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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을 맞이하였나? : 영화 <1987>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선우성혜

2023-01-17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공권력의 횡포 속에서도 한 자락의 양심은 박종철의 사망이 ‘고문치사’였음을 밝혀갔다. 박종철 사망 후 경찰이 가족을 찾아가서 빠르게 화장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루어진 경찰의 인권유린(고 김근태 전기고문, 권인숙 성고문 등)을 의식한 최 공안부장과 정 서울지검장이 나서서 제대로 된 부검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찰과 조율 끝에 부검은......

 

 

영화 <1987>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1987>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1987>은 6월 항쟁의 기폭제 중 하나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을 그렸다. 역사적 사실을 그렸지만 영화이기에 장면묘사나 인물의 삶 등에 대한 묘사는 실제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장면을 보면서 때때로 역사와 현실을 겹쳐볼 때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술렁거린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역사지만 가르치기 위해 읽었던 관련 자료와 이 글을 쓰면서 새롭게 접한 인터뷰 기사와 각종 영상을 통해 알게 된 사실 그만큼이지만. 영화를 영화로 볼 때와 다르게 글을 써야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보니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많이 보인다. 이미 많은 사람이 글을 남겼기에 어쩌면 흔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하며 글을 작성하려 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


좌절된 ‘80년의 봄(서울의 봄)’과 전두환 정권의 민주화 운동 탄압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후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진전을 요구하며 ‘80년의 봄(서울의 봄)’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신군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 각계각층의 민족‧민주운동을 폭압했다. 학생운동은 약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 시위는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학생운동 내부의 노선 갈등도 심화되었다. 학생들은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문」 유인물 살포 및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를 전개하거나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1981)’을 결성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림-1>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서 전개된 차량시위 행렬(출처: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서 전개된 차량시위 행렬(출처: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편 노동운동도 급격히 침체되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민주노조 파괴를 꾀하였고 청계피복 노조 해산(1981.1), 반도상사 노조 해산(1981.3), 서통 노조 어용화(1981.6), 콘트론데이타사의 한국 철수(1982.7), 원풍모방 노조 해산(1982.10) 등이 있었다.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여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해고노동자 명단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취업을 차단했다.



유화조치와 민주화운동의 강화



1983년 무렵부터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억압을 완화해나갔다. 학원 대책은 처벌보다 선도 위주의 예방정책으로 바꾸었고 수감 중인 학생 사범을 특별사면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이유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시행한 사회악 일소 조치(삼청교육대), 언론기본법, 노동관계법, 집시법, 대통령선거인단법 등의 제정을 통한 안정된 권력 구축, 정권의 안정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국내 안정과 평화 모습 과시 필요 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각계각층의 민주화 운동을 부활시키고 확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학생운동은 한편에서는 학원 자율화운동으로 전개되며 학생 활동 허용, 학내 언론 활성화, 총학생회 허용, 강제징집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면서 노동운동과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과 학생연대조직을 통한 투쟁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신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지원한 미국에 대한 항의로 반미운동을 전개했고,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1983)에 대한 반대시위를 전개해 법 자체를 폐기시키기도 하였다. 전국의 대학생을 총망라한 전국학생총연합회(전학련)을 결성(1985)하고 반독재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학생운동에서 이념 지향적 성격도 나타나며 전두환 정권의 타도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노동운동도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전문적인 노동운동가로 발전하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1984)를 결성하여 블랙리스트 철폐투쟁, 청계피복 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노동법 개정투쟁 등을 전개했다. 택시 기사들의 파업 및 시위와 같이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운동이 분출되었고 조합결성으로 이어졌다. 노동조합은 1982년 2,194개에서 1987년 2,725개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 학생들과 연대한 노동운동이 강화되었고 일부 학생들은 위장 취업으로 노동현장에 진출하여 노동운동을 확대시켰다. 대중정치조직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1985.8)’,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1986.2)’이 결성되었다.


