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들은 좋은 분과 나쁜 놈이 딱 나뉘어 있는 관계로 맘 편히 듣기만 하면 되었다. 좋은 분은 어차피 좋은 일만 하다가 복을 받고, 나쁜 놈은 끝내 나쁜 짓만 하다가 벌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프레드 루선스 (출처: 네브라스카주립대학교)
프레드 루선스(Fred Luthans) 는 갈등을 개인적 갈등, 대인적 갈등, 집단 간 갈등, 조직적 갈등으로 구분했다. 앞의 두 가지는 로맨스나 심리소설처럼 말랑말랑한 소설에서 주로 보이고 뒤의 두 가지는 역사, 전쟁, 계몽소설처럼 선이 굵은 소설에 많이 나타난다.
앞의 두 가지 중에서도 대인적 갈등은 어딘가 뻔한 면(그냥 투닥투닥이지 뭐)이 있는 터라 필자는 개인적 갈등에 관심이 많은데, 루선스에 의하면 개인적 갈등은 또 좌절 갈등, 목표 갈등, 역할 갈등으로 나눠진다.
좌절 갈등은 심하게 망해서 벌컥 화를 내거나, 포기하거나, 집착하거나, 흥정하는 태도다.
한편 목표 갈등은 쿠르트 레빈(Kurt Lewin)의 네 가지 분류가 명료하다. 첫째는 <접근-접근>이며 끌리는 두 대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이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의 결정 장애를 생각하면 쉽다. 둘째는 피하고 싶은 두 대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회피-회피>다. 출근도 싫고 백수도 싫은 것이다. 셋째는 <접근-회피>다. 하나의 대상이 가진 두 속성 중에서 하나는 끌리고 다른 하나는 피하고 싶은 마음, 예컨대 허리에 좋다는 현금다발 침대에서 자고 싶은데 하필 가족이 전부 도둑이라 망설이는 경우다. 마지막 넷째는 <다중접근-회피>인데 혼자 술 마시는 게 저렴하지만 재미없고 친구랑 마시면 재미있지만 꼭 나한테 내라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루선스로 돌아가 개인적 갈등 중에서 역할 갈등을 자세히 보면 역할 간 갈등과 역할 내 갈등이 있는데 역할 간 갈등은 그냥 넘어가고 역할 내 갈등은 역할 긴장, 역할 모호성, 상호 기대의 차이로 나뉘며 이 중에서도 특히 역할 긴장과 상호 기대의 차이가 흥미롭지만…… 아무튼.
옛날이야기들은 좋은 분과 나쁜 놈이 딱 나뉘어 있는 관계로 맘 편히 듣기만 하면 되었다. 좋은 분은 어차피 좋은 일만 하다가 복을 받고, 나쁜 놈은 끝내 나쁜 짓만 하다가 벌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 그런 패턴을 따르지 않는 경우는 스토킹과 명예훼손, 음란 노래 제작 및 배포 등을 저지르고도 왕이 된 백제의 서동 이야기 정도에 불과하다.
선과 악
그런데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야기의 그러한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분류는 서서히 퇴화되었다. 지고지순한 선과 무지막지한 악이 부딪히면 마음이야 후련하겠지만 그건 초현실적인 사기다. 오늘날 우리의 균형감각은 절대선과 절대악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두 조금씩 선한 면이 있고, 모두 일부분 사악한 면이 있는 것이다. 그 복잡함이 현실이며, 이야기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두 선이 대립해 말릴 수 없거나 두 악이 대립하는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거나 선과 악의 구분 자체가 없는 대립, 이를테면 신념과 사랑이 상호배타적일 때, 양심과 의무가 서로 충돌할 때, 때와 장소가 안타까이 어긋날 때 빚어지는 갈등은 우리를 매우 심오한 망설임으로 인도한다. 비록 조금 불편할지언정 그 망설임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예술과 접촉했다는 증거다.
1995년인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당시 MT를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타란 악기라기보다는 수컷 공작의 멋진 꼬리 깃털 같은 것이었다. 손가락을 지네발처럼 놀려 줄을 튕기면 예쁜 여학생들이 주위에 앉아 새끼고양이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 호감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기분은 무척 짜릿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몇 곡 돌린 후, 이제 이 몸이 멋들어지게 독창 한 곡 뽑을 차례였다. 다들 배시시 웃으며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좀 이상한 선택을 했다.
