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출판사(이하 눈빛)는 다큐멘터리 사진 전문 출판사다. 1988년 창업하여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700여 종의 책을 출간하였다. 사진 전문 출판사로서 독보적이다. 현재도 왕성하게 출판 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당분간 눈빛 출판사의 사진집 발간 기록은 깨질 수 없을 듯하다. 30년은 청년을 노인으로 만들 수 있는 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의 정신은 여전히 청년이다. 아니 더 푸르다. 필자가 방문한 날도 3권의 따끈한 사진집이 세상 밖으로 출사표를 던지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눈빛의 원동력을 탐색하고자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눈빛 출판사 이규상 선생님 핸드폰이죠?"
"네. 선생님은 아닙니다"
"아... 예... 저는 누구..."
필자의 구구절절 긴 설명을 단칼에 정리해주는 이규상 대표.
"다음주 수요일 2시에 출판사 사무실에서 뵙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망설임 없는 멘트로 통화 종료. 취재를 요청하면서 지금처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상대의 반응은 처음이다. 700여 권의 책을 교정하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간결함이 느껴진다.
눈빛 출판사는 마포구 상암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한 외국인이 예고 없이 방문해 있었다. 눈빛에서 발간된 사진집을 보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눈빛에서 출간한 사진집에 담긴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 눈꽃 출판사 이규상 대표 ⓒ최근모
"우리나라 사람은 한국적인 것을 생각할 때 아름답고 거창한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반면에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한국의 모습에 더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의식한 적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작은 것들이 외국인에게는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소재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도 살지 않으면서 상대를 압도하는 궁궐이 한국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눈빛은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간 평범하거나 약자인, 보통 사람들에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역사를 주도한 인물만이 그 시대 한국을 모두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 속에도 한국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숨어있다. 작은 것, 쉬이 놓치기 쉬운 순간에 대한 애정. 눈빛이 여전히 젊은 이유다.
인터뷰에 들어갔을 때 이규상 대표의 앞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놓여 있었다. 해야 할 말을 적어 놓은 것 같은데 단어 몇 줄 뿐이다. 그 속에서 화수분처럼 사진에 대한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눈빛에서 출간한 최민식 사진가의 '사진은 사상이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 최민식 산문집 『사진은 사상이다』 표지 ⓒ눈빛
Q. 어떤 것이 사진입니까?
사진가들은 사진이 백 퍼센트 진실을 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가장 근접한 매체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가요 가사에서조차 그 시대의 정서와 사회현상을 담고 있습니다. 하물며 사진이 그것을 담지 않고 추상성이나 예술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진 본연의 역할이 아닙니다. 미술의 영역입니다. 인문, 사회, 역사를 바탕으로 한 궁극적 매체가 사진입니다. 시대 정서, 역사성, 직접적 구체성이 사진에 담겨야 합니다. 진실이란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진입니다. 사진은 '지표'(인덱스)로서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 민주화의 아이콘 이한열 1987. 6. 9 ⓒ토니 정(정태원)
사진 출처 : 전민조 엮음, 『특종 역사를 말하는 사진』(눈빛) 중
한국전쟁을 말과 활자로 설명해도 사진 한 장에 담긴 시대의 정서와 문화의 구체성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서구는 1차대전부터 이미지의 중요성에 눈을 떴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단서로서 사진 이미지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눈빛에서 나온 한국전쟁 시리즈가 학계에 새로운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에 보람을 느낍니다.
▲ 『한국전쟁 Ⅱ』 표지 ⓒ눈빛
Q.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작업방식이 궁금합니다.
