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게
최성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中
이 시 때문일까? 많은 명소에 인물을 품고 있는 곳이지만, 성북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둘기부터 떠올린다. 김광섭은 성북동 집(168-34번지)에서 이 시를 구상했다. 그의 집은 친구 김중업이 설계했다. 김광섭은 이 집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한 단계 높은 시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그의 시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화가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았다.
▲ 성북동의 대표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심우장의 모습. ⓒ성북문화원
김환기도 바로 이곳 성북동에 살았다. 성북동의 그의 집은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불렸다. 김환기의 호인 수화(樹話)에서 수를 땄고, 그의 부인 김향안의 이름에서 향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집의 당호(堂號)를 지어준 사람은 화가인 근원 김용준이다. 그는 단순히 이름을 지어주었을 뿐 아니라, 원래 수향산방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렇다. 김용준도 바로 성북동에 살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살 때의 집의 이름은 수향산방이 아니라 ‘늙은 감나무가 열리는 집’이라는 뜻에 노시산방(老枾山房)이었다. 그는 1934년 이곳 성북동으로 이사 온 후 노시산방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성북동과 노시산방을 무척 아낀 것은 그의 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상허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용준에게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선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태준은 김용준보다 1년이 먼저인 1933년 성북동에 자리 잡았다. 앞의 세 사람- 김광섭, 김환기, 김용준–이 교류는 했을지언정 같은 시대에 거주하지는 않았던 것에 비해, 이태준과 김용준은 이웃사촌이었다. 이태준의 집에서 성북천을 따라 400m정도 올라가면 김용준의 집이었다. 이태준은 처음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당호를 짓는다. ‘수연산방(壽硯山房)’. 그것은 벼루가 다 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담은 당호였다. 성북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이름이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이것은, 「달밤」에서 성북동에 이사온 소감을 밝히는 내용이다. 실제로 성북동은 이태준 소설의 소재로 자주 활용되었다. 「토끼이야기」, 「달밤」, 「손거부」 등 많은 단편과 「城」, 「목수들」 등의 수필은 모두 성북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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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집 『향수』에 담긴 정지용의 초상. ⓒ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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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전집 『해방전후』에 담긴 이태준의 초상. ⓒ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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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초상. ⓒ한민족문화대백과
공교롭게 이태준의 구인회 활동이 시작된 것도 성북동이었다. 구인회의 주요활동 무대는 종로였지만, 정지용, 박태원, 이효석 등 구인회 회원들은 성북동으로 놀러오기도 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천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오르면 조선 후기의 부호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그들은 이 별장에서 같이 모여 문학을 이야기했다(심지어 박태원은 훗날 이태준의 집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오기도 한다). 구인회의 마지막 활동 가운데 하나는 잡지 『시와 소설』의 발간이었다. 이 작품은 동인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구인회가 아니면서 성북동과 사후에 인연을 맺는 시인 백석의 시 「탕약」이 여기에 실린다. 백석이 생전 성북동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그의 연인 자야(김향안)는 자신이 경영하던 대원각을 기부하여 길상사로 만들면서, 성북동과 백석의 인연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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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백석 시인. ⓒ한국일보
구인회 활동은 1936년 끝나지만 이들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이태준과 정지용은 1939년 문학잡지 『문장』을 발간한다. 그리고 성북동 문인의 또 한 사람인 조지훈이 그해 「고풍의상」이란 시로 등단한다. 조지훈이 아버지 조헌영과 이사를 온 것은 1941년이다. 하지만 조헌영 부자는 이전에도 성북동과 가까운 성균관 근처에 살았다. 그리고 성북동의 또 한 명의 대표 인물인 만해 한용운과 교류했다.
만해 한용운은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했다. 조헌영은 일찍부터 한용운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조지훈은 아버지와 함께 한용운을 만나러 다니며 관계를 맺었다. 이미 시집 『님의 침묵(1926)』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오른 한용운은, 심우장에선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소설을 연재하며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용운과의 만남은 청년 조지훈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해방 후 조지훈은 ‘최초의 한용운 연구자’로 불릴 만큼 한용운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한용운, 이태준, 조지훈, 백석, 정지용, 김용준, 김환기, 김광섭, 박태원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이런 문인들이 성북동과 인연을 맺었다. 성북동은 이처럼 문화·예술인의 마을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 관해 썼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들도 여전히 많다. 횡보 염상섭이 마지막을 보낸 곳도, 카프의 김기진이 살았던 곳도, 김일엽이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한 곳도 바로 이곳 성북동이였다. 사실 1930년대부터 성북동은 문인촌으로 불렸다. 석은 변종하,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은 성북동에 같이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들의 집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거나 사용되었다. 누구 한 명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름이다.
이제 성북동에 그들은 없다. 그들이 따라 올라왔을 성북천도 머릿속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문득 누군가 그리운 날 성북동에 오면 수연산방에서, 심우장에서, 그리고 노시산방 터의 감나무에서, 그리고 길가 곳곳에서 이제는 없는 그들의 숨결 한 자락 정도는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동네 인문학] 동네 이름의 인문학ㅣ성북동의 예술가들
박수진
2016-04-21
성북동의 예술가들
성북동에게
최성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中
이 시 때문일까? 많은 명소에 인물을 품고 있는 곳이지만, 성북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둘기부터 떠올린다. 김광섭은 성북동 집(168-34번지)에서 이 시를 구상했다. 그의 집은 친구 김중업이 설계했다. 김광섭은 이 집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한 단계 높은 시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그의 시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화가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았다.
