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새벽. 아직 여명이 밝아오기 전이다. 임금(고종)과 왕세자(순종)는 경복궁에서 궁녀로 변신한다. 그리고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겼다. 이후 어둠을 틈타 영추문을 통해 황급히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임금이 탄 가마의 목적지는 러시아공사관이다. 사극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사실(史實)이다. 고종실록 34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임금과 왕태자(王太子)는 대정동(大貞洞, 지금의 중구 정동)의 러시아공사관(俄國公使館)으로 주필(駐蹕, 임금이 잠시 머무름)을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김)하였고,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비(王太子妃)는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에 이어하였다”는 내용이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역사적 사실이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아관파천 122년 만에 열린 ‘고종의 길’
▲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이재형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배웠다. 아관(俄館)은 러시아공사관, 파천(播遷)은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거처를 옮긴다’는 뜻이다. 역사 선생님이 아관파천이 입시문제에 자주 나온다고 했기에 전후 배경도 잘 모르고 그냥 외웠던, 역사의 한 퍼즐 조각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피신했던 문은 오랫동안 꼭꼭 닫혀 있었다. 그리고 2016년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복원 사업을 시작해 2018년 10월 122년 만에 그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길에는 ‘고종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여름 땡볕이 뜨거운 날, 광복절을 앞두고 ‘고종의 길’을 찾았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돌담길 앞에 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일제 감시를 피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비밀 통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작해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길이 120m, 폭 3m의 짧은 길이다. 덕수궁(대한문)에서 시립미술관을 지나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니 ‘고종의 길’ 안내판이 보인다.
▲ 덕수궁 서북쪽에 있는 ‘고종의 길’ 입구 ⓒ이재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이유
고종은 왜 꼭두새벽에 가마를 타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갔을까?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때문이다. 을미사변은 궁궐 한 복판에서 조선의 국모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사건이다. 고종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조선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는 고종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자국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이 피신했던 그 길은 힘없는 나라의 왕이 선택한 슬픈 길이다. 그날 고종과 왕세자는 비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고종의 길’을 걸으며 그 모습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슬펐다. 내가 결혼 전 아내와 데이트하며 걷던 덕수궁 돌담길은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알고 걷는 ‘고종의 길’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120m의 짧은 길에는 질곡의 역사가 담겨 있다.
▲ ‘고종의 길’에 있는 선원전은 복원 중이다. ⓒ이재형
‘고종의 길’로 들어서면 우측에 선원전 영역이 보인다. 선원전은 왕들의 어진(御眞, 왕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던 자리다. 여기에는 일본풍의 가옥이 한 채 있다. 일제시대 조선저축은행 사택이다. 철거를 위해 쳐진 가림막에는 1900년대 당시 조선저축은행 사택 사진이 보인다. 그 옆에는 1900년경 덕수궁 전경도 보인다. 조선저축은행 사택은 덕수궁이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조선저축은행은 철거가 예정돼 있다. 선원전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고종의 문 앞에 근무하는 안내소 직원에게 “철거하지 말고 보존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역사적인 건물이기는 하지만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철거하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지만 철거를 한다니 아쉽다.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 역사가 아닌가.
▲ 조선저축은행 사택. 철거 예정이다. ⓒ이재형
정동공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
조선저축은행 사택을 지나 걷다보니 10여 분도 채 되지 않아 정동공원으로 나가는 쪽문에 도착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이런 작은 쪽문을 통해 도망치듯 나왔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진다. 정동공원에서는 “오얏꽃 핀 날들을 아시나요”라는 포스터 문구가 인상적인,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오얏꽃(자두꽃, 李花)은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이다.
▲ 정동공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 ⓒ이재형
사진전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나왔다. 1905년이 을사년이다. 그해 11월17일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사람들은 날이 꾸무럭하여 스산하거나 쓸쓸할 때 '을사년스럽다'고들 말했다. 그날의 원통함을 잊지 않고자 날씨를 형용하는 말로 새겨 두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을사늑약을 얼마나 뼈아프게 여겼는지 100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실감하게 하는 말이다.
