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외곽을 감싸고 있는 대청호는 1975년에 착공하여 1980년에 완공되었다. 대청호가 착공되면서 수많은 민가가 수몰되었고 그와 함께 상당수 문화유산도 대청호 바닥으로 사라졌다. 그 가운데 다행히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장된 문화재가 있다. 오늘 소개할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다.
▲ 김정 선생의 후손인 김학구 씨가 묘터 주변을 설명해주고 있다. ⓒ양재여
필자가 찾은 충암 김정 선생 묘소 일원은 단청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뜨거운 날씨에도 김정 선생 후손인 김학구 선생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 산해당 입구로 오르는 계단 ⓒ양재여
충암 김정 선생은 조광조가 중심이었던 ‘기묘사화’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묘사화’는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조광조를 비롯해 김식, 박훈, 김정, 김구, 박세희, 기준 등 젊은 신진 관원들이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다.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데, 아무런 공도 없는 이들 또한 자리를 탐하는 일이 발생하며 조정의 질서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중종은 공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 즉 조광조를 통해 개혁 정치를 시행하게 된다. 하지만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정치로 인해 중종과의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해 훈구세력이 ‘주초위왕’ 사건을 모의하게 된다. 주초위왕은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쓴 것인데, 속뜻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기묘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훈구파가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모함이었다.
▲ 산해당 – 우암 송시열이 충암 김정의 성품을 “높은 산과 같고 넓은 바다와 같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조선 말기 양식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1980년 수몰지구(대전광역시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서 옮겨왔다. ⓒ양재여
기묘사화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충암 김정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14세에 별시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한다. 18세인 1503년 회덕의 계족산 아래 법천사에 들어가 공부하여 중종2년 1507년 22세에 증광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사림파의 성장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부재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처, 34세의 젊은 나이로 형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4개월 만에 사약을 받는다.
▲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 ⓒ양재여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대전광역시 동구 내탑동 탑산마을은 김씨만 22가구가 살았던 집성촌이었다. 그가 제주에서 사사되자 형의 차남이 시신을 수습하여 탑산마을 뒤편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6대를 이어온 김정의 종가는 1978년 대청댐 담수를 앞두고 묘소를 비롯하여 사당. 강당, 은진 송씨 정려각, 신도비 등 충암의 사적을 신하동 욧골(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형의 차남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지금까지 일대를 보존하고 있다.
▲ 충암 김정 묘소의 백비 – 사약을 받고 사사했기에 비석을 세울 수도 글자를 새겨 넣을 수도 없었다. ⓒ양재여
산해당을 지나 뒤편의 언덕길로 올라가면 김정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충암 김정의 묘소 옆에는 아무런 글씨도 기록되지 않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땅에 묻혀 있다가 500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사약을 먹고 사사했기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도, 글을 새겨 넣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비석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백비), 다만 무덤 옆에 묻어 두었다. 비석은 묘를 이장할 때조차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후에 대청댐 물이 들었다 나기를 반복하고, 이에 비석을 덮고 있던 흙이 조금씩 쓸려나가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 김정 선생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양재여
이곳은 김정 선생 위패를 모신 곳이다.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다. 곁을 지나면서 담장 너머로 안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충암 김정 선생은 돌아가신 뒤 270년이 지난 1790년 정조 14년에 불천위를 받았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특별히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다.
▲ 충암 김정 선생 부인 은진 송씨 정려문 ⓒ양재여
이곳은 충암 김정 선생 부인 은진 송씨 정려문이다. 1521년도에 제주도에서 선생이 사사된 후, 부인 또한 선생을 따라 자결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시어머니가 살아계시기에 봉양한다. 송씨는 시어머니가 별세한 후, 8일 동안 음식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은 열녀문을 세워 그의 넋을 기렸다.
마치며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헛헛함을 느꼈다. 이곳은 '대청호 오백리길'이란 이름으로 대전을 대표할 만큼 유명하고, 많은 이가 찾고 있다. 하지만 대청댐의 건설로 실향민의 공간과 긴 시간을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물속에 잠겨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대전의 골목 골목을 거닐고 대전의 잊혀져가는 곳을 기록하고 대전의 축억을 기록하는 대전을 사랑하는 아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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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 오백리길에서 만나는 충암 김정 선생 묘소
기묘사화의 대표적 인물, 충암 김정 선생의 흔적
인문쟁이 양재여
2019-08-22
▲ 충암 김정 선생 묘소 – 대청호가 수몰되면서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양재여
대전광역시 외곽을 감싸고 있는 대청호는 1975년에 착공하여 1980년에 완공되었다. 대청호가 착공되면서 수많은 민가가 수몰되었고 그와 함께 상당수 문화유산도 대청호 바닥으로 사라졌다. 그 가운데 다행히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장된 문화재가 있다. 오늘 소개할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다.
