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지 않고 어머니처럼 너른 품으로 광주를 안아주는 산, 무등으로 오르는 길 초입에 자연과 하나인 듯 원래 거기가 제자리인 듯 서 있는 건물이 있다. 이름마저 낯선 남종화를 주로 전시하는 의재미술관이다. 나날이 변하고 다채롭고 새로워지는 세월 속에서 동양화, 그것도 남종화라니, 하는 세간의 놀라움을 모르는 척 무심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그렇게 있다.
▲ 산의 경사로를 그대로 살려 지어진 의재미술관 입구 ⓒ김지원
‘산속의 키 작은 집’ 의재미술관
의재미술관은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예술과 삶을 기리기 위해 2001년에 건립되었다. 의재는 현대 남종화의 대가로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며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후대가 그를 기리는 이유는 일찍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세속적인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과 실천적 계몽 정신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산의 경사로를 그대로 살려서 지어졌는데 1층의 통유리를 몸체로 하여 위쪽에 나무 상자를 얹고 있는 형상이다. 의재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의 조화를 건축물에 담아내고 있어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과연 자기를 돋보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겸손함이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의재 허백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획전시실에서는 철마다 의미 있는 전시를 한다.
스승의 호흡마저 따라 그리는 그림, 체본(體本)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는 ‘그림의 본으로 삶의 본이 되다’ 전이다. 의재의 체본을 만날 수 있다. 체본은 전통서화에서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그려 본을 보이는 작품이다. 옛사람들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 받으며 스승이 그린 그림을 모사해보기도 하고, 그려준 그림을 보고 몇 번이고 그려 그 뜻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체본은 그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그림의 형태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붓놀림의 완급과 강약, 때로는 스승의 호흡까지 따르며 화가로서의 마음가짐까지 배우는 것이다. 개성 없는 모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에, 수십 자루의 몽당붓과 숱한 파지를 낸 끝에 결국 자신만의 화풍을 이룬다.
▲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김지원
“나는 처음부터 내 그림이 없었다.
처음엔 미산米山 그림과 같았고
후에는 소치小痴 그림,
황대치黃大癡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황대치 것도 아니다.”
- 의재 허백련 -
▲ 30여 점의 체본을 모아놓은 전시실 ⓒ김지원
제자들에게 체본은 스승이 남긴 유산처럼 소중하다. 이번 전시도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체본 가운데 화조와 사군자 30여 점을 모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전시실에서 만나는 그림에는 제자에게 이것만은 꼭 가르치고 싶다는 스승의 마음이 담겨있다. 난초를 순서대로 그리거나 꽃을 따로 확대하여 그린 그림, 모란 꽃잎을 한 장 한 장 순서대로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다. 체본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공유하는 것이기에 낙관이 찍혀있지 않다.
▲ 제자를 가르치던 다양한 난초 체본 ⓒ김지원
▲ 국화 잎사귀는 이처럼 그리는 것이야, 국화 잎 체본 ⓒ김지원
의재의 숨결이 다향처럼 맴도는 춘설헌
미술관 앞으로는 때마침 내린 봄비 덕에 계곡물이 불어 돌돌돌 수선스럽게 흐른다. 건너편으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너 오래된 돌계단을 밟아 오르면 왼쪽으로는 의재의 묘소가 오른쪽으로는 춘설헌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흙길 끝에 춘설헌이 적요에 잠겨 있다. 의재는 이곳에서 40년 동안 기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차를 가꾸었다. 주변에 그윽한 다향이 머무는 듯하다.
▲ 오솔길 끝, 적요에 잠긴 춘설헌 ⓒ김지원
체본을 보고 춘설헌까지 둘러보는 길이 마치 의재의 삶의 궤적인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내놓은 길과 그려놓은 체본을 따라 배우며 살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는 내가 그려놓은 체본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내 삶에 수만 번의 붓질을 하고 지금은 기꺼이 의재가 내놓은 길을 걷는다. 뒤를 돌아보니 미술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져도, 세상이 비껴가도 상관 않겠다는 의연함이 느껴진다.
‘그림의 본으로 삶의 본이 되다’
의재미술관
인문쟁이 김지원
2019-05-15
차별하지 않고 어머니처럼 너른 품으로 광주를 안아주는 산, 무등으로 오르는 길 초입에 자연과 하나인 듯 원래 거기가 제자리인 듯 서 있는 건물이 있다. 이름마저 낯선 남종화를 주로 전시하는 의재미술관이다. 나날이 변하고 다채롭고 새로워지는 세월 속에서 동양화, 그것도 남종화라니, 하는 세간의 놀라움을 모르는 척 무심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그렇게 있다.
