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너무 치열해서 나 하나 따위가 힘든 건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때가 떠올랐다. 매일 밤, 몸을 웅크리고 누우면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터널 밖으로 희망의 빛이 곧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걸어도 어둠은 끝없었다. 등지고 들어왔던 빛마저 보이지 않는 한가운데서, 이 기분을 아무도 몰라주고 어디든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라져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터널만 몇 년째 헤매다, 살자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잡히는 대로 땅굴을 파서 다른 길로 빠져나왔다. 동생은 다니던 대학원 조교로 일을 시작했고, 나는 1년째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어둠을 박차고 나가는 극적인 연출은 아니지만, 나름 밥벌이는 한다는 정도의 엔딩이다. 스스로를 터널에 가둬둔 기간 동안, 합리화라는 도구를 얻었다. 꼭대기에 매달았던 이상을 꺾고, 바닥에 발을 붙이며 ‘이 정도가 어디야’ 하며 산다.
당황스러운 건, 갑자기 그런 일상이 메스껍다는 거다. 그렇게 힘들다더니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위안으로 삼는다. 백 몇십 만 원짜리 사람이 된 것 같다. 젖어 드는 안정감과 묘한 수치심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점에 들른다. 월급 통장이 연계된 체크카드를 긁어 남의 생각을 한 무더기 산다.
어둠이 스며든 습성을 스스로 탓했다. 나만 뒤처진다는 생각, 이대로 살다가 굳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간헐적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가끔씩 왈칵 쏟아지는 자신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다, 번 돈으로 상담도 받고 여행도 갔다. 대충 상황만 쥐여주면 그칠 줄 알았더니, 어릴 적 상처를 마주하고는 더 큰 위로를 찾아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홀린 듯이 약속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며 피로를 쌓았다. 오랜만에 본 언니는 지쳐 보인다 했지만, 딱히 힘든 이유가 생각나지는 않았다. 혹은 다 내려놓고 싶을 때 만난 친구는 나더러 부럽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니 이번에 산 책 무더기가 바닥 한구석에 놓여 있다. 저번 달 즈음 샀던 책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책상을 치우고 책 표지를 펼쳤다. 남이 만들어낸 세상으로 도망치면서 얼굴도 못 본 작가에게 고맙다가,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또 새로운 터널의 시작일 거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것에 지쳤다. 사실 행동보다 그런 마음을 먹을 여지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의 것은 높이고 나는 깎으면서 또 도망치고 싶다고 무책임한 소리로 다이어리를 메웠다.
살기 위한 작은 투정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월요일 밤 9시에 하는 시 모임에 가봤다. 퇴근을 하고도 두 시간을 혼자 때우다 가야 한다. 어느 날은 그만 드러눕고 싶어 핑계를 대려 했지만, 딱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몸이 피곤하면 우울이 따라오는 법이다. 이럴 땐 차라리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 살고 싶은 사람이래요.”
장이지 시인의 시 〈자해-유령〉을 읽고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살고자 함에 대해 말했다. ‘현대 사회와 윤리’라는 대학 수업이 떠올랐다. 첫 단원 제목이 ‘삶과 죽음’이었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가치 있다는 내용이었나. 재수강을 서너 번 하며 반복 학습한 단원이라 잘 안다고 자부했건만, 졸업한 지 몇 년 지났더니 가물가물하다. 삶, 죽음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충 공부했기에 좋은 회사에 못 들어간 건가, 혼자 괜히 멋쩍다. 죽고 싶은 이유조차 새삼 너무나 소시민적이었다. 겨우 내 몫 치 밥값도 못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죽고 싶다니. 노력은 딱 내 눈에 보이는 만큼만 하고, 결과는 미디어에 나오는 만큼 내고 싶어 했으니 욕심쟁이가 맞겠다. 어쨌든 나는 평범한 사람이란 거다. 한 번씩 평범하기 싫은 날은 죽고 싶다는 소리도 해보고, 그렇다고 아프기는 싫어서 환절기마다 병원에 다니는, 한심하지만 너무나도 남들 같아 한심하다고도 못 하겠는 사람이다.