▲ 최민식 사진집 『휴먼 선집』 표지 ⓒ눈빛
작업은 진정성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한 철저한 이해, 공감, 유대가 진정성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된다면 사진에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찍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작가가 그 사람들을 작업의 소재로서만 생각한다면 그 작업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작품을 통해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거나 유명세를 얻으면 더는 작업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쪽방촌 사람들에 대한 작업입니다. IMF 때 망한 사람들이라거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시작부터 정해놓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상대에 대한 이해나 공감 없는 편견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서 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됩니다. 상대를 소재로서가 아니라 애정과 공감을 가지고 목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고민과 이해가 진정성 있는 사진을 만듭니다.
▲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30년』 표지 ⓒ눈빛
Q. 눈빛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출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단 한 컷의 걸작을 뽑아 상을 주는 사진 공모전이 문제입니다. 일반인들은 그것이 사진 작업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한 장의 걸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온 앞뒤의 맥락과 진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진집은 단편적인 게 아니라 여러 장의 맥락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이규상 대표 ⓒ최근모
사진 출판이란 책의 수미쌍관이나 기승전결처럼 여러 작의 맥락으로 이루어집니다. 작가로서 단 한 장의 걸작이 아니라, 그 걸작이 나온 전체의 맥락, 진정성이 사진집에 담겨야 합니다. 사진 전시도 맥락적인 배치가 필요한데 무질서하게 배치된 경우가 많습니다. 맥락과 진정성 없이 전시를 통한 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성이 담긴 여러 사진을 가지고 맥락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눈빛의 출판 기준입니다. 눈빛이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작가의 이름값이 아닙니다.
▲ 심규동 사진집 『고시텔』 표지 ⓒ눈빛
사진을 보는 저의 기준은 예술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진의 사회적 기능, 다시 말해 사진을 통해 사회 제반 현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사진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Q. 눈빛 출판사의 경영 방식이 궁금합니다.
어떤 전시에 갔더니 사회자가 저를 '30년 동안 사진을 해오시고, 사진으로 집을 지으시려는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낯이 뜨거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얼마나 염치없는 이야기입니까? 왜 그런가 했더니 예전에 '사진으로 집을 짓는다'라는 기사로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반대로 전달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사진집입니다. ‘사진으로 만든 책', 이 뜻인데 말입니다.(웃음)
▲ 눈꽃 출판사 서가 ⓒ최근모
경영적으로 본다면 눈빛에서 나오는 사진집의 수익은 모두 다시 사진집 출간에 들어갑니다. 거기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다만,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진집을 만드는데 돈을 아끼지는 않습니다. 책의 퀄리티는 최대한으로 합니다. 그 때문에 돈이 많아서 질 좋은 사진집을 낸다는 오해도 받습니다. 돈이 많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사진집에 쏟아붓는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저는 연금도 없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습니다. 가진 것은 사진집뿐입니다. 그게 제 자산입니다.
밤이 깊어지면 사무실 근처에 정장을 입은 분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하는 분들인가 했더니 대리운전을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투잡’을 뛰는 회사원들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퇴근 후에 대리운전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돈은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쓰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만큼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30년간 원하는 사진집을 출판하고 있고 저희 가족도 배곯지 않고 잘 살아왔으니 눈빛에 감사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어느 정도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진집을 펼쳐 보여주는 이규상 대표 ⓒ최근모
Q. 대표님의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 이규상 대표 ⓒ최근모
가장 재밌을 때는 집중해서 일할 때입니다. 집중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급 외제차나 골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변 친구들이 많아졌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운동하며 사회정의를 외치던 투사들이 세월이 지나면 왜 그렇게 하나같이 물질로 빠져버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의식이 멈춰서 그렇습니다. 머리가 굳어버린 겁니다. 독서나 신앙 같은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남과 비교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에 집중할 때 '보상'(만족)된다고 생각합니다.
Q.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 꿈은 재정적 고민 없이 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불가능한 상상을 해봅니다. 예를 들어 독립영화를 재작하는 젊은 친구들이 재정적 고민 없이 자신하고자 하는 작품을 할 수 있게 후원하거나 용인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 말입니다.