재야세력도 결집하며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 민청련)’, 청년‧노동자‧농민‧문화‧종교 등 운동조직의 연합체 조직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1984.6. 민민협)’, 재야 명망가 중심의 ‘민주‧통일국민회의(1984,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이후 ‘민민협’과 ‘국민회의’사 통합되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1985, 민통련)’이 조직되었다. 1985년 ‘민통련’에는 민청련, 서노련, 기독교단체 등이 가입하여 전체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반공열풍의 조장과 민주화 운동의 탄압



한편 재야세력과 연계하여 김영삼‧김대중 등이 민주화추진협의회(1984.5. 민추협)를 결성하여 전두환 정권에 맞섰다. 이를 모태로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고 민추협과 공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을 구상하며 개헌을 추진하였다. 각계각층의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자 전두환 정권은 다시 강경한 입장으로 전환했다.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원회 사건, 맑스‧레닌주의당 결성사건(1986.10), 반제동맹당 사건(1986.11)의 관련자를 구속하고 민통련을 비롯한 14개 노동단체의 해산을 명령했다. 또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이 남한을 수몰하기 위한 것이라 선전하면서 반공열풍을 조장하고 그 대응으로 ‘평화의 댐’ 건설을 추진하여 의연금을 걷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책상을 ‘탁’ 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쓰러졌다


 

박종철은 당시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조사에 참고인으로 끌려갔다가 고문치사를 당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 군(21‧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학교 측은 박 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 황호택, 블루엘리펀트, 2017, 77쪽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중앙일보』, 1987.1.15., 1.5판



<그림-2> 고 박종철 1주기 추모제(출처:연합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 박종철 1주기 추모제(출처:연합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87년 1월 15일 당시 『중앙일보』 법조담당 선성호 기자가 박종철의 죽음을 처음 알렸다고 한다. 신성호 기자는 15일 오전 취재를 위해 서울 서소문동 대검찰청 이규홍 공안 4과장을 통해 경찰조사를 받던 서울대 학생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서 숨졌음을 알았다. 이를 단서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 서울지검 1차장, 서울지검 공안부 학원담당 검사실을 통해 박종철의 이름 일부와 신분을 확인했다. 그리고 『중앙일보』 사회부 데스크를 중심으로 검찰, 서울대 출입기자, 부산주재 기자가 확인된 사실을 맞추어 최초로 박종철의 죽음을 알렸다. 당시 치안본부장은 ‘변사’이며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라고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양심고백 속 확인되는 진실, ‘쇼크사’가 아닌 ‘고문치사’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공권력의 횡포 속에서도 한 자락의 양심은 박종철의 사망이 ‘고문치사’였음을 밝혀갔다. 박종철 사망 후 경찰이 가족을 찾아가서 빠르게 화장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루어진 경찰의 인권유린(고 김근태 전기고문, 권인숙 성고문 등)을 의식한 최 공안부장과 정 서울지검장이 나서서 제대로 된 부검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찰과 조율 끝에 부검은 한양대 병원에서 서울지검 형사부 안 검사를 중심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 박사의 집도로 진행되었다. 이때 박종철 사체 부검에 입회한 삼촌 박월길 씨와 한양대 박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조사당시 고문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부검을 집도한 황 박사는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에게 박종철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회유와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가 박종철 부검에 입회한 가족과 한양대 박 교수를 인터뷰 한 것을 알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생각에 감정서를 사실대로 기록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박종철 사망 직후 남영동 대공수사분실에 파견된 오 내과전문의의 증언이 『동아일보』(「수사警官(경관) 2명 檢察(검찰) 소환방침」, 1987.1.17.)에 보도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어기면서도 언론 역시 진실 은폐를 추적하여 박종철의 ‘고문치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당시 시국 관련 수배자들의 의문사가 다수 발생했던 때였다. 억울한 죽음을 목도한 양심이 있었기에 박종철의 ‘고문치사’가 밝혀질 수 있었다.