▲ 김정 선생의 후손인 김학구 씨가 묘터 주변을 설명해주고 있다. ⓒ양재여
필자가 찾은 충암 김정 선생 묘소 일원은 단청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뜨거운 날씨에도 김정 선생 후손인 김학구 선생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 산해당 입구로 오르는 계단 ⓒ양재여
충암 김정 선생은 조광조가 중심이었던 ‘기묘사화’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묘사화’는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조광조를 비롯해 김식, 박훈, 김정, 김구, 박세희, 기준 등 젊은 신진 관원들이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다.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데, 아무런 공도 없는 이들 또한 자리를 탐하는 일이 발생하며 조정의 질서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중종은 공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 즉 조광조를 통해 개혁 정치를 시행하게 된다. 하지만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정치로 인해 중종과의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해 훈구세력이 ‘주초위왕’ 사건을 모의하게 된다. 주초위왕은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쓴 것인데, 속뜻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기묘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훈구파가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모함이었다.
▲ 산해당 – 우암 송시열이 충암 김정의 성품을 “높은 산과 같고 넓은 바다와 같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조선 말기 양식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1980년 수몰지구(대전광역시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서 옮겨왔다. ⓒ양재여
기묘사화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충암 김정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14세에 별시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한다. 18세인 1503년 회덕의 계족산 아래 법천사에 들어가 공부하여 중종2년 1507년 22세에 증광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사림파의 성장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부재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처, 34세의 젊은 나이로 형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4개월 만에 사약을 받는다.
▲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 ⓒ양재여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대전광역시 동구 내탑동 탑산마을은 김씨만 22가구가 살았던 집성촌이었다. 그가 제주에서 사사되자 형의 차남이 시신을 수습하여 탑산마을 뒤편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6대를 이어온 김정의 종가는 1978년 대청댐 담수를 앞두고 묘소를 비롯하여 사당. 강당, 은진 송씨 정려각, 신도비 등 충암의 사적을 신하동 욧골(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형의 차남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지금까지 일대를 보존하고 있다.
▲ 충암 김정 묘소의 백비 – 사약을 받고 사사했기에 비석을 세울 수도 글자를 새겨 넣을 수도 없었다. ⓒ양재여
산해당을 지나 뒤편의 언덕길로 올라가면 김정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충암 김정의 묘소 옆에는 아무런 글씨도 기록되지 않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땅에 묻혀 있다가 500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사약을 먹고 사사했기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도, 글을 새겨 넣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비석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백비), 다만 무덤 옆에 묻어 두었다. 비석은 묘를 이장할 때조차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후에 대청댐 물이 들었다 나기를 반복하고, 이에 비석을 덮고 있던 흙이 조금씩 쓸려나가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 김정 선생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양재여
이곳은 김정 선생 위패를 모신 곳이다.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다. 곁을 지나면서 담장 너머로 안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충암 김정 선생은 돌아가신 뒤 270년이 지난 1790년 정조 14년에 불천위를 받았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특별히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다.
▲ 충암 김정 선생 부인 은진 송씨 정려문 ⓒ양재여
이곳은 충암 김정 선생 부인 은진 송씨 정려문이다. 1521년도에 제주도에서 선생이 사사된 후, 부인 또한 선생을 따라 자결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시어머니가 살아계시기에 봉양한다. 송씨는 시어머니가 별세한 후, 8일 동안 음식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은 열녀문을 세워 그의 넋을 기렸다.
마치며
충암 김정 선생의 묘소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헛헛함을 느꼈다. 이곳은 '대청호 오백리길'이란 이름으로 대전을 대표할 만큼 유명하고, 많은 이가 찾고 있다. 하지만 대청댐의 건설로 실향민의 공간과 긴 시간을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물속에 잠겨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4기, 5기]
대전의 골목 골목을 거닐고 대전의 잊혀져가는 곳을 기록하고 대전의 축억을 기록하는 대전을 사랑하는 아주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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