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사진이 어머니의 젊은 날의 한때를 가장 밝게, 행복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라면서 가끔 그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사진에 담긴 어머니의 환한 표정을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너무 가난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농사일은 가혹할 정도였으므로 살면서 웃을 일이 별로 없었기에.
내가 쓴 시에는 나의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내 어머니가 내게 주신 사랑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나만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계시고, 또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졸시 ‘두터운 스웨터’에서 이렇게 썼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뜻한 가슴을 짜네”
- 문태준, <두터운 스웨터> 중
이 시에서 적고 있듯이 어머니의 스웨터가 크고 두텁다는 것은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이 넓고 깊다는 뜻일 테다. 이 시는 실제로 내가 어렸을 때 본 장면이기도 하다.
나의 어머니는 흥이 꽤 있으신 분이다. 시골에서 평생 벼농사와 과수원 일을 해오셨지만, 당신의 흥이 일어나면 낮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내가 듣기엔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어머니께서는 하루가 저물 무렵에 부엌 아궁이에 불을 넣거나 깨를 베어 말린 후 깨를 털 때에 더러 노래를 부르셨다. 노동요는 아니었고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다.
나의 아버지는 점잖은 분이시지만 아버지도 흥이 꽤 있으신 분이다. 집안이나 동네에 잔치가 있을 적에 아버지께서 잔치를 연 곳에서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버지의 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곳이 잔칫집의 흙 마당이든 예식이 있던 연회장이든 관계없이.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노랫말을 외는 일에 공을 들이셨다. 신문지의 빈 공간이나, 달력의 뒷장 등에 유행가의 가사를 옮겨 적으며 가사를 외우곤 하셨다.
시골에서는 한 해에 두어 차례 마을분들이 함께 관광을 가기도 했는데, 대개 그때에는 순서를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기에 아버지의 노랫말 외기는 그즈음이면 더 정성과 노력을 들이시는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도 고운 음성이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노래가 좀 더 들을 만하다는 것에 누나들과 나와 동생들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언젠가 관광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한참 후일에 아버지께서 ‘전국노래자랑’이나 ‘가요무대’같은 프로그램을 아주 즐겨 시청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논과 밭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시면서 그 노동의 고된 피로를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일을 통해 조금은 덜곤 하셨다.
아버지의 춤
우리집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아마 어머니의 연세가 서른 중반쯤 되셨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분이 숙녀복을 입고 김천 직지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윗옷을 벗어 한쪽 어깨에 둘러 걸친 사진이었다. 어머니는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의 친구분은 왼쪽 어깨에 윗옷을 걸친 채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나는 이 사진이 어머니의 젊은 날의 한때를 가장 밝게, 행복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라면서 가끔 그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사진에 담긴 어머니의 환한 표정을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너무 가난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농사일은 가혹할 정도였으므로 살면서 웃을 일이 별로 없었기에.
내가 나고 자란 경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는 전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어두워지면 방에 호롱불을 켰다. 호롱은 석유를 받아서 불을 켰는데 유리로 작은 병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안쪽에 심지를 박아 놓았다. 호롱불을 켜면 그을음이 꽤 많이 났다. 석유를 아끼느라 밤 동안에 오랫동안 켜놓지는 못했고, 그래서 식구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 집에서 가전제품을 장만한 것은 다른 집에 비해 많이 늦었다.