▲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구 러시아공사관 ⓒ이재형
정동공원 언덕 위에는 하얀 르네상스식 건물이 보인다. 성당 종탑처럼 보인다. 무슨 건물일까? 고종이 피신했던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1890년(고종27)에 준공된 벽돌 건물이다. 현재는 지하 1층과 3층만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파괴됐다고 한다. 출입 금지라 내부 관람을 못해 아쉬웠다. 이곳에서 고종은 1년간 지냈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피신한 몸으로 고종은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지냈을까? 그 마음이 아득하게나마 느껴졌다.
▲ 1900년경 덕수궁 전경(‘고종의 길’ 전시 사진 촬영) ⓒ이재형
고종은 아관파천 375일 만인 1897년 2월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짓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해 황제로 즉위했다. 1897년 10월 12일이었다. 중국과 동등한 황제국가로 위상을 격상시킨 것이다. 고종은 독립문, 파고다공원 건설 등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고종의 바람과는 달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그 후 36년간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갖은 유린과 침탈을 당했다.
‘고종의 길’, 슬프지만 잊어서는 안 될 길
고종이 황급히 피신했던 길이 국민에게 열리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에야 비로소 미국과 토지 교환을 통해 한국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땅이지만 그동안 미국대사관 부지로 사용되어 열리지 못했다. 미국 대사관과 선원전 사이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122년 만에 열린 것이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고종의 길’이 국민 품에 돌아오기까지도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 덕수궁 돌담길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고종의 길’ ⓒ이재형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된 해다. 123년 전 국력이 약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의 왕이 황급히 피신했던 ‘고종의 길’. 슬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길이다. 그리고 이 길 끝에서 이제는 맹목적인 반일이 아니라 극일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공간 정보
‘고종의 길’
구간 : 서울 중구에 있는 덕수궁 서북쪽(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120m의 길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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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의 슬픔, ‘고종의 길’을 걷다
122년 만에 열린 비운의 길
인문쟁이 이재형
2019-09-06
1896년 새벽. 아직 여명이 밝아오기 전이다. 임금(고종)과 왕세자(순종)는 경복궁에서 궁녀로 변신한다. 그리고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겼다. 이후 어둠을 틈타 영추문을 통해 황급히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임금이 탄 가마의 목적지는 러시아공사관이다. 사극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사실(史實)이다. 고종실록 34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896년(고종33년) 2월11일十一日. 上與王太子移蹕 駐御于大貞洞俄國公使館. 王太后, 王太子妃移御于慶運宮(고종실록 34권)
“임금과 왕태자(王太子)는 대정동(大貞洞, 지금의 중구 정동)의 러시아공사관(俄國公使館)으로 주필(駐蹕, 임금이 잠시 머무름)을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김)하였고,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비(王太子妃)는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에 이어하였다”는 내용이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역사적 사실이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아관파천 122년 만에 열린 ‘고종의 길’
▲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이재형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배웠다. 아관(俄館)은 러시아공사관, 파천(播遷)은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거처를 옮긴다’는 뜻이다. 역사 선생님이 아관파천이 입시문제에 자주 나온다고 했기에 전후 배경도 잘 모르고 그냥 외웠던, 역사의 한 퍼즐 조각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피신했던 문은 오랫동안 꼭꼭 닫혀 있었다. 그리고 2016년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복원 사업을 시작해 2018년 10월 122년 만에 그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길에는 ‘고종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여름 땡볕이 뜨거운 날, 광복절을 앞두고 ‘고종의 길’을 찾았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돌담길 앞에 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일제 감시를 피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비밀 통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작해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길이 120m, 폭 3m의 짧은 길이다. 덕수궁(대한문)에서 시립미술관을 지나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니 ‘고종의 길’ 안내판이 보인다.
▲ 덕수궁 서북쪽에 있는 ‘고종의 길’ 입구 ⓒ이재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이유
고종은 왜 꼭두새벽에 가마를 타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갔을까?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때문이다. 을미사변은 궁궐 한 복판에서 조선의 국모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사건이다. 고종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조선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는 고종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자국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이 피신했던 그 길은 힘없는 나라의 왕이 선택한 슬픈 길이다. 그날 고종과 왕세자는 비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고종의 길’을 걸으며 그 모습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슬펐다. 내가 결혼 전 아내와 데이트하며 걷던 덕수궁 돌담길은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알고 걷는 ‘고종의 길’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120m의 짧은 길에는 질곡의 역사가 담겨 있다.