조정희 <참새와 허수아비> (출처: VIBE)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이름도 모르는 노란 참새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느릿느릿하게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며 부른 노래는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당연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래도 어쩔 텐가, 나는 끝까지 불렀다. 왠지 모를 오기에 2절까지 불렀다. 적당히 끊고 <매일매일 기다려>로 넘어갈 줄 알았던 친구들이 하나둘 궁둥이 털고 일어나 “형서 실망이야.” 하고는 돌아섰다. 사실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야말로 평소 내 주제가였다. <매일매일 기다려>가 박형서고 박형서가 <매일매일 기다려>였다. 특히 후렴구의 ‘매일매일 기다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라 기다리다 짜증 폭발한 태도로 부를 때면 모두 기립박수로 열광했다. 나한테 바라는 게 그 하나뿐이었던 친구들을 내가 배반한 것이었다.
노래 한 곡 잘못 골랐다고 단박에 외톨이가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걔네들은 그냥 무식하니까, 그래서 <참새와 허수아비>의 아름다운 갈등 구조를 이해 못하니까.
들판에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 허수아비 앞에 참새가 날아왔다. 허수아비는 새를 쫓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하필 그 노란 참새가 좋아진 것이다. 이제 어째야 할까? 뭘 어째, 내쫓아야지. 그게 의무니까, 그게 허수아비라는 자신의 존재 이유니까. 눈앞의 참새를 쫓아내지 않으면 자신은 허수아비가 아니고, 허수아비가 아닌 허수아비로는 사랑은커녕 그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으니까.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그 슬픔도 이해 못하는 너희들은, 차라리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 멀리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결혼해서 아이가 생겼다. 어어 하는 순간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말대꾸도 하고 혼자 닭다리도 뜯었다. 그렇게 네 살이 되던 해, 하루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가 말했다.
“아빠가 노래 불러줄까?”
“응, 하고 싶으면 해.”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노란 참새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당장 일어나 가버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정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얘가 지금 조나? 그래서 이 슬픈 음조가 자장가로 들리나?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날 찾아 날아온 널
보내야만 해야 할 슬픈 나의 운명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넘어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석양에 노을이 물들고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노오란 참새는 날 찾아 와주겠지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넘어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끝까지 불렀다. 그때까지 눈만 깜박거리고 있어서 무슨 네 살배기가 이 노래를 얌전히 듣지, 하는데 슬그머니 일어나 가버리기에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한참 후 거실로 나가보니 아이가 소파 옆에 쪼그려 앉아 빌런의 성장기 씬처럼 인형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중이었다. 그런데 뭔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단어도 순서도 조금 틀렸지만, 분명히 아까 내가 불러준 노래였다. 나는 나는 지파라기 허슈아비…….
아빠, 하고 나에게 물었다. “허슈아비가 왜 슬퍼?”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뉘앙스가 달랐다. ‘노란 참새는 병아리를 잘못 본 거 아니야?’ 같은 걸 물었다면 그야말로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허수아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숙명에 정확히 공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딱 그랬다. 혹시 감수성 천재인가, 하고 흠칫 놀랐다.
“응, 그건 말이야.”
벅찬 감동에 젖어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 옛날에 각 잡고 열심히 불렀던 노래는 사실 이십 년 후에야 태어날 내 딸한테 불러준 게 아니었을까? 내가 때와 장소를 오판했다고 비난한 너희들, 너희들이 틀렸다. 난 너희들에게 들려준 게 아니야. 그때 그 자리에 잘못 끼어든 건 내 노래가 아니라 너희들 매정한 궁둥이였어.