호롱불
나는 할 수 없이 텔레비전을 보러 내 또래가 있는 큰아버지네에 가거나 동네 다른 친구 집에 가곤 했다.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 밥 먹을 시간에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큰집이나 친구네 집에 눌러앉아 있다가 밥을 얻어먹고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온 것은 내 나이 열 살 때인 1980년이니까 내가 다른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러 다닌 기간은 적어도 서너 해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게 된 문이 있는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 들어온 후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카세트 플레이어 한 대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풍경을 기억한다. 전자제품을 파는 김천 시내의 한 상점에서 사온 카세트 플레이어로 몸집이 꽤 컸다. 가족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포장을 뜯었던 것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콘센트에 연결해 사용할 수도 있고 또 큰 건전지를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는 제품이었다. 아마도 망간 건전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 없이도 이 큰 건전지를 이용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밭일을 할 때에나 자두를 딸 때 자두밭에서 노래를 들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서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유행가가 흘러나욌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집으로 들어오던 날에 카세트테이프도 몇 개 함께 들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수 강은철의 노래 테이프였고, 어머니께서 자주 들으셨던 곡은 '삼포로 가는 길'이었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구비구비 산길 걷다보면 한발 두발 한숨만 나오네. 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기. 저 산마루 쉬어가는 길손아. 내 사연 전해 듣겠소. 정든 고향 떠난 지 오래고 내 님은 소식도 몰라요. 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제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 강은철, <삼포로 가는 길> 중
자료를 찾아보니 이 곡이 실린 강은철의 노래 테이프는 1983년 10월에 발매되었다. 가사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들어왔는데, 지금에서야 살펴보니 사랑하는 님에 대한 이별과 재회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든 님에 대한 과거의 이별과 그로 인한 상실감도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머니께서는 거의 매일 들으실 정도로 이 곡을 자주 들으셨고, 그 때문에 나도 이 노래가 꽤 친숙해졌다.
강은철 <삼포로 가는 길> (출처: VIBE)
어느덧 나도 이 곡을 흥얼거릴 정도가 되었고, 내가 피할 수 없이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할 때에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어머니의 삼십 대를 떠올리면 윗옷을 벗어 어깨에 걸친 채 김천 직지사로부터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던 모습과 강은철의 ‘삼포로 가는 길’을 듣고 또 따라부르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꼿꼿하게 뿔 세우고 있는 흑염소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죽창 들고 봉기라도 하듯 젖먹이 어린것들 뒤로 물린 채 북풍에 수염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뒷발질에 먼지를 밀어올리면서 들판에 일렬로 벌리어 있었습니다”
- 문태준, <오, 나의 어머니> 중
이 시는 나의 첫 시집에 실려있는 졸시 <오, 나의 어머니> 전문이다. 이 시에서처럼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사셨지만, 그럴 때에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늘 노래가 흘렀다.
시인
1970년 김천에서 출생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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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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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 당신은 어떤‘가요’ -
문태준
2022-09-22
나는 이 사진이 어머니의 젊은 날의 한때를 가장 밝게, 행복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라면서 가끔 그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사진에 담긴 어머니의 환한 표정을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너무 가난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농사일은 가혹할 정도였으므로 살면서 웃을 일이 별로 없었기에.
내가 쓴 시에는 나의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내 어머니가 내게 주신 사랑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나만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계시고, 또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졸시 ‘두터운 스웨터’에서 이렇게 썼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뜻한 가슴을 짜네”
- 문태준, <두터운 스웨터> 중
이 시에서 적고 있듯이 어머니의 스웨터가 크고 두텁다는 것은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이 넓고 깊다는 뜻일 테다. 이 시는 실제로 내가 어렸을 때 본 장면이기도 하다.
나의 어머니는 흥이 꽤 있으신 분이다. 시골에서 평생 벼농사와 과수원 일을 해오셨지만, 당신의 흥이 일어나면 낮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내가 듣기엔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어머니께서는 하루가 저물 무렵에 부엌 아궁이에 불을 넣거나 깨를 베어 말린 후 깨를 털 때에 더러 노래를 부르셨다. 노동요는 아니었고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다.
나의 아버지는 점잖은 분이시지만 아버지도 흥이 꽤 있으신 분이다. 집안이나 동네에 잔치가 있을 적에 아버지께서 잔치를 연 곳에서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버지의 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곳이 잔칫집의 흙 마당이든 예식이 있던 연회장이든 관계없이.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노랫말을 외는 일에 공을 들이셨다. 신문지의 빈 공간이나, 달력의 뒷장 등에 유행가의 가사를 옮겨 적으며 가사를 외우곤 하셨다.
시골에서는 한 해에 두어 차례 마을분들이 함께 관광을 가기도 했는데, 대개 그때에는 순서를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기에 아버지의 노랫말 외기는 그즈음이면 더 정성과 노력을 들이시는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도 고운 음성이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노래가 좀 더 들을 만하다는 것에 누나들과 나와 동생들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언젠가 관광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한참 후일에 아버지께서 ‘전국노래자랑’이나 ‘가요무대’같은 프로그램을 아주 즐겨 시청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논과 밭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시면서 그 노동의 고된 피로를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일을 통해 조금은 덜곤 하셨다.
