ‘문제’를 분리해보면 어떨까? 일단 청년을 젖혀두면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에 동의하거나 바꾸기 위해 청년을 호명해야 할 필요는 딱히 없다. 사회적 경험도 자원도 없는 청년들이 무슨 수로 50년 넘게 쌓여온 문제들과 시스템을 일거에 해결할 해법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러므로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 있는 이들은 자꾸 청년들에게 생색이나 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년’이라는 문제가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자리와 학자금이 해결되면 모든 청년이 다 행복해질까? 그렇지는 않다. 저 두 가지로 해소되지 않는 청년들의 고유한 문제와 사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그것이 이른바 청년의 문제에 대한 진짜 시작점이다. 지금까지의 세계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바라보는 것.
결국, 청년 문제의 해결이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청년들에게 마음껏 사용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노력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는다고 청년들을 을러대는 대신에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이 있다.
자칭 문화불평가. 저서 및 공저로 『잉여사회』, 『모서리에서의 사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의 평등주의』 등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중이며, 『경향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연재 및 기고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하는 중에 있다.
‘청년’ 같은 것은 없다
최태섭
2016-04-28
‘청년’ 같은 것은 없다
이 사회가 청년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 2007년이다. 이전처럼 버릇이 없다거나, 너무 방탕하고 나태한 삶을 살고 있다거나 한 평범한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문제 말이다. 부랴부랴 청년으로 생각되는 이들을 불러들이고 말을 좀 해보라며 자리를 깔기 시작한 이후, 나도 그 ‘청년’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왔다. 참신하고, 톡톡 튀고, 새롭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라며 다그치는 ‘어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어린애’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청년의 목소리를 떠들던 나는 이제 33살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나이가 되었다.
누가 진짜 청년인가?
아직도 나는 종종 ‘청년 논객(필자)’이라는 이상한 직함으로 소개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국사회가 청년실업 통계를 사용할 때 잡는 연령층인 만 15~29세를 한참 벗어났다. 각종 청년정책이나 혜택에서도 청년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또 각 정당에서는 명실상부 청년 후보이고, 어느샌가 슬그머니 바뀐 2040이라는 기준에 비추어보면 다시 또 청년권으로 재돌입한다. 무엇보다도 글이나 말로서 발표되는 나의 의견들에는 이것이 아직 새파랗고 세상 물정 모르지만 뭔가 떠들고 있는 청년의 견해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는다. 대체 나는 청년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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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 - 점점 많은 사람들, 청년들을 ‘잉여’로 만들어가는 사회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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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설명 - 이른바 ‘열정 페이’ ‘열정 노동’으로 불리는 청년 노동 착취 현상에 대해 다룬 책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사실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청년에 관해 오랫동안 떠들면서 알게 된 단 하나의 사실은 ‘청년’이라고 묶어서 부를 법한 단일하고 잘 구획되어 있는 존재들은 없다는 것이다. 크게는, 청년의 기준이 되는 나이부터 혼란스러울 뿐더러 그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러나 가령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20대만 잡아본다고 해도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며 입장은 제각각이다. 청년 문제라는 경향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막상 그 문제의 당사자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단일한 청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생각나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한때, 민주주의와 공익을 외치는 이들마저도 일각에서는 자녀를 주류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들끓었고, 다른 일각에서는 자신의 숭고한 대의를 위해 자녀를 향해 교조주의를 휘둘렀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된 왕년의 청년들은 아무도 믿어선 안 되며, 다 경쟁자이고,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자녀들에게 주입했다. 여기에 청년세대가 한국사회에서 겪었던 사회적 경험들이 더해져, 유아독존의 세계관이 이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사정 따윈 알바 아니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비정한 세계관은 뭉치는 것은 극도로 어렵게, 흩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만들었다. 뭉치면 손해고 흩어지는 게 낫다. 게다가 이것은 현재 사회에서 경향적 진실이다.
환대가 곧바로 손해와 동의어가 되는 세계에서 타인에 건넬 것은 오로지 모욕뿐이다. 딱히 나에게 실질적 이득이 되거나 말거나 딱히 상관은 없고, 나보다 더 기분 나쁜 한 사람, 나보다 더 약한 한 사람을 차례차례 밟고 올라서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 되었다. 모여서 무언가를 바꾸거나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각자도생’이라는 네 글자가 오롯이 남는다.
이 시대, 청년 정신은 없다
▲ ⓒAnadolu Agency/ Gettyimage
2016년 3~4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집회에서의 청년들의 모습. 밤샘하며 토론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청년들이 마주하는 사회와 이들의 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청년 정신 같은 것은 없다. 청년 정신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이미 청년이 한창 지난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몇몇 청년들뿐이다. 지침으로 삼을만한 모든 인물과 사상들이 퇴색되거나 스러져갔다. 롤모델은 없고 반면교사와 타산지석만 넘쳐난다. 결국 청년 어쩌구에 대해 청년들이 날리는 냉소는 역사적으로 쌓여왔던 배신의 기억이 얼어붙은 것이다. 굳이 청년들의 ‘시대정신’을 하나 억지로 만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돌파구가 가능할까? ‘청년 문제’에서 ‘청년’과 ‘문제’를 분리해보면 어떨까? 일단 청년을 젖혀두면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에 동의하거나 바꾸기 위해 청년을 호명해야 할 필요는 딱히 없다. 사회적 경험도 자원도 없는 청년들이 무슨 수로 50년 넘게 쌓여온 문제들과 시스템을 일거에 해결할 해법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러므로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 있는 이들은 자꾸 청년들에게 생색이나 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년’이라는 문제가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자리와 학자금이 해결되면 모든 청년이 다 행복해질까? 그렇지는 않다. 저 두 가지로 해소되지 않는 청년들의 고유한 문제와 사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그것이 이른바 청년의 문제에 대한 진짜 시작점이다. 지금까지의 세계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바라보는 것.
결국, 청년 문제의 해결이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청년들에게 마음껏 사용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노력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는다고 청년들을 을러대는 대신에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이 있다.
자칭 문화불평가. 저서 및 공저로 『잉여사회』, 『모서리에서의 사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의 평등주의』 등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중이며, 『경향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연재 및 기고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하는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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