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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전국 팔도 시민 기자단이 보고 들은 인문 현장

그 옛날의 아픔과 함께할 우리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2019.01.31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외관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외관


대구광역시 중구,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는 잊어서는 안 될 그 옛날의 아픔이 서려 있다. 일본은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군인의 사기를 높이겠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를 운영했다. 조선의 여성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집을 나섰다. 그러나 도착지가 위안부임을 알았을 때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이들은 군 위안소라는 지옥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광복 후에도 지금까지 이들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위안부 역사가 기록된 전시실 모습

▲위안부 역사가 기록된 전시실 모습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위안부 피해의 실상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 아래의 조선 여성들은 민족, 계급, 성별 등 구조적 차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본은 공장의 일자리를 약속하는 등 온갖 거짓으로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갔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곳은 공장이 아닌 전쟁터의 군 위안소였다. 


전쟁이 끝나고, 광복을 맞이하고 한반도에는 기쁨이 만개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만큼은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인권을 짓밟은 잔악 행위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아무도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분노의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대한 신문 기사  치 떨리는 만행, 국내 첫 공개 公開 칸막이 방서 하루 서너 명 상대  전선 戰線의 노리개 “짓 밝힌 17세”  김학순할머니는 정신대자체를 부인하는 일본 정부를 고발하여 증언에 나섰다고 말했다.   정신대 피해자가 광복 46년 만에 처음으로 일제의 잡학 성을 고발하고 나섰다. 김학순 할머니(67세 서울) 종로구 총신동의는 중일전쟁의 와중인 1940년경 최전방이었던 중국 중부의 철벽진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2~3개월을 치욕 속에 보냈던 장본인. 14일 여성단체 연합사무실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마련한 기자회견에 나온 그는 당한 것 만해도 치가 떨리는 데 일본사람들이 정신대라는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다고 밝혔다. 1924년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개가 양부의 손에서 자라다 14세부터 평양 기생원에 다녔다. 17세 되던 해에 양부와 함께 만주로 간 김할머니는 일본군에게 잡혀 관군의윈부 생활을 하  그는 중국인이 버리고 간 오두막에서 다른 4명의 조선 여성과 함께 일본군 3백 명의 위생적인 성욕 처리 도구 역할을 맡았다. 17~22세에 이르는 조선 여성 5명은 천으로 칸막이를 친 방에서 하루 3~4명의 일본군을 상대했으며 부대에서 갖다 주는 쌀, 부식으로 연명하고 옷은 군복이든 중국옷이든 가리지 않고 입었다고 김 씨는 증언했다. 이들은 1주일에 1회 군의관으로부터 위생 결사를 받았으며 군인들은 위안소에 출입할 때마다 1원을 지불했다고 했지만 한 번도 돈을 받아본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면 기어코 쫓아와 울면서 당하곤 했어요. 그때 내 나이 열일곱이었지요.”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해는 김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 3개월여 만에 조선인 상인 조원찬씨를 만나 천신만고 끝에 기적으로 탈출했다. 자신을 구해준 조씨와 함께 정차하여 1남 1녀를 낳고 그런대로 오붓하게 살다가 해방 이듬해 광복군이 탄 배에 편습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서울 장층단 숭요서에서 홍역으로 4살짜리 딸을 잃은데 이어 53년엔 남편을, 55년에는 아들마저 숨져 지금껏 혼자 살아왔다. 그는 요즘 4백만 원짜리 전세방에서 거주하며 동회에서 다달이 주는 쌀 10kg과 3만 원 취로사업장에서 일 해 버는 1만원으로 연명하고 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의 증언은 '위안부 피해 첫 공개'라는 가치를 부여받으면서 온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김학순은 부끄러워하기보다 분노했으며 자신이 겪은 2차 피해보다는 가해해자가 죄값을 치르지 않을 것을 더욱 염려하였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대한 신문 기사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1991년, 마침내 그 목소리가 세상에 울렸다. 그 이전에도 피해 사실을 알리고자 한 분들이 있었으나 쉽게 알려지지 않았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혔고, 당당히 분노했다. 이를 따라 할머니가 된 그 시절의 여러 어린 여성들은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며 목소리를 더했다. 오늘날에도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아픔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할망정 각종 2차 가해가 도사리고, 사회는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본다. 공개 증언으로 인해 자신이 받게 될 부당한 피해보다 일본의 죄를 기록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더 간절히 바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의 짓이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일본의 범죄 행위는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고, 비로소 많은 사람이 위안부 피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역사의 증언 - 6인의 기록 2015

▲역사의 증언 - 6인의 기록 2015


역사관에 마련된 ‘역사의 증언 - 6인의 기록 2015’ 영상에는 여섯 명의 할머니들이 등장한다.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낱낱이 토해내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위안부 이후 평생토록 지고 온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


할머니들의 당당한 분노 이후 많은 사람이 역사를 기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거리에 나서기도 하고, 각자의 재능으로 상품을 만들어 모금하기도 한다.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역시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신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기탁금 5천만 원을 씨앗 삼아 여러 시민의 성원으로 개관했다.


그녀들의 용기, 우리들의 #WITHYOU

▲함께 걸어 나가야 할 길


50년의 어둠을 뚫고 용기를 내 세상 앞에 나선 할머니들의 강인함은 변화를 불러왔다. 끝까지 범죄 사실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파렴치한 태도에도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 오늘도 할머니들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로 평화를 외치고 있다. 특히나 여성 인권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향해 무거운 한 발짝 한 발짝을 떼고 있다. 우리는 함께 할머니들의 삶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록하고,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 일본의 어떠한 조치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는 지워질 수 없다. 범죄 사실의 인정과 진실한 사과, 그리고 역사의 판결을 고개 숙여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일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이 하루라도 빨리, 아주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길 바란다. 


관람시간

화요일~토요일 10시~18시 / 일요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2000원 / 청소년, 장애인, 65세 이상 노인 1000원 / 어린이 무료


사진=김상협

장소정보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50 2층 희움
인문360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대구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위안부역사관 일본위안부 희움위안부역사관
인문쟁이 4기 김상협
인문쟁이 김상협
2018 [인문쟁이 4기]


어릴 때 다른 사람이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한 사람이라며 자라왔다. 꿈이 곧 직업이다는 말을 싫어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지만 레크레이션 강사, 태권도 사범 등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헌혈 100회, 봉사활동 1000시간을 하며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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