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주사적공원. 같은 지역(대전광역시)에 위치한 우암사적공원(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송시열이 머무르던 장소)에 비해 알려진 곳은 아니다. 나 또한 대전에 5년간 살면서 처음 들어본 장소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촌마을에서 시작된 대전시의 역사 속 알려진 인물들은 우암 송시열과 송준길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곳보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 공간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창주사적공원은 나의 흥미를 끌었다. 또 지도상으로는 그 면적이 넓어 우암사적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스를 탔다.
우선, 창주(滄洲)는 조선시대 고위관리였던 김익희(金益熙, 1610-1656)의 호이다. 그는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소현 세자를 호위한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맞서 싸운 김익겸(金益兼)의 형이다. 역사책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던 인물은 아니기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호는 물론이고 이름도 생소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창주사적공원을 가는 길은 ‘숨겨져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공원이 독자적인 공간을 제공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대전교육과학연구원을 거쳐 도착하거나, 과학연구원과 대전교육정보원의 사잇길을 이용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공간 속의 공간인 셈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과학연구원을 정면으로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주차장과 건물 후면이 보이는 길을 걸으며 ‘이게 정말 맞는 길인가’하는 의문이 여러 번 들었다. 사잇길 역시 건물 내부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김익희의 묘 표지판 1 ⓒ노예찬
▲김익희의 묘 표지판 2 ⓒ노예찬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
뜻하지 않게 ‘연구원 구경’을 했지만 길을 따라 걸으면 오래된 건물의 모습이 등장한다. 옛날부터 그 자리를 지킨 나무를 지나면 ‘창주사적공원’이라 적힌 녹슨 입간판이 보인다. 흘러내리는 녹자국과 조금 엇나간 입간판만으로 동떨어진 장소의 외로움을 엿보는 듯했다. 입구에는 조그만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현재 모습과 과거 많은 사람이 말에서 내렸을 당시의 상황이 대비되었다. 쓸쓸함이 묻어났다.
▲청주사적공원의 녹슨 입간판 ⓒ노예찬
창주 김익희는 조선시대 학자로 1633년(인조1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후 대사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의 입장에 서서 청나라와의 화평을 반대했다. 그리고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전투를 독려하고 감독하는 독전어사의 자리에 오른다. 2017년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청나라와 항전을 벌어야 한다는 김상헌 세력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의 입장은 같은 지방에서 태어난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따라야한다는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란 이후 눈에 띄는 행보는 단종의 복위에 관련된 일이다. 부제학 재직 시절이던 1653년, 노산군의 묘소에 제사 지낼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하게 만든 장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혼란스러운 조선 사회에 태어나 인조반정을 필두로 이괄의 난과 두 번의 호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다.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주자학의 명분론을 기초로 극복하고자 힘썼던 사람이었다.
▲ 하마비 ⓒ노예찬
하마비를 통과하면 우암 송시열이 세우고, 김진규와 김시습이 글을 썼다는 신도비(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와 묘비가 보인다. 원래 묘비는 무덤 앞에 세웠으나, 현재는 보존을 위해 지붕이 있는 신도비 묘각 아래로 옮겨졌다. 이 신도비각 앞에는 긍사재가 위치하고 있다. 묘소 아래 조성한 재실(齋室)인데 과거 이곳에서는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목욕재계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건물 지붕 합각에 쓰인 예(禮) 자를 보며 김익희의 삶과 정신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긍사재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조그마한 다리와 김익희의 묘가 위치한다. 이렇게 묘까지 둘러보면 창주사적공원의 전부를 본 것이다. 무언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공원은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 멀리 보이는 창주사적공원 ⓒ노예찬
▲긍사재 건물 지붕에 쓰여진 '禮' ⓒ노예찬
공간의 아쉬움
대전광역시 송촌동의 동춘당과 위에서 언급한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 남간정사. 동춘당의 경우, 인근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여 도시공원으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룬 유의미한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예다. 우암사적공원과 남간정사는 공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봄에는 벚나무와 봄꽃이 만개해 시민들에게 꽃구경 장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창주사적공원과 우암사적공원의 차이는 공원의 주인공에 있다. 송시열과 송준길 그리고 김익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을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전략일지 모르겠다. 이야기도 풍부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주인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더라도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면, 입소문을 타고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사적공원이라는 타이틀을 쓰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김익희라는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도 얻을 수 있을 게 많지 않다. 위치는 바꿀 수 없기에, 이 문제는 아쉬운 채로 남길 수밖에 없다. 다만 긍사재라는 건물과 김익희라는 인물의 스토리텔링을 발전시켜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략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공간은 너무 좁았고,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다. 단지 ‘공원’이라 이름만 붙인다고 관심을 가질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오늘도 초심을 잡는다. 나는 왼쪽이 현저하게 부족했지만, 그것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왼손은 조금씩 나의 오른손을 파고들었다. 나의 두 손이 깍지를 낀 것 처럼, 아무런 느낌없이. 처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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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속의 공간, 그 아쉬움에 대해
창주사적공원
인문쟁이 노예찬
2019-09-19
▲ 창주사적공원 내부 길 ⓒ노예찬
창주사적공원. 같은 지역(대전광역시)에 위치한 우암사적공원(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송시열이 머무르던 장소)에 비해 알려진 곳은 아니다. 나 또한 대전에 5년간 살면서 처음 들어본 장소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촌마을에서 시작된 대전시의 역사 속 알려진 인물들은 우암 송시열과 송준길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곳보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 공간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창주사적공원은 나의 흥미를 끌었다. 또 지도상으로는 그 면적이 넓어 우암사적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스를 탔다.