아버지의 춤
우리집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아마 어머니의 연세가 서른 중반쯤 되셨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분이 숙녀복을 입고 김천 직지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윗옷을 벗어 한쪽 어깨에 둘러 걸친 사진이었다. 어머니는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의 친구분은 왼쪽 어깨에 윗옷을 걸친 채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나는 이 사진이 어머니의 젊은 날의 한때를 가장 밝게, 행복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라면서 가끔 그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사진에 담긴 어머니의 환한 표정을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너무 가난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농사일은 가혹할 정도였으므로 살면서 웃을 일이 별로 없었기에.
내가 나고 자란 경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는 전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어두워지면 방에 호롱불을 켰다. 호롱은 석유를 받아서 불을 켰는데 유리로 작은 병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안쪽에 심지를 박아 놓았다. 호롱불을 켜면 그을음이 꽤 많이 났다. 석유를 아끼느라 밤 동안에 오랫동안 켜놓지는 못했고, 그래서 식구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 집에서 가전제품을 장만한 것은 다른 집에 비해 많이 늦었다.
호롱불
나는 할 수 없이 텔레비전을 보러 내 또래가 있는 큰아버지네에 가거나 동네 다른 친구 집에 가곤 했다.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 밥 먹을 시간에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큰집이나 친구네 집에 눌러앉아 있다가 밥을 얻어먹고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온 것은 내 나이 열 살 때인 1980년이니까 내가 다른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러 다닌 기간은 적어도 서너 해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게 된 문이 있는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 들어온 후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카세트 플레이어 한 대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풍경을 기억한다. 전자제품을 파는 김천 시내의 한 상점에서 사온 카세트 플레이어로 몸집이 꽤 컸다. 가족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포장을 뜯었던 것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콘센트에 연결해 사용할 수도 있고 또 큰 건전지를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는 제품이었다. 아마도 망간 건전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 없이도 이 큰 건전지를 이용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밭일을 할 때에나 자두를 딸 때 자두밭에서 노래를 들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서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유행가가 흘러나욌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집으로 들어오던 날에 카세트테이프도 몇 개 함께 들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수 강은철의 노래 테이프였고, 어머니께서 자주 들으셨던 곡은 '삼포로 가는 길'이었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구비구비 산길 걷다보면 한발 두발 한숨만 나오네. 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기. 저 산마루 쉬어가는 길손아. 내 사연 전해 듣겠소. 정든 고향 떠난 지 오래고 내 님은 소식도 몰라요. 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제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 강은철, <삼포로 가는 길> 중
자료를 찾아보니 이 곡이 실린 강은철의 노래 테이프는 1983년 10월에 발매되었다. 가사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들어왔는데, 지금에서야 살펴보니 사랑하는 님에 대한 이별과 재회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든 님에 대한 과거의 이별과 그로 인한 상실감도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머니께서는 거의 매일 들으실 정도로 이 곡을 자주 들으셨고, 그 때문에 나도 이 노래가 꽤 친숙해졌다.
강은철 <삼포로 가는 길> (출처: VIBE)
어느덧 나도 이 곡을 흥얼거릴 정도가 되었고, 내가 피할 수 없이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할 때에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어머니의 삼십 대를 떠올리면 윗옷을 벗어 어깨에 걸친 채 김천 직지사로부터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던 모습과 강은철의 ‘삼포로 가는 길’을 듣고 또 따라부르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꼿꼿하게 뿔 세우고 있는 흑염소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죽창 들고 봉기라도 하듯 젖먹이 어린것들 뒤로 물린 채 북풍에 수염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뒷발질에 먼지를 밀어올리면서 들판에 일렬로 벌리어 있었습니다”
- 문태준, <오, 나의 어머니> 중
이 시는 나의 첫 시집에 실려있는 졸시 <오, 나의 어머니> 전문이다. 이 시에서처럼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사셨지만, 그럴 때에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늘 노래가 흘렀다.
[당신은 어떤‘가요’]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때와 장소의 갈등 구조 -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시인
1970년 김천에서 출생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등을 수상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때와 장소의 갈등 구조 –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박형서
어느 여가수의 목
임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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