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는 음력 7월 초 삼복더위 한창일 즈음 내리는 단비를 ‘광해우光海雨’ 라 한다. 옛부터 제주도민은 한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제주에서 돌아가신 광해군이 내려주는 선물로 여기며 고마운 마음에 아래와 같은 민요를 불렀다.
“칠월이라 초하루 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이여~ 이여~“
이 민요에서 ‘임금대왕’은 제주도에 유배 온 유일한 조선 임금, 광해군이며 ‘관하신 날’은 그날 돌아가셨다는 의미이다. ‘가물당’은 ‘가물었다’라는 제주 사투리이며 ‘비오람서라’는 ‘비가 오더라’라는 뜻이다. 가뭄이 든 한여름 타들어가는 제주 들녘에 광해우가 내려 해갈시켜 주었다는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광해군에 대한 측은함도 깃들어 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시작된 7월 초 제주에서 귀양살이 하다 세상을 뜬 조선 임금, 광해군의 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다.
광해군 제주 첫 기착지, 행원포구
▲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 ⓒ배재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1624년부터 기나긴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청이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637년 광해군은 다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하여 1637년 6월 6일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에 도착했다. 당시 제주와 육지를 잇는 해상 관문은 화북포구나 조천포구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주요 관문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제주 동쪽 행원포구에 도착한 것은 임금의 유배를 비밀에 감추고 싶었던 당시 위정자들의 의도로 보인다. 지금 행원포구는 제주올레 20코스 중간 지점으로 올레꾼들 사이에는 꽤나 유명한 곳이다. 올레코스 중간 스탬프 찍는 곳 바로 옆에 '광해군 제주 유배 기착지' 표지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행원포구에 닿은 광해군에게는 이 아름다운 바다가 슬피 보이지 않았을까.
▲ 행원포구 광해군 유배 기착지 표지석 ⓒ배재범
4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그 자리, '광해군 적소터'!
▲ 제주시 동문시장 건너편 국민은행 옆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배재범
행원포구에서 신산한 하룻밤을 보낸 광해군은 이튿날 별장, 내관, 나인 등에 의해 제주관아(現 제주시 관덕정 일원)가 있는 제주목으로 압송되었다. 제주관아 부근에 위리안치1 된 광해군은 집밖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채 모진 귀양살이를 하였다. 현재 제주 관덕정에서 도보 5분여 거리, 동문시장 서편 국민은행 지점 국기게양대 밑에 옹크리고 앉아있는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이 있는 그 곳이 바로 광해군이 4년여 머물다 승하한 곳이다.
1.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으므로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대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다.
▲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배재범
1641년 음력 7월 초하루 광해군은 유배 중 숨을 거두게 된다. 광해군의 장례를 치르고 마지막 예를 올린 당시의 제주목사가 바로 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 이시방(李時昉)이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양에서 온 예조참의(禮曹參議) 채유후(蔡裕後)가 음력 7월 27일 왕이 승하하면 지내는 대제를 제주목 관덕정에서 거행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제주 화북포구를 떠나 육지로 옮겨져 경기도 남양주 건진읍에 묻혔다.
▲ 광해군 승하 후 대제가 거행되었던 관덕정 ⓒ배재범
▲ 제주시 별도봉에서 바라본 화북포구 ⓒ배재범
'왕이 된 남자', 광해군을 기억하며!
광해군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임금이다. 조선왕 27명 중 조선 팔도를 두 발로 걸어본 유일한 임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고,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전국을 떠돌며 군사를 모으고 지친 병사들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퇴위되어, 유배 보내졌다. 그것도 강화도에서 14년, 제주에서 4년을 귀양살이 한 정말 기구한 임금이다. 조선 임금에게 일탈은 막걸리 한 잔 간절한 날, 몰래 내관 한 명 대동하고 한양 도성 저잣거리로 암행에 나서던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도성 밖으로 멀리 나가 본 임금이라면 화성 행차에 나섰던 정조, 피부병 치료차 온양 온천을 다녀온 세조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군주의 법도를 엄격히 강조하던 당대의 조선 현실 속에서, 팔도를 두루두루 돌아보고 제주에서 승하한 광해군. 제주 동문시장 한 귀퉁이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앞에 서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중 허균(류승룡 분)이 뱃머리에 선 가짜 광해군(이병헌 분)을 향해 마지막 예를 올리던 엔딩 장면에 혼자 울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7월 초하루 제주에 내리는 비, 광해우!
제주시 광해군적소터
인문쟁이 배재범
2019-07-11
제주에서는 음력 7월 초 삼복더위 한창일 즈음 내리는 단비를 ‘광해우光海雨’ 라 한다. 옛부터 제주도민은 한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제주에서 돌아가신 광해군이 내려주는 선물로 여기며 고마운 마음에 아래와 같은 민요를 불렀다.