우선, 창주(滄洲)는 조선시대 고위관리였던 김익희(金益熙, 1610-1656)의 호이다. 그는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소현 세자를 호위한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맞서 싸운 김익겸(金益兼)의 형이다. 역사책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던 인물은 아니기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호는 물론이고 이름도 생소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창주사적공원을 가는 길은 ‘숨겨져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공원이 독자적인 공간을 제공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대전교육과학연구원을 거쳐 도착하거나, 과학연구원과 대전교육정보원의 사잇길을 이용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공간 속의 공간인 셈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과학연구원을 정면으로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주차장과 건물 후면이 보이는 길을 걸으며 ‘이게 정말 맞는 길인가’하는 의문이 여러 번 들었다. 사잇길 역시 건물 내부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김익희의 묘 표지판 1 ⓒ노예찬
▲김익희의 묘 표지판 2 ⓒ노예찬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
뜻하지 않게 ‘연구원 구경’을 했지만 길을 따라 걸으면 오래된 건물의 모습이 등장한다. 옛날부터 그 자리를 지킨 나무를 지나면 ‘창주사적공원’이라 적힌 녹슨 입간판이 보인다. 흘러내리는 녹자국과 조금 엇나간 입간판만으로 동떨어진 장소의 외로움을 엿보는 듯했다. 입구에는 조그만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현재 모습과 과거 많은 사람이 말에서 내렸을 당시의 상황이 대비되었다. 쓸쓸함이 묻어났다.
▲청주사적공원의 녹슨 입간판 ⓒ노예찬
창주 김익희는 조선시대 학자로 1633년(인조1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후 대사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의 입장에 서서 청나라와의 화평을 반대했다. 그리고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전투를 독려하고 감독하는 독전어사의 자리에 오른다. 2017년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청나라와 항전을 벌어야 한다는 김상헌 세력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의 입장은 같은 지방에서 태어난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따라야한다는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란 이후 눈에 띄는 행보는 단종의 복위에 관련된 일이다. 부제학 재직 시절이던 1653년, 노산군의 묘소에 제사 지낼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하게 만든 장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혼란스러운 조선 사회에 태어나 인조반정을 필두로 이괄의 난과 두 번의 호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다.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주자학의 명분론을 기초로 극복하고자 힘썼던 사람이었다.
▲ 하마비 ⓒ노예찬
하마비를 통과하면 우암 송시열이 세우고, 김진규와 김시습이 글을 썼다는 신도비(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와 묘비가 보인다. 원래 묘비는 무덤 앞에 세웠으나, 현재는 보존을 위해 지붕이 있는 신도비 묘각 아래로 옮겨졌다. 이 신도비각 앞에는 긍사재가 위치하고 있다. 묘소 아래 조성한 재실(齋室)인데 과거 이곳에서는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목욕재계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건물 지붕 합각에 쓰인 예(禮) 자를 보며 김익희의 삶과 정신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긍사재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조그마한 다리와 김익희의 묘가 위치한다. 이렇게 묘까지 둘러보면 창주사적공원의 전부를 본 것이다. 무언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공원은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 멀리 보이는 창주사적공원 ⓒ노예찬
▲긍사재 건물 지붕에 쓰여진 '禮' ⓒ노예찬
공간의 아쉬움
대전광역시 송촌동의 동춘당과 위에서 언급한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 남간정사. 동춘당의 경우, 인근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이점을 활용하여 도시공원으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룬 유의미한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예다. 우암사적공원과 남간정사는 공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봄에는 벚나무와 봄꽃이 만개해 시민들에게 꽃구경 장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창주사적공원과 우암사적공원의 차이는 공원의 주인공에 있다. 송시열과 송준길 그리고 김익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을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전략일지 모르겠다. 이야기도 풍부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주인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더라도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면, 입소문을 타고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사적공원이라는 타이틀을 쓰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김익희라는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도 얻을 수 있을 게 많지 않다. 위치는 바꿀 수 없기에, 이 문제는 아쉬운 채로 남길 수밖에 없다. 다만 긍사재라는 건물과 김익희라는 인물의 스토리텔링을 발전시켜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략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공간은 너무 좁았고,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다. 단지 ‘공원’이라 이름만 붙인다고 관심을 가질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 김익희의 묘 ⓒ노예찬
▲ 신도비각 ⓒ노예찬
○참고 자료
『국조보감』
한국민족문화대사전, “김익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228
2018, 율곡학 인물들, 율곡학사업 http://yulgok.geeo.kr/wordpress/2019/01/07/character-3-2_060-2/
└ 송인창, 「창주 김익희의 도의사상」, 『한국사상사학』 20권, 2003
└ 지두환, 「창주 김익희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37, 2012
○사진 촬영_ⓒ노예찬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5기]
오늘도 초심을 잡는다. 나는 왼쪽이 현저하게 부족했지만, 그것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왼손은 조금씩 나의 오른손을 파고들었다. 나의 두 손이 깍지를 낀 것 처럼, 아무런 느낌없이. 처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쓰자.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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