소설가,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전공 교수
1972년 강원도 춘천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지은 책으로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핸드메이드 픽션], [끄라비], [낭만주의], [새벽의 나나], [당신의 노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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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장소의 갈등 구조 –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 당신은 어떤'가요' -
박형서
2022-08-10
옛날이야기들은 좋은 분과 나쁜 놈이 딱 나뉘어 있는 관계로 맘 편히 듣기만 하면 되었다. 좋은 분은 어차피 좋은 일만 하다가 복을 받고, 나쁜 놈은 끝내 나쁜 짓만 하다가 벌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프레드 루선스 (출처: 네브라스카주립대학교)
프레드 루선스(Fred Luthans) 는 갈등을 개인적 갈등, 대인적 갈등, 집단 간 갈등, 조직적 갈등으로 구분했다. 앞의 두 가지는 로맨스나 심리소설처럼 말랑말랑한 소설에서 주로 보이고 뒤의 두 가지는 역사, 전쟁, 계몽소설처럼 선이 굵은 소설에 많이 나타난다.
앞의 두 가지 중에서도 대인적 갈등은 어딘가 뻔한 면(그냥 투닥투닥이지 뭐)이 있는 터라 필자는 개인적 갈등에 관심이 많은데, 루선스에 의하면 개인적 갈등은 또 좌절 갈등, 목표 갈등, 역할 갈등으로 나눠진다.
좌절 갈등은 심하게 망해서 벌컥 화를 내거나, 포기하거나, 집착하거나, 흥정하는 태도다.
한편 목표 갈등은 쿠르트 레빈(Kurt Lewin)의 네 가지 분류가 명료하다. 첫째는 <접근-접근>이며 끌리는 두 대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이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의 결정 장애를 생각하면 쉽다. 둘째는 피하고 싶은 두 대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회피-회피>다. 출근도 싫고 백수도 싫은 것이다. 셋째는 <접근-회피>다. 하나의 대상이 가진 두 속성 중에서 하나는 끌리고 다른 하나는 피하고 싶은 마음, 예컨대 허리에 좋다는 현금다발 침대에서 자고 싶은데 하필 가족이 전부 도둑이라 망설이는 경우다. 마지막 넷째는 <다중접근-회피>인데 혼자 술 마시는 게 저렴하지만 재미없고 친구랑 마시면 재미있지만 꼭 나한테 내라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루선스로 돌아가 개인적 갈등 중에서 역할 갈등을 자세히 보면 역할 간 갈등과 역할 내 갈등이 있는데 역할 간 갈등은 그냥 넘어가고 역할 내 갈등은 역할 긴장, 역할 모호성, 상호 기대의 차이로 나뉘며 이 중에서도 특히 역할 긴장과 상호 기대의 차이가 흥미롭지만…… 아무튼.
옛날이야기들은 좋은 분과 나쁜 놈이 딱 나뉘어 있는 관계로 맘 편히 듣기만 하면 되었다. 좋은 분은 어차피 좋은 일만 하다가 복을 받고, 나쁜 놈은 끝내 나쁜 짓만 하다가 벌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 그런 패턴을 따르지 않는 경우는 스토킹과 명예훼손, 음란 노래 제작 및 배포 등을 저지르고도 왕이 된 백제의 서동 이야기 정도에 불과하다.
선과 악
그런데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야기의 그러한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분류는 서서히 퇴화되었다. 지고지순한 선과 무지막지한 악이 부딪히면 마음이야 후련하겠지만 그건 초현실적인 사기다. 오늘날 우리의 균형감각은 절대선과 절대악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두 조금씩 선한 면이 있고, 모두 일부분 사악한 면이 있는 것이다. 그 복잡함이 현실이며, 이야기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두 선이 대립해 말릴 수 없거나 두 악이 대립하는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거나 선과 악의 구분 자체가 없는 대립, 이를테면 신념과 사랑이 상호배타적일 때, 양심과 의무가 서로 충돌할 때, 때와 장소가 안타까이 어긋날 때 빚어지는 갈등은 우리를 매우 심오한 망설임으로 인도한다. 비록 조금 불편할지언정 그 망설임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예술과 접촉했다는 증거다.
1995년인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당시 MT를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타란 악기라기보다는 수컷 공작의 멋진 꼬리 깃털 같은 것이었다. 손가락을 지네발처럼 놀려 줄을 튕기면 예쁜 여학생들이 주위에 앉아 새끼고양이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 호감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기분은 무척 짜릿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몇 곡 돌린 후, 이제 이 몸이 멋들어지게 독창 한 곡 뽑을 차례였다. 다들 배시시 웃으며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좀 이상한 선택을 했다.