“칠월이라 초하루 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이여~ 이여~“
이 민요에서 ‘임금대왕’은 제주도에 유배 온 유일한 조선 임금, 광해군이며 ‘관하신 날’은 그날 돌아가셨다는 의미이다. ‘가물당’은 ‘가물었다’라는 제주 사투리이며 ‘비오람서라’는 ‘비가 오더라’라는 뜻이다. 가뭄이 든 한여름 타들어가는 제주 들녘에 광해우가 내려 해갈시켜 주었다는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광해군에 대한 측은함도 깃들어 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시작된 7월 초 제주에서 귀양살이 하다 세상을 뜬 조선 임금, 광해군의 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다.
광해군 제주 첫 기착지, 행원포구
▲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 ⓒ배재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1624년부터 기나긴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청이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637년 광해군은 다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하여 1637년 6월 6일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에 도착했다. 당시 제주와 육지를 잇는 해상 관문은 화북포구나 조천포구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주요 관문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제주 동쪽 행원포구에 도착한 것은 임금의 유배를 비밀에 감추고 싶었던 당시 위정자들의 의도로 보인다. 지금 행원포구는 제주올레 20코스 중간 지점으로 올레꾼들 사이에는 꽤나 유명한 곳이다. 올레코스 중간 스탬프 찍는 곳 바로 옆에 '광해군 제주 유배 기착지' 표지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행원포구에 닿은 광해군에게는 이 아름다운 바다가 슬피 보이지 않았을까.
▲ 행원포구 광해군 유배 기착지 표지석 ⓒ배재범
4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그 자리, '광해군 적소터'!
▲ 제주시 동문시장 건너편 국민은행 옆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배재범
행원포구에서 신산한 하룻밤을 보낸 광해군은 이튿날 별장, 내관, 나인 등에 의해 제주관아(現 제주시 관덕정 일원)가 있는 제주목으로 압송되었다. 제주관아 부근에 위리안치1 된 광해군은 집밖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채 모진 귀양살이를 하였다. 현재 제주 관덕정에서 도보 5분여 거리, 동문시장 서편 국민은행 지점 국기게양대 밑에 옹크리고 앉아있는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이 있는 그 곳이 바로 광해군이 4년여 머물다 승하한 곳이다.
1.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으므로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대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다.
▲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배재범
1641년 음력 7월 초하루 광해군은 유배 중 숨을 거두게 된다. 광해군의 장례를 치르고 마지막 예를 올린 당시의 제주목사가 바로 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 이시방(李時昉)이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양에서 온 예조참의(禮曹參議) 채유후(蔡裕後)가 음력 7월 27일 왕이 승하하면 지내는 대제를 제주목 관덕정에서 거행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제주 화북포구를 떠나 육지로 옮겨져 경기도 남양주 건진읍에 묻혔다.
▲ 광해군 승하 후 대제가 거행되었던 관덕정 ⓒ배재범
▲ 제주시 별도봉에서 바라본 화북포구 ⓒ배재범
'왕이 된 남자', 광해군을 기억하며!
광해군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임금이다. 조선왕 27명 중 조선 팔도를 두 발로 걸어본 유일한 임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고,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전국을 떠돌며 군사를 모으고 지친 병사들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퇴위되어, 유배 보내졌다. 그것도 강화도에서 14년, 제주에서 4년을 귀양살이 한 정말 기구한 임금이다. 조선 임금에게 일탈은 막걸리 한 잔 간절한 날, 몰래 내관 한 명 대동하고 한양 도성 저잣거리로 암행에 나서던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도성 밖으로 멀리 나가 본 임금이라면 화성 행차에 나섰던 정조, 피부병 치료차 온양 온천을 다녀온 세조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군주의 법도를 엄격히 강조하던 당대의 조선 현실 속에서, 팔도를 두루두루 돌아보고 제주에서 승하한 광해군. 제주 동문시장 한 귀퉁이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앞에 서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중 허균(류승룡 분)이 뱃머리에 선 가짜 광해군(이병헌 분)을 향해 마지막 예를 올리던 엔딩 장면에 혼자 울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 공간 정보
주소 : 제주시 이도1동 1479번지
유적명 : 광해군 적소터
운영시간 : 상시개방(무료)
○ 관련자료
네이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광해군적소터
○ 사진 촬영_배재범
2019 [인문쟁이 5기]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탐험하고 알리는 인문쟁이가 되어 20대에 품었던 인문학도의 꿈을 다시 꾸고 싶은 50대 아저씨입니다.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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