▲ 성북동의 대표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심우장의 모습. ⓒ성북문화원
김환기도 바로 이곳 성북동에 살았다. 성북동의 그의 집은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불렸다. 김환기의 호인 수화(樹話)에서 수를 땄고, 그의 부인 김향안의 이름에서 향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집의 당호(堂號)를 지어준 사람은 화가인 근원 김용준이다. 그는 단순히 이름을 지어주었을 뿐 아니라, 원래 수향산방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렇다. 김용준도 바로 성북동에 살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살 때의 집의 이름은 수향산방이 아니라 ‘늙은 감나무가 열리는 집’이라는 뜻에 노시산방(老枾山房)이었다. 그는 1934년 이곳 성북동으로 이사 온 후 노시산방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성북동과 노시산방을 무척 아낀 것은 그의 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상허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용준에게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선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태준은 김용준보다 1년이 먼저인 1933년 성북동에 자리 잡았다. 앞의 세 사람- 김광섭, 김환기, 김용준–이 교류는 했을지언정 같은 시대에 거주하지는 않았던 것에 비해, 이태준과 김용준은 이웃사촌이었다. 이태준의 집에서 성북천을 따라 400m정도 올라가면 김용준의 집이었다. 이태준은 처음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당호를 짓는다. ‘수연산방(壽硯山房)’. 그것은 벼루가 다 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담은 당호였다. 성북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이름이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이것은, 「달밤」에서 성북동에 이사온 소감을 밝히는 내용이다. 실제로 성북동은 이태준 소설의 소재로 자주 활용되었다. 「토끼이야기」, 「달밤」, 「손거부」 등 많은 단편과 「城」, 「목수들」 등의 수필은 모두 성북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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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집 『향수』에 담긴 정지용의 초상. ⓒ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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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전집 『해방전후』에 담긴 이태준의 초상. ⓒ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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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초상. ⓒ한민족문화대백과
공교롭게 이태준의 구인회 활동이 시작된 것도 성북동이었다. 구인회의 주요활동 무대는 종로였지만, 정지용, 박태원, 이효석 등 구인회 회원들은 성북동으로 놀러오기도 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천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오르면 조선 후기의 부호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그들은 이 별장에서 같이 모여 문학을 이야기했다(심지어 박태원은 훗날 이태준의 집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오기도 한다). 구인회의 마지막 활동 가운데 하나는 잡지 『시와 소설』의 발간이었다. 이 작품은 동인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구인회가 아니면서 성북동과 사후에 인연을 맺는 시인 백석의 시 「탕약」이 여기에 실린다. 백석이 생전 성북동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그의 연인 자야(김향안)는 자신이 경영하던 대원각을 기부하여 길상사로 만들면서, 성북동과 백석의 인연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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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백석 시인. ⓒ한국일보
구인회 활동은 1936년 끝나지만 이들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이태준과 정지용은 1939년 문학잡지 『문장』을 발간한다. 그리고 성북동 문인의 또 한 사람인 조지훈이 그해 「고풍의상」이란 시로 등단한다. 조지훈이 아버지 조헌영과 이사를 온 것은 1941년이다. 하지만 조헌영 부자는 이전에도 성북동과 가까운 성균관 근처에 살았다. 그리고 성북동의 또 한 명의 대표 인물인 만해 한용운과 교류했다.
만해 한용운은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했다. 조헌영은 일찍부터 한용운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조지훈은 아버지와 함께 한용운을 만나러 다니며 관계를 맺었다. 이미 시집 『님의 침묵(1926)』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오른 한용운은, 심우장에선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소설을 연재하며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용운과의 만남은 청년 조지훈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해방 후 조지훈은 ‘최초의 한용운 연구자’로 불릴 만큼 한용운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한용운, 이태준, 조지훈, 백석, 정지용, 김용준, 김환기, 김광섭, 박태원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이런 문인들이 성북동과 인연을 맺었다. 성북동은 이처럼 문화·예술인의 마을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 관해 썼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들도 여전히 많다. 횡보 염상섭이 마지막을 보낸 곳도, 카프의 김기진이 살았던 곳도, 김일엽이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한 곳도 바로 이곳 성북동이였다. 사실 1930년대부터 성북동은 문인촌으로 불렸다. 석은 변종하,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은 성북동에 같이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들의 집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거나 사용되었다. 누구 한 명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름이다.
이제 성북동에 그들은 없다. 그들이 따라 올라왔을 성북천도 머릿속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문득 누군가 그리운 날 성북동에 오면 수연산방에서, 심우장에서, 그리고 노시산방 터의 감나무에서, 그리고 길가 곳곳에서 이제는 없는 그들의 숨결 한 자락 정도는 찾아 볼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부터 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장으로 재직하며 성북동은 물론 성북구의 역사를 발굴하여 수집,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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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 필사]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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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물건 : 시계,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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