▲ 산의 경사로를 그대로 살려 지어진 의재미술관 입구 ⓒ김지원
‘산속의 키 작은 집’ 의재미술관
의재미술관은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예술과 삶을 기리기 위해 2001년에 건립되었다. 의재는 현대 남종화의 대가로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며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후대가 그를 기리는 이유는 일찍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세속적인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과 실천적 계몽 정신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산의 경사로를 그대로 살려서 지어졌는데 1층의 통유리를 몸체로 하여 위쪽에 나무 상자를 얹고 있는 형상이다. 의재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의 조화를 건축물에 담아내고 있어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과연 자기를 돋보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겸손함이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의재 허백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획전시실에서는 철마다 의미 있는 전시를 한다.
스승의 호흡마저 따라 그리는 그림, 체본(體本)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는 ‘그림의 본으로 삶의 본이 되다’ 전이다. 의재의 체본을 만날 수 있다. 체본은 전통서화에서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그려 본을 보이는 작품이다. 옛사람들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 받으며 스승이 그린 그림을 모사해보기도 하고, 그려준 그림을 보고 몇 번이고 그려 그 뜻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체본은 그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그림의 형태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붓놀림의 완급과 강약, 때로는 스승의 호흡까지 따르며 화가로서의 마음가짐까지 배우는 것이다. 개성 없는 모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에, 수십 자루의 몽당붓과 숱한 파지를 낸 끝에 결국 자신만의 화풍을 이룬다.
▲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 ⓒ김지원
“나는 처음부터 내 그림이 없었다.
처음엔 미산米山 그림과 같았고
후에는 소치小痴 그림,
황대치黃大癡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황대치 것도 아니다.”
- 의재 허백련 -
▲ 30여 점의 체본을 모아놓은 전시실 ⓒ김지원
제자들에게 체본은 스승이 남긴 유산처럼 소중하다. 이번 전시도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체본 가운데 화조와 사군자 30여 점을 모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전시실에서 만나는 그림에는 제자에게 이것만은 꼭 가르치고 싶다는 스승의 마음이 담겨있다. 난초를 순서대로 그리거나 꽃을 따로 확대하여 그린 그림, 모란 꽃잎을 한 장 한 장 순서대로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다. 체본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공유하는 것이기에 낙관이 찍혀있지 않다.
▲ 제자를 가르치던 다양한 난초 체본 ⓒ김지원
▲ 국화 잎사귀는 이처럼 그리는 것이야, 국화 잎 체본 ⓒ김지원
의재의 숨결이 다향처럼 맴도는 춘설헌
미술관 앞으로는 때마침 내린 봄비 덕에 계곡물이 불어 돌돌돌 수선스럽게 흐른다. 건너편으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너 오래된 돌계단을 밟아 오르면 왼쪽으로는 의재의 묘소가 오른쪽으로는 춘설헌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흙길 끝에 춘설헌이 적요에 잠겨 있다. 의재는 이곳에서 40년 동안 기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차를 가꾸었다. 주변에 그윽한 다향이 머무는 듯하다.
▲ 오솔길 끝, 적요에 잠긴 춘설헌 ⓒ김지원
체본을 보고 춘설헌까지 둘러보는 길이 마치 의재의 삶의 궤적인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내놓은 길과 그려놓은 체본을 따라 배우며 살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는 내가 그려놓은 체본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내 삶에 수만 번의 붓질을 하고 지금은 기꺼이 의재가 내놓은 길을 걷는다. 뒤를 돌아보니 미술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져도, 세상이 비껴가도 상관 않겠다는 의연함이 느껴진다.
○ 공간정보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중심사길 155 의재미술관
운영시간 : 9:30 ~ 17:00 * 월요일 휴관
○ 관련링크
홈페이지 : http://www.ujam.org
오시는길 : http://www.ujam.org/intro/intro02.php
○ 사진촬영_김지원
장소 정보
2019 [인문쟁이 5기]
쓰는 사람이다. 소설의 언어로 세상에 말을 건네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살고 싶은 마음과 길가 돌멩이처럼 살고픈 바람 사이에서 매일을 기꺼이 산다.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그림의 본으로 삶의 본이 되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불안하고 날카로운, 그래서 청춘
인문쟁이 김정은
시인 기형도를 찾아서
인문쟁이 최근모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