고문가담 경찰의 진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다



당시 정치범이 많이 수용되었던 영등포교도소 특별사동에는 고문경찰관으로 지목된 조한규와 강진규가 수감되어 있었다. 대공수사단 사람들이 찾아와 자주 면회를 했지만 교도관이 입회하되 기록을 남기지 말도록 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 안유 보안계장은 입회를 통해 고문에 가담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대공수사단이 수감 경찰관에게 각각 1억 원이 입금된 통장을 보여주며 회유와 협박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면회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상황에서 안 보안계장은 고문가담자의 이름을 기억하여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영등포교도소에 시국사범들은 단식이나 구호를 외치거나 소란을 피우며 투쟁을 했는데, 1986년 5‧3인천사태로 수감된 이부영 기자가 나서 중재시켰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안 계장은 신문을 읽고 바깥소식을 전해주었던 터라 후에 회고록에 쓰라며 대공수사단 소속 고문 경찰들이 모의‧조작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이부용은 이를 듣고만 있다가 후에 편지로 옮겼다. 이부용은 수감 중인 고문경찰관들의 방을 향해 소리치며 설득했고 이들의 자백은 교도관 한재동을 통해 바깥으로 전달되었다. 한재동은 전직 교도관 전병용 씨를 통해 이부영의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편지는 한 달 만에 전병용에게 전해졌고, 극적으로 전병용이 체포되기 이틀 전 김정남에게 전달되었다.



국본의 결성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



<그림-3>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부산에서 최루탄 발사를 막기 위해 선두에 선 시민(출처: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부산에서 최루탄 발사를 막기 위해 선두에 선 시민(출처: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김정남에게 전해진 이부영의 편지는 신문기자와 변호사들을 통해 추가로 얻은 정보와 취합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발표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조작의 전말이 알려진 상황에서 4‧13 호헌조치가 취해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커졌다. 그러한 가운데 향린교회에서 여러 민주화운동단체들 대부분을 망라한 기구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이 결성되었다. 전국 동시다발적 시위, 재야‧종교계‧정치권의 대연합전선 추구, 일반 시민의 참여를 위한 최저 수준의 강령을 준비하는 등 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6‧10국민대회 이후 부산, 경남, 대구‧경북, 강원, 성남, 인천, 수원‧안양, 청주‧충북, 대전‧충남, 전주‧전북, 광주‧전남, 제주 등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과연 우리는 ‘그날’을 맞이했는가?>



영화 <1987>을 보고 관련한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서 나 역시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적 순간의 끝자락을 밟고 성장했음을 깨닫는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를 느끼는 순간이랄까. 한 칼럼에서는 영화 <1987>이 지나치게 선악 구도를 강조하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공감하면서도 영화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치열했던 삶에 더욱 주목하고 싶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겹쳐본다.


최근 나 자신과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한 질문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이다. 단순하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만 보아도 우리 사회가 급격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외적인 성장과 함께 근 몇 년 사이 코로나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변화시켰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묻고 싶어진다. 지금 우리는 얼마만큼 ‘그날’에 가까워졌는가? 라고.




<참고문헌 및 사이트>


향린교회, 『향린40년』(한울, 1993). 『6월 항쟁을 기록하다』1~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2007)

서중석, 『6월 항쟁』(돌베개, 2011).

정해구, 『(20세기 한국사)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역사비평사, 2011).

김인호, 『공존과 화해를 위한 한국현대사』(국학자료원, 2013).

황호택,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블루엘리펀트, 2017).


6‧10 민주항쟁 http://www.610.or.kr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

한겨례신문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98228.html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80130165300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우리는 ‘그날’을 맞이하였나? : 영화 <1987>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대한민국 국호와 삼한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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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성혜 동의대학교 조교수 사진
선우성혜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조교수
동의대학교에서 <일제강점기 동래 지역 조선인 경제인의 경제활동과 연고 결속(2020)>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지역사,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주로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사업체 및 전통수공업인 담뱃대 제조업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왜 일본은 조선을 수탈하였는가?(자음과 모음, 2012)>, <부산 근‧현대사 산책(국학연구원, 2017)>, <원도심, 역사의 발자치를 찾아서(부산솽역시사편찬위원회, 2020)> 등이 있다. 연구 논문으로는 일제하 김해지역 고적보존회 연구(항도부산29, 2013), 1910년대 경남 지역 은사수산사업(항도부산40, 2020), 일제강점기 동래지역자본가 연구(지역과 역사47, 2020), 부산부 편입지역 사업체 연구(항도부산 44,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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