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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용아를 찾아서

용아 박용철 생가

인문쟁이 조온윤

2019-08-29


광주 광산구에는 지상과 지하로 모두 열차가 지나다니는 동네가 있다. 땅 위로는 기차가, 땅 밑으로는 지하철이 다닌다고 하니 빌딩과 인파가 많고 시끄러운 곳일 것 같지만, 이곳은 의외로 높은 건물도 별로 없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곳곳에서는 아직 시골의 정취가 느껴지는 작은 논밭과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을 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광산구가 광주시로 통합되고 행정구역 명칭도 리가 아닌 동이 붙게 된 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광주의 어르신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송정리, 소촌리라는 이름들로 더 익숙한 곳으로 남아있다. 열차가 이따금씩 굉음과 함께 풍경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며 지나가곤 하는데, 그럼에도 묘하게 고요하고 느릿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곳 광산구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한 시인이 태어나 자랐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시인이 살았던 그 집은 현재 광주의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솔머리마을 골목 풍경 / 담벼락에 적인 글 '차 천천히 조심해'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솔머리마을 골목의 풍경 ⓒ조온윤



어떤 시인이 태어나 살던 집, 용아생가



그렇다면 시인의 집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러 가는 이곳 역에서 조금 방향을 틀어 걸어가다 보면 차와 사람이 더욱더 드물어지는 한적한 동네가 나온다. 지형이 솥뚜껑처럼 완만해서 예부터 솔머리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그 동네는 조선 중기 문신인 눌재 박상과 그의 일가가 터를 잡고 모여 살기 시작하며 이룬 충주 박씨 집성촌이었다. 박상의 먼 후손으로서 솥머리마을에서 태어나 광주 광산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그 시인은, 우리에게는 ‘용아(龍兒)’라는 호와 시 「떠나가는 배」의 작자로도 유명한 박용철이다. 그리고 그곳 솥머리마을에서 유일하게 지붕에 볏짚을 이고 있는 집이 박용철 시인의 생가인 ‘용아생가’이다.


광산구 용아 생가 전경 / 월간청년

 

안에서 본 용아 생가 마당

▲ 광산구에 위치한 용아생가 풍경 ⓒ조온윤 


용아생가는 19세기 말 박용철 시인의 고조부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 초가로 된 그의 생가를 보고 그가 가난한 시인의 삶을 살다 갔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그는 마을에서 유명한 부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가 여전히 초가집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집안사람들이 초가지붕을 내리고 기와집으로 증축하려던 것을 박용철 시인이 초가 위로 보름달이 뜨면 그 풍경이 참 아름답지 않냐며 그대로 두자고 만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용아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되었다가, 다시 원형이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됐다.


용아 생가 사랑채

▲ 용아생가의 사랑채 ⓒ조온윤

 

용아생가 안채 모습

▲ 용아생가의 안채 ⓒ조온윤

 

용아생가의 창고 기둥. 휘어져 있다.

▲ 용아생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는 휘어진 창고 기둥 ⓒ조온윤


박용철 시인은 앞서 말한 것처럼 1904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마을 유지의 자제로 태어났다. 시인의 두 형이 모두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부모님의 각별한 애정 속에서 자라게 된다. 한 일화로 어려서부터 시인은 영화(당시에는 ‘활동사진’이라고 했다)보기를 좋아해서 자주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어린 시인을 시내에 있는 극장까지 하인의 등에 업고 다녀오게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시절에 자식의 학업을 위해 그를 서울로 상경시키고 일본 유학까지 보냈을 정도이니, 시인의 부모님이 아들 박용철에게 거는 기대와 애정이 무척 컸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용철 시인의 모습을 담은 입간판

 

박용철 시인의 모습을 담은 입간판

▲ 박용철 시인의 모습을 따서 만든 입간판 ⓒ조온윤



문예동인지 ‘시문학’을 만들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장차 훌륭한 수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를 받았으나, 일본 유학 중에 영랑 김윤식을 만나 그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으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희곡과 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의 시와 외국 번역시, 그리고 자신의 대표작이 될 「떠나가는 배」를 실은 문예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한다. 박용철 시인이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던 『시문학』은 3호까지 발행되었으며, 창간호 이후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허보, 신석정 등의 문인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시문학파’를 이루게 된다.