또 서점을 들렀다. 요즘 베스트셀러에는 심리학 서적이 많이 보인다. 다들 책을 사러 올 정도의 우울을 버티며 사나 보다. 친구들로부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 사진을 몇 장 받았던 기억이 났다. 기분부전증 설명을 읽고 누가 내 소개를 쓴 줄 알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심리 상담 센터로 달려갔었는데, 상대적으로 차분한 친구도 항상 긍정적으로 보였던 친구도 그 책을 읽고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니 나만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인 척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초연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차에도, 급체로 명치가 턱 막힐 때도 놀라지 않은 척을 해본다. 살고 죽고 하는 건 시간 흐르듯 떠내려 보내고 싶다. 어쩌면 나는 죽는 것까지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말이 씨가 된
다는데…… 하는 말이 떠올라 내가
정말 죽을까 봐 겁이 덜컥
나서 죽겠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말을 상쇄하기
위해 말끝에 살고 싶다를 붙이기로
했다. 그러니 내 중얼거림은
이렇게 된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마광수, 〈죽고 싶기〉, 《가자, 장미여관으로》
여전히 나 없어도 잘 돌아갈 세상을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온다. 결국 ‘나’를 확인하고 싶나 보다. 월급으로 책을 사며 나의 노동을 확인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존재함을 확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끔은 버거워서, 사라지는 게 유일한 방법같이 느껴져서, ‘사라지고 싶다’는 문장으로 도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꾸준히 쓰는 중입니다. 언젠간 쓰기만 하면서 밥 벌어먹길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yde836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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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박**
2018-11-07
양다은님의 ‘세상 속 나를 찾습니다’를 읽고 외면해왔던 세상 속 저를 잠시나마 꺼내어봅니다. 작가님의 덤덤한 독백이 누군가의 독백으로 이어져 세상 속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작점이 되길 바랍니다.
최**
2018-11-07
현재를 살아가는 20대의 끝자락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우울을 감추기보다 우울에 맞서는 작가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김**
2018-11-07
ㅠㅠ정말 많은 생각이 드는 글이네요ㅠㅠ 저도 오늘 다시 힘내서 들어가는 길에 남의 생각이나 한무더기 사야겠어요
곽**
2018-11-07
어둠은 더 환한 밝음으로 가리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두려움이나 공허함 그 무엇이든 내 안에 있는 것이라면 오롯이 들여다 보는 과정도 참 의미있구나 생각했어요 작가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류**
2018-11-08
"You are so unique" 50개 가까운 강의를 대학에서 수강하면서 유일하게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생애 마지막 교단에 섰던 벤자민 노교수님이 매시간마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누가 뭐라해도.어떤 잣대로 평가해도. 너는 너무나 유니크하고 유일하고 아름답다. 매 시간마다 그 이야기를 하셨는데 마지막날 감사한 학생들의 스피치에 교단 뒤에 주저앉아 우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웃고 마냥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각종SNS의 수 많은 noise들. 그 폭풍의 눈 안에서 꼿꼿히 자신을 사랑해주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작가님과 저와 수많은 20대 30대 청춘들. 모두의 Inner peace를 응원합니다.
세상 속 ‘나’를 찾습니다
사라짐을 말하는 심정
인문쟁이 양다은
2018-11-07
“가루처럼 사라졌으면 좋겠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한창 고생 중인 동생이 말했다.
세상은 너무 치열해서 나 하나 따위가 힘든 건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때가 떠올랐다. 매일 밤, 몸을 웅크리고 누우면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터널 밖으로 희망의 빛이 곧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걸어도 어둠은 끝없었다. 등지고 들어왔던 빛마저 보이지 않는 한가운데서, 이 기분을 아무도 몰라주고 어디든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라져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터널만 몇 년째 헤매다, 살자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잡히는 대로 땅굴을 파서 다른 길로 빠져나왔다. 동생은 다니던 대학원 조교로 일을 시작했고, 나는 1년째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어둠을 박차고 나가는 극적인 연출은 아니지만, 나름 밥벌이는 한다는 정도의 엔딩이다. 스스로를 터널에 가둬둔 기간 동안, 합리화라는 도구를 얻었다. 꼭대기에 매달았던 이상을 꺾고, 바닥에 발을 붙이며 ‘이 정도가 어디야’ 하며 산다.
당황스러운 건, 갑자기 그런 일상이 메스껍다는 거다. 그렇게 힘들다더니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위안으로 삼는다. 백 몇십 만 원짜리 사람이 된 것 같다. 젖어 드는 안정감과 묘한 수치심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점에 들른다. 월급 통장이 연계된 체크카드를 긁어 남의 생각을 한 무더기 산다.
어둠이 스며든 습성을 스스로 탓했다. 나만 뒤처진다는 생각, 이대로 살다가 굳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간헐적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가끔씩 왈칵 쏟아지는 자신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다, 번 돈으로 상담도 받고 여행도 갔다. 대충 상황만 쥐여주면 그칠 줄 알았더니, 어릴 적 상처를 마주하고는 더 큰 위로를 찾아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홀린 듯이 약속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며 피로를 쌓았다. 오랜만에 본 언니는 지쳐 보인다 했지만, 딱히 힘든 이유가 생각나지는 않았다. 혹은 다 내려놓고 싶을 때 만난 친구는 나더러 부럽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니 이번에 산 책 무더기가 바닥 한구석에 놓여 있다. 저번 달 즈음 샀던 책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책상을 치우고 책 표지를 펼쳤다. 남이 만들어낸 세상으로 도망치면서 얼굴도 못 본 작가에게 고맙다가,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또 새로운 터널의 시작일 거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것에 지쳤다. 사실 행동보다 그런 마음을 먹을 여지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의 것은 높이고 나는 깎으면서 또 도망치고 싶다고 무책임한 소리로 다이어리를 메웠다.