▲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 표지 ⓒ눈빛
남들이 조금 알아준다는 생각에 우쭐하다가 잠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됐습니다.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지금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뭔가를 꿈꿔야 한다는 것을. 지금 저는 한국에 '케이팝'(K-POP)만 있는 게 아니라 '케이포토'(K-PHOTO)도 있다는 것을 외국에 보여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외국 도서전 같은 곳에 참가해보고 싶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꿈을 가져야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진전(進展)'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의 꿈입니다. 언제나 꿈을 가져야 합니다.
Q. 요새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 『광주는 말한다』 표지 ⓒ눈빛
2차 대전 나치가 유태인에게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학살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진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진집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대량학살이 우리에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6.25 한국전쟁, 여순반란사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자행됐던 끔찍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외국의 홀로코스트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체포, 구금, 학살, 매장의 모습이 놀랄 정도로 비슷합니다. 이러한 자료가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 사진 출처 - 이창성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 중 ⓒ눈빛
홀로코스트의 폐해를 사진으로 직접 본 사람과 미루어 짐작만 하는 사람이 갖는 경계심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사진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혹, 선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외면했습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막연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추상적으로 우리의 과거 속 '홀로코스트'를 경계하자고 말하는 것이 최선일까? 불편하더라도 폐해를 직접 봄으로써 진정한 실체적 경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구체적 진실을 담은 사진의 현실 환기의 역할이 아닐까? 민감한 문제이기에 진중하게 숙고할 생각입니다. 어떤 게 사진의 역할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해인 1953년 한국에서 복무했던 미군 병사 루퍼트 넬슨(88) 씨가 '헬로 코리아'(HELLO KOREA) 사진집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또 그로부터 학습되어야 한다.'
Q. 30년 동안 눈빛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출간한 사진가는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이 생각나는 사진가를 꼽는다면?
▲ 가난한 이들의 삶과 표정을 담아낸 최민식 작가의 작품 ⓒ최민식
꼭 한분을 꼽으라면 최민식 선생님입니다. 아까 점심때도 선생님 이야기를 했는데 또 하게 됩니다. 오래전, 최민식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정성껏 대접한다고 뷔페로 갔습니다. 1인당 삼만원인가 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본인을 어떻게 보았기에 이렇게 비싼 음식을 시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비싼 밥 먹으며 거리에 나가선 가난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위선이 불편하셨던 겁니다. 본인은 작업하실 때 간단한 빵으로 요기를 때우신다고. 만원이 넘는 식사는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만이천원 정도까지는 드시지 않았을까요?(웃음) 돌아가셨지만 최민식 선생님이 자주 생각이 납니다. 요새 주목하는 젊은 사진가는 갤러리 브레송에서 '청계천 사람들' 개인전을 연 최인기입니다. 눈여겨볼 친구죠.
"감사합니다. 작업 잘하시고 담에 또 봅시다."
총총걸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이규상 대표의 머리 위로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게 행복!'이라는 가상의 엔딩 타이틀이 뜬다. 이 대표는 지금 가장 행복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진 작업에 몰두할 수 있어서.
글을 마치며
사진 전시 뒤풀이에서 혹여 눈빛 출판사의 이규상 대표를 만나게 되면 말을 건네도 좋을 듯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마부>(1961)와 <박하사탕>(1999)이다. 영화와 사진을 좋아한다면 세대의 벽은 없다. 작업하고 있는 사진에 대한 조언도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답은 늘 현장에 있다. 눈빛 출판사는 이번 여름 충무로에서 영화배우 스틸 사진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이 대표의 큰 눈이 끔벅끔벅 거릴 때마다, 영화 <마부>에서 수레 끄는 말의 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사회의 진실을 담아내다
다큐멘터리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 출판사'
인문쟁이 최근모
2019-07-23
▲ 사진집 『헬로 코리아 HELLO KOREA 』 표지 ⓒ눈빛
눈빛 출판사(이하 눈빛)는 다큐멘터리 사진 전문 출판사다. 1988년 창업하여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700여 종의 책을 출간하였다. 사진 전문 출판사로서 독보적이다. 현재도 왕성하게 출판 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당분간 눈빛 출판사의 사진집 발간 기록은 깨질 수 없을 듯하다. 30년은 청년을 노인으로 만들 수 있는 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의 정신은 여전히 청년이다. 아니 더 푸르다. 필자가 방문한 날도 3권의 따끈한 사진집이 세상 밖으로 출사표를 던지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눈빛의 원동력을 탐색하고자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눈빛 출판사 이규상 선생님 핸드폰이죠?"