조정희 <참새와 허수아비> (출처: VIBE)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이름도 모르는 노란 참새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느릿느릿하게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며 부른 노래는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당연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래도 어쩔 텐가, 나는 끝까지 불렀다. 왠지 모를 오기에 2절까지 불렀다. 적당히 끊고 <매일매일 기다려>로 넘어갈 줄 알았던 친구들이 하나둘 궁둥이 털고 일어나 “형서 실망이야.” 하고는 돌아섰다. 사실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야말로 평소 내 주제가였다. <매일매일 기다려>가 박형서고 박형서가 <매일매일 기다려>였다. 특히 후렴구의 ‘매일매일 기다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라 기다리다 짜증 폭발한 태도로 부를 때면 모두 기립박수로 열광했다. 나한테 바라는 게 그 하나뿐이었던 친구들을 내가 배반한 것이었다.
노래 한 곡 잘못 골랐다고 단박에 외톨이가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걔네들은 그냥 무식하니까, 그래서 <참새와 허수아비>의 아름다운 갈등 구조를 이해 못하니까.
들판에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 허수아비 앞에 참새가 날아왔다. 허수아비는 새를 쫓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하필 그 노란 참새가 좋아진 것이다. 이제 어째야 할까? 뭘 어째, 내쫓아야지. 그게 의무니까, 그게 허수아비라는 자신의 존재 이유니까. 눈앞의 참새를 쫓아내지 않으면 자신은 허수아비가 아니고, 허수아비가 아닌 허수아비로는 사랑은커녕 그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으니까.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그 슬픔도 이해 못하는 너희들은, 차라리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 멀리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결혼해서 아이가 생겼다. 어어 하는 순간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말대꾸도 하고 혼자 닭다리도 뜯었다. 그렇게 네 살이 되던 해, 하루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가 말했다.
“아빠가 노래 불러줄까?”
“응, 하고 싶으면 해.”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노란 참새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당장 일어나 가버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정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얘가 지금 조나? 그래서 이 슬픈 음조가 자장가로 들리나?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날 찾아 날아온 널
보내야만 해야 할 슬픈 나의 운명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넘어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석양에 노을이 물들고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노오란 참새는 날 찾아 와주겠지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넘어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 님은 아시겠지
- 조정희의 노래 <참새와 허수아비> 중에서 -
끝까지 불렀다. 그때까지 눈만 깜박거리고 있어서 무슨 네 살배기가 이 노래를 얌전히 듣지, 하는데 슬그머니 일어나 가버리기에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한참 후 거실로 나가보니 아이가 소파 옆에 쪼그려 앉아 빌런의 성장기 씬처럼 인형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중이었다. 그런데 뭔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단어도 순서도 조금 틀렸지만, 분명히 아까 내가 불러준 노래였다. 나는 나는 지파라기 허슈아비…….
아빠, 하고 나에게 물었다. “허슈아비가 왜 슬퍼?”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뉘앙스가 달랐다. ‘노란 참새는 병아리를 잘못 본 거 아니야?’ 같은 걸 물었다면 그야말로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허수아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숙명에 정확히 공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딱 그랬다. 혹시 감수성 천재인가, 하고 흠칫 놀랐다.
“응, 그건 말이야.”
벅찬 감동에 젖어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 옛날에 각 잡고 열심히 불렀던 노래는 사실 이십 년 후에야 태어날 내 딸한테 불러준 게 아니었을까? 내가 때와 장소를 오판했다고 비난한 너희들, 너희들이 틀렸다. 난 너희들에게 들려준 게 아니야. 그때 그 자리에 잘못 끼어든 건 내 노래가 아니라 너희들 매정한 궁둥이였어.
입을 열어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프레드 루선스의 갈등 분류에 의하면…….”
[당신은 어떤‘가요’] 때와 장소의 갈등 구조 -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기타는 이정선, 입문자를 위한 기타 교실
소설가,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전공 교수
1972년 강원도 춘천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지은 책으로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핸드메이드 픽션], [끄라비], [낭만주의], [새벽의 나나], [당신의 노후] 등이 있음.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때와 장소의 갈등 구조 –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기타는 이정선, 입문자를 위한 기타 교실
임현
고운 음성도 아니요, 곡조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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