▲ ‘고종의 길’에 있는 선원전은 복원 중이다. ⓒ이재형
‘고종의 길’로 들어서면 우측에 선원전 영역이 보인다. 선원전은 왕들의 어진(御眞, 왕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던 자리다. 여기에는 일본풍의 가옥이 한 채 있다. 일제시대 조선저축은행 사택이다. 철거를 위해 쳐진 가림막에는 1900년대 당시 조선저축은행 사택 사진이 보인다. 그 옆에는 1900년경 덕수궁 전경도 보인다. 조선저축은행 사택은 덕수궁이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조선저축은행은 철거가 예정돼 있다. 선원전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고종의 문 앞에 근무하는 안내소 직원에게 “철거하지 말고 보존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역사적인 건물이기는 하지만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철거하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이지만 철거를 한다니 아쉽다.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 역사가 아닌가.
▲ 조선저축은행 사택. 철거 예정이다. ⓒ이재형
정동공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
조선저축은행 사택을 지나 걷다보니 10여 분도 채 되지 않아 정동공원으로 나가는 쪽문에 도착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이런 작은 쪽문을 통해 도망치듯 나왔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진다. 정동공원에서는 “오얏꽃 핀 날들을 아시나요”라는 포스터 문구가 인상적인,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오얏꽃(자두꽃, 李花)은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이다.
▲ 정동공원 <대한제국의 길> 사진전 ⓒ이재형
사진전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나왔다. 1905년이 을사년이다. 그해 11월17일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사람들은 날이 꾸무럭하여 스산하거나 쓸쓸할 때 '을사년스럽다'고들 말했다. 그날의 원통함을 잊지 않고자 날씨를 형용하는 말로 새겨 두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을사늑약을 얼마나 뼈아프게 여겼는지 100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실감하게 하는 말이다.
▲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구 러시아공사관 ⓒ이재형
정동공원 언덕 위에는 하얀 르네상스식 건물이 보인다. 성당 종탑처럼 보인다. 무슨 건물일까? 고종이 피신했던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1890년(고종27)에 준공된 벽돌 건물이다. 현재는 지하 1층과 3층만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파괴됐다고 한다. 출입 금지라 내부 관람을 못해 아쉬웠다. 이곳에서 고종은 1년간 지냈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피신한 몸으로 고종은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지냈을까? 그 마음이 아득하게나마 느껴졌다.
▲ 1900년경 덕수궁 전경(‘고종의 길’ 전시 사진 촬영) ⓒ이재형
고종은 아관파천 375일 만인 1897년 2월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짓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해 황제로 즉위했다. 1897년 10월 12일이었다. 중국과 동등한 황제국가로 위상을 격상시킨 것이다. 고종은 독립문, 파고다공원 건설 등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고종의 바람과는 달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그 후 36년간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갖은 유린과 침탈을 당했다.
‘고종의 길’, 슬프지만 잊어서는 안 될 길
고종이 황급히 피신했던 길이 국민에게 열리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에야 비로소 미국과 토지 교환을 통해 한국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땅이지만 그동안 미국대사관 부지로 사용되어 열리지 못했다. 미국 대사관과 선원전 사이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122년 만에 열린 것이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고종의 길’이 국민 품에 돌아오기까지도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 덕수궁 돌담길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고종의 길’ ⓒ이재형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된 해다. 123년 전 국력이 약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의 왕이 황급히 피신했던 ‘고종의 길’. 슬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길이다. 그리고 이 길 끝에서 이제는 맹목적인 반일이 아니라 극일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공간 정보
‘고종의 길’
구간 : 서울 중구에 있는 덕수궁 서북쪽(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120m의 길
개방일 : 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 비공개)
개방 시간 : 09:00~18:00(입장마감 17:30)
전화 문의 : 02)771-9951
○ 사진 촬영_ⓒ이재형
장소 정보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아관파천의 슬픔, ‘고종의 길’을 걷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집이 집을 품다? 집이 기억을 품다!!
인문쟁이 성기낭
<아무도 인생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밀레니얼 작가 이상...
인문쟁이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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