"네. 선생님은 아닙니다"
"아... 예... 저는 누구..."
필자의 구구절절 긴 설명을 단칼에 정리해주는 이규상 대표.
"다음주 수요일 2시에 출판사 사무실에서 뵙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망설임 없는 멘트로 통화 종료. 취재를 요청하면서 지금처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상대의 반응은 처음이다. 700여 권의 책을 교정하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간결함이 느껴진다.
눈빛 출판사는 마포구 상암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한 외국인이 예고 없이 방문해 있었다. 눈빛에서 발간된 사진집을 보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눈빛에서 출간한 사진집에 담긴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 눈꽃 출판사 이규상 대표 ⓒ최근모
"우리나라 사람은 한국적인 것을 생각할 때 아름답고 거창한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반면에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한국의 모습에 더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의식한 적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작은 것들이 외국인에게는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소재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도 살지 않으면서 상대를 압도하는 궁궐이 한국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눈빛은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간 평범하거나 약자인, 보통 사람들에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역사를 주도한 인물만이 그 시대 한국을 모두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 속에도 한국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숨어있다. 작은 것, 쉬이 놓치기 쉬운 순간에 대한 애정. 눈빛이 여전히 젊은 이유다.
인터뷰에 들어갔을 때 이규상 대표의 앞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놓여 있었다. 해야 할 말을 적어 놓은 것 같은데 단어 몇 줄 뿐이다. 그 속에서 화수분처럼 사진에 대한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눈빛에서 출간한 최민식 사진가의 '사진은 사상이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 최민식 산문집 『사진은 사상이다』 표지 ⓒ눈빛
Q. 어떤 것이 사진입니까?
사진가들은 사진이 백 퍼센트 진실을 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가장 근접한 매체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가요 가사에서조차 그 시대의 정서와 사회현상을 담고 있습니다. 하물며 사진이 그것을 담지 않고 추상성이나 예술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진 본연의 역할이 아닙니다. 미술의 영역입니다. 인문, 사회, 역사를 바탕으로 한 궁극적 매체가 사진입니다. 시대 정서, 역사성, 직접적 구체성이 사진에 담겨야 합니다. 진실이란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진입니다. 사진은 '지표'(인덱스)로서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 민주화의 아이콘 이한열 1987. 6. 9 ⓒ토니 정(정태원)
사진 출처 : 전민조 엮음, 『특종 역사를 말하는 사진』(눈빛) 중
한국전쟁을 말과 활자로 설명해도 사진 한 장에 담긴 시대의 정서와 문화의 구체성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서구는 1차대전부터 이미지의 중요성에 눈을 떴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단서로서 사진 이미지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눈빛에서 나온 한국전쟁 시리즈가 학계에 새로운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에 보람을 느낍니다.
▲ 『한국전쟁 Ⅱ』 표지 ⓒ눈빛
Q.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작업방식이 궁금합니다.
▲ 최민식 사진집 『휴먼 선집』 표지 ⓒ눈빛
작업은 진정성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한 철저한 이해, 공감, 유대가 진정성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된다면 사진에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찍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작가가 그 사람들을 작업의 소재로서만 생각한다면 그 작업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작품을 통해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거나 유명세를 얻으면 더는 작업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쪽방촌 사람들에 대한 작업입니다. IMF 때 망한 사람들이라거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시작부터 정해놓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상대에 대한 이해나 공감 없는 편견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서 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됩니다. 상대를 소재로서가 아니라 애정과 공감을 가지고 목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고민과 이해가 진정성 있는 사진을 만듭니다.