살기 위한 작은 투정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월요일 밤 9시에 하는 시 모임에 가봤다. 퇴근을 하고도 두 시간을 혼자 때우다 가야 한다. 어느 날은 그만 드러눕고 싶어 핑계를 대려 했지만, 딱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몸이 피곤하면 우울이 따라오는 법이다. 이럴 땐 차라리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 살고 싶은 사람이래요.”
장이지 시인의 시 〈자해-유령〉을 읽고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살고자 함에 대해 말했다. ‘현대 사회와 윤리’라는 대학 수업이 떠올랐다. 첫 단원 제목이 ‘삶과 죽음’이었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가치 있다는 내용이었나. 재수강을 서너 번 하며 반복 학습한 단원이라 잘 안다고 자부했건만, 졸업한 지 몇 년 지났더니 가물가물하다. 삶, 죽음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충 공부했기에 좋은 회사에 못 들어간 건가, 혼자 괜히 멋쩍다. 죽고 싶은 이유조차 새삼 너무나 소시민적이었다. 겨우 내 몫 치 밥값도 못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죽고 싶다니. 노력은 딱 내 눈에 보이는 만큼만 하고, 결과는 미디어에 나오는 만큼 내고 싶어 했으니 욕심쟁이가 맞겠다. 어쨌든 나는 평범한 사람이란 거다. 한 번씩 평범하기 싫은 날은 죽고 싶다는 소리도 해보고, 그렇다고 아프기는 싫어서 환절기마다 병원에 다니는, 한심하지만 너무나도 남들 같아 한심하다고도 못 하겠는 사람이다.
또 서점을 들렀다. 요즘 베스트셀러에는 심리학 서적이 많이 보인다. 다들 책을 사러 올 정도의 우울을 버티며 사나 보다. 친구들로부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 사진을 몇 장 받았던 기억이 났다. 기분부전증 설명을 읽고 누가 내 소개를 쓴 줄 알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심리 상담 센터로 달려갔었는데, 상대적으로 차분한 친구도 항상 긍정적으로 보였던 친구도 그 책을 읽고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니 나만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인 척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초연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차에도, 급체로 명치가 턱 막힐 때도 놀라지 않은 척을 해본다. 살고 죽고 하는 건 시간 흐르듯 떠내려 보내고 싶다. 어쩌면 나는 죽는 것까지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말이 씨가 된
다는데…… 하는 말이 떠올라 내가
정말 죽을까 봐 겁이 덜컥
나서 죽겠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말을 상쇄하기
위해 말끝에 살고 싶다를 붙이기로
했다. 그러니 내 중얼거림은
이렇게 된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마광수, 〈죽고 싶기〉, 《가자, 장미여관으로》
여전히 나 없어도 잘 돌아갈 세상을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온다. 결국 ‘나’를 확인하고 싶나 보다. 월급으로 책을 사며 나의 노동을 확인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존재함을 확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끔은 버거워서, 사라지는 게 유일한 방법같이 느껴져서, ‘사라지고 싶다’는 문장으로 도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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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인문쟁이 3기]
꾸준히 쓰는 중입니다. 언젠간 쓰기만 하면서 밥 벌어먹길 조심스레 바라봅니다.yde8369@gmail.com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세상 속 ‘나’를 찾습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6)
박**
2018-11-07양다은님의 ‘세상 속 나를 찾습니다’를 읽고 외면해왔던 세상 속 저를 잠시나마 꺼내어봅니다. 작가님의 덤덤한 독백이 누군가의 독백으로 이어져 세상 속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작점이 되길 바랍니다.
최**
2018-11-07현재를 살아가는 20대의 끝자락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우울을 감추기보다 우울에 맞서는 작가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김**
2018-11-07ㅠㅠ정말 많은 생각이 드는 글이네요ㅠㅠ 저도 오늘 다시 힘내서 들어가는 길에 남의 생각이나 한무더기 사야겠어요
곽**
2018-11-07어둠은 더 환한 밝음으로 가리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두려움이나 공허함 그 무엇이든 내 안에 있는 것이라면 오롯이 들여다 보는 과정도 참 의미있구나 생각했어요 작가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류**
2018-11-08"You are so unique" 50개 가까운 강의를 대학에서 수강하면서 유일하게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생애 마지막 교단에 섰던 벤자민 노교수님이 매시간마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누가 뭐라해도.어떤 잣대로 평가해도. 너는 너무나 유니크하고 유일하고 아름답다. 매 시간마다 그 이야기를 하셨는데 마지막날 감사한 학생들의 스피치에 교단 뒤에 주저앉아 우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웃고 마냥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각종SNS의 수 많은 noise들. 그 폭풍의 눈 안에서 꼿꼿히 자신을 사랑해주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작가님과 저와 수많은 20대 30대 청춘들. 모두의 Inner peace를 응원합니다.
이**
2018-11-09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다.
무의식의 흐름
LINDSAYKING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만의 방식들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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