용아생가 사랑채 마루

▲박용철 시인과 김영랑 시인이 이곳 사랑채 마루에 앉아 

자주 시에 관한 이야길 나눴다고 한다 ⓒ조온윤

 

시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박용철 시비 /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시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박용철 시인의 시비가 마당에 있다 ⓒ조온윤


문예동인지 『시문학』은 비록 3호까지밖에 발행되지 못했으나, 1920년대에 정치적인 문학 활동을 펼쳤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탈리아예술가연맹)에 반발하여 언어예술로서의 순수문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시문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박용철 시인은 이후로도 『문예월간』과 『문학』이라는 문예지를 창간하면서 소설과 희곡 등으로 저변을 넓혀가는 한편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집을 발행하기도 하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시문학파로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는 35세가 되었던 1938년 봄, 너무 이른 나이에 그만 폐결핵으로 타계하고 만다.

 

문구: 문학의 서읿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식히는 길이다. 1930 시문학 창간호 편집후기

▲『시문학』 창간호 편집 후기의 일부가 적혀있는 배 모양 조형물 ⓒ조온윤


그는 생전에 생활이 어려운 친구를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사재를 털어서 동료 시인들의 작품집을 발행하는 등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도와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작품집을 내지는 못하고 삶을 마감하고 만다. 박용철 시인의 첫 작품집은 그가 타계하고 4년 뒤에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임정희 여사와 동료 문인들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우선하기보다는 동료들의 문학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 더욱더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이다.


송정공원의 박용철 시비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박용철 시인의 또 다른 시비 ⓒ조온윤

 

송정공원역 문학관 내부 모습 / 편히 쉬어가세요, 서정시인 김영랑

▲송정공원역에는 박용철, 김영랑, 김현승 등 

호남의 대표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 문학관도 있다. ⓒ조온윤


오래 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이 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매일 오가는 지하철역 한쪽에 그를 기념하는 작은 문학관이 있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어떤 시인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심을 갖게 된 건 2년 전 친구들과 ‘공통점’이라는 독립잡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에 대학생이었던 우리들이 잡지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박용철 시인이 90여 년 전에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문우들과 동인문예지를 창간한 시인이라는 것을,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시인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보다 더 어려움이 많았을 시대에 누군가는 이미 내가 주저하고 있는 일들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용철 시인이 시인과 희곡작가, 잡지의 창간인으로서 우리나라 문학사에 남겨놓은 족적은 매사에 겁을 내고 있던 내게 어떤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것 같다.


광주공원에 있는 박용철과 김윤식 시인 시비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을 기리는 시비도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서 볼 수 있다. ⓒ조온윤


광주에서는 박용철 시인을 기리는 기념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생전에 그가 남긴 것들이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증거일 테다. 하지만 사람들이 좀처럼 시를 읽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고 그의 생가를 찾아오는 이들도 점점 적어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이력보다 동료 문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손수 문예지를 만들어 수많은 시들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 용아 박용철의 삶을 더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의 삶만큼이나 아름다운 그의 시들도 더 많은 이들에게 닿을 수 있었으면 한다.


당신은 웃으십니다

이제

살아보려 한다는 내 말을 듣고

방울같이

맑게 울리는 소리로

새삼스럽다

나의 이 큰 결심을 비웃습니다


살아본 일이 없다는 말에는

엄청난다는 듯이 높이 웃으십니다


삶이란 한낱 헛된 그림자라 할 때에

퍼지는 햇발같이 자유스러이

그대는 나를 비웃었습니다


(너도 이런 것을 아는 날이 올까보아

나는 한갓 두려워한단다)


_ 용아 박용철, <失題> 전문


○ 참고 도서『용아 박용철의 예술과 삶』, 공저(2002, 광산문화원 발행)

○ 사진 촬영_ⓒ조온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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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권 조온윤
인문쟁이 조온윤

2019 [인문쟁이 5기]


생활 속에서 틈틈이 시를 쓰며 지냅니다.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을 좋아합니다.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멈춰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침묵과 정지. 그런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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