▲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30년』 표지 ⓒ눈빛
Q. 눈빛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출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단 한 컷의 걸작을 뽑아 상을 주는 사진 공모전이 문제입니다. 일반인들은 그것이 사진 작업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한 장의 걸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온 앞뒤의 맥락과 진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진집은 단편적인 게 아니라 여러 장의 맥락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이규상 대표 ⓒ최근모
사진 출판이란 책의 수미쌍관이나 기승전결처럼 여러 작의 맥락으로 이루어집니다. 작가로서 단 한 장의 걸작이 아니라, 그 걸작이 나온 전체의 맥락, 진정성이 사진집에 담겨야 합니다. 사진 전시도 맥락적인 배치가 필요한데 무질서하게 배치된 경우가 많습니다. 맥락과 진정성 없이 전시를 통한 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성이 담긴 여러 사진을 가지고 맥락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눈빛의 출판 기준입니다. 눈빛이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작가의 이름값이 아닙니다.
▲ 심규동 사진집 『고시텔』 표지 ⓒ눈빛
사진을 보는 저의 기준은 예술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진의 사회적 기능, 다시 말해 사진을 통해 사회 제반 현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사진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Q. 눈빛 출판사의 경영 방식이 궁금합니다.
어떤 전시에 갔더니 사회자가 저를 '30년 동안 사진을 해오시고, 사진으로 집을 지으시려는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낯이 뜨거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얼마나 염치없는 이야기입니까? 왜 그런가 했더니 예전에 '사진으로 집을 짓는다'라는 기사로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반대로 전달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사진집입니다. ‘사진으로 만든 책', 이 뜻인데 말입니다.(웃음)
▲ 눈꽃 출판사 서가 ⓒ최근모
경영적으로 본다면 눈빛에서 나오는 사진집의 수익은 모두 다시 사진집 출간에 들어갑니다. 거기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다만,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진집을 만드는데 돈을 아끼지는 않습니다. 책의 퀄리티는 최대한으로 합니다. 그 때문에 돈이 많아서 질 좋은 사진집을 낸다는 오해도 받습니다. 돈이 많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사진집에 쏟아붓는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저는 연금도 없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습니다. 가진 것은 사진집뿐입니다. 그게 제 자산입니다.
밤이 깊어지면 사무실 근처에 정장을 입은 분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하는 분들인가 했더니 대리운전을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투잡’을 뛰는 회사원들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퇴근 후에 대리운전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돈은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쓰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만큼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30년간 원하는 사진집을 출판하고 있고 저희 가족도 배곯지 않고 잘 살아왔으니 눈빛에 감사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어느 정도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진집을 펼쳐 보여주는 이규상 대표 ⓒ최근모
Q. 대표님의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 이규상 대표 ⓒ최근모
가장 재밌을 때는 집중해서 일할 때입니다. 집중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급 외제차나 골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변 친구들이 많아졌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운동하며 사회정의를 외치던 투사들이 세월이 지나면 왜 그렇게 하나같이 물질로 빠져버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의식이 멈춰서 그렇습니다. 머리가 굳어버린 겁니다. 독서나 신앙 같은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남과 비교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에 집중할 때 '보상'(만족)된다고 생각합니다.
Q.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 꿈은 재정적 고민 없이 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불가능한 상상을 해봅니다. 예를 들어 독립영화를 재작하는 젊은 친구들이 재정적 고민 없이 자신하고자 하는 작품을 할 수 있게 후원하거나 용인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 말입니다.
▲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1945-2018』 표지 ⓒ눈빛
남들이 조금 알아준다는 생각에 우쭐하다가 잠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됐습니다.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지금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뭔가를 꿈꿔야 한다는 것을. 지금 저는 한국에 '케이팝'(K-POP)만 있는 게 아니라 '케이포토'(K-PHOTO)도 있다는 것을 외국에 보여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외국 도서전 같은 곳에 참가해보고 싶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꿈을 가져야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진전(進展)'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의 꿈입니다. 언제나 꿈을 가져야 합니다.
Q. 요새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 『광주는 말한다』 표지 ⓒ눈빛
2차 대전 나치가 유태인에게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학살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진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진집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대량학살이 우리에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6.25 한국전쟁, 여순반란사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자행됐던 끔찍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외국의 홀로코스트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체포, 구금, 학살, 매장의 모습이 놀랄 정도로 비슷합니다. 이러한 자료가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 사진 출처 - 이창성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 중 ⓒ눈빛
홀로코스트의 폐해를 사진으로 직접 본 사람과 미루어 짐작만 하는 사람이 갖는 경계심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사진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혹, 선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외면했습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막연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추상적으로 우리의 과거 속 '홀로코스트'를 경계하자고 말하는 것이 최선일까? 불편하더라도 폐해를 직접 봄으로써 진정한 실체적 경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구체적 진실을 담은 사진의 현실 환기의 역할이 아닐까? 민감한 문제이기에 진중하게 숙고할 생각입니다. 어떤 게 사진의 역할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해인 1953년 한국에서 복무했던 미군 병사 루퍼트 넬슨(88) 씨가 '헬로 코리아'(HELLO KOREA) 사진집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또 그로부터 학습되어야 한다.'
Q. 30년 동안 눈빛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출간한 사진가는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이 생각나는 사진가를 꼽는다면?
▲ 가난한 이들의 삶과 표정을 담아낸 최민식 작가의 작품 ⓒ최민식
꼭 한분을 꼽으라면 최민식 선생님입니다. 아까 점심때도 선생님 이야기를 했는데 또 하게 됩니다. 오래전, 최민식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정성껏 대접한다고 뷔페로 갔습니다. 1인당 삼만원인가 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본인을 어떻게 보았기에 이렇게 비싼 음식을 시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비싼 밥 먹으며 거리에 나가선 가난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 위선이 불편하셨던 겁니다. 본인은 작업하실 때 간단한 빵으로 요기를 때우신다고. 만원이 넘는 식사는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만이천원 정도까지는 드시지 않았을까요?(웃음) 돌아가셨지만 최민식 선생님이 자주 생각이 납니다. 요새 주목하는 젊은 사진가는 갤러리 브레송에서 '청계천 사람들' 개인전을 연 최인기입니다. 눈여겨볼 친구죠.
"감사합니다. 작업 잘하시고 담에 또 봅시다."
총총걸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이규상 대표의 머리 위로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게 행복!'이라는 가상의 엔딩 타이틀이 뜬다. 이 대표는 지금 가장 행복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진 작업에 몰두할 수 있어서.
글을 마치며
사진 전시 뒤풀이에서 혹여 눈빛 출판사의 이규상 대표를 만나게 되면 말을 건네도 좋을 듯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마부>(1961)와 <박하사탕>(1999)이다. 영화와 사진을 좋아한다면 세대의 벽은 없다. 작업하고 있는 사진에 대한 조언도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답은 늘 현장에 있다. 눈빛 출판사는 이번 여름 충무로에서 영화배우 스틸 사진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이 대표의 큰 눈이 끔벅끔벅 거릴 때마다, 영화 <마부>에서 수레 끄는 말의 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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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02-336-2167
글 - 최근모
사진 - ⓒ최근모, 눈빛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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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문쟁이 5기]
반갑습니다. 가치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최작가입니다. 영화일을 하고 있습니다. 책과 전시를 좋아합니다.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스토리를 채굴하는 성실한 광부가 되겠습니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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