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과 김혜순 시인의 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였다. 교과서 속 문학작품에 자리 잡은 그림에는 납작하게 그려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돌 위에 새겨놓은 듯 표면은 거칠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었다. 이렇듯 화가 박수근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교과서에서 봤던, 어딘지 익숙하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DMZ, 군사 지역, 시래기로 더 유명한 강원도 양구에는 2002년 문을 연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양구는 박수근이 유년기를 보낸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박수근미술관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간 양구는 군인과 면회객들로 북적였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하자 커다란 나무와 풀숲에 둘러싸인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지에 새겨낸 미술관
화강암으로 지은 원형 건물을 돌아 들어가면 자작나무 숲과 빨래터가 나온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종종 나오곤 했던 장소들을 재현한 곳이었다. 날씨가 가물어 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빨래터에 앉아 빨래하던 여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 빨래터, 자작나무로 가는 길 ⓒ강태화
▲ 빨래터 ⓒ강태화
▲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 출처=갤러리현대
빨래터를 지나오면 박수근 동상이 나지막이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박수근기념전시관’이다. 이곳에서는 박수근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 실제로 사용했던 유품은 물론 그의 일생과 생전에 남긴 말과 편지를 만날 수 있다. 기념관에서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청년 시절 박수근 선생과 박완서 작가가 함께 미군 부대 PX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박완서 작가의 ‘나목’은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다. 두 예술가가 함께 보냈던 시간의 기록에서 깊은 울림이 전해져왔다.
▲ 박수근기념전시관 ⓒ강태화
기념전시관에서 진행되는 특별전을 관람한 뒤, 바깥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면 박수근미술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이어진 오솔길을 올라가면 박수근 선생과 부인 김복순 여사의 묘소가 있다. 오솔길 위에 고요히 자리 잡은 묘소에서 내려와 잠시 걷다 보면 현대적인 구조의 커다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故 이종호 건축가가 설계한 ‘박수근파빌리온’(2014년 개관)이다. 자연에 새겨진 익숙한 질서를 존중하고 기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박수근 파빌리온에서는 근현대 미술 소장품을 만나볼 수 있다.
▲ 박수근 파빌리온 전경(1) ⓒ강태화
▲ 박수근 파빌리온 전경(2) ⓒ강태화
파빌리온에서 나와 풀숲으로 이어진 길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 입구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관’(2005년 개관)이 보인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이 개최되고,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교육·세미나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방문했을 때는 ‘제2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박수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격동기를 살아갔던 그 시대 화가들의 꿈과 소망, 고뇌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박수근>”
박수근미술관은 2004년 갤러리 현대 박명자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박수근의 작품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천경자, 이응노 등 격동의 시대를 그림으로 승화한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 55점을 기증받았다. 당시 이렇다 할 소장품이 없던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에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2018 박수근미술관 아카이브 특별전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그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전시이기도 하다.
▲ 미술관 곳곳에 자리 잡은 작품들(1) ⓒ강태화
▲ 미술관 곳곳에 자리 잡은 작품들(2) ⓒ강태화
발 딛는 곳마다
“나는 강원도 양구군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지 않게 살며 보통학교엘 입학했는데
미술시간이 어찌도 좋았는지 몰라요. 제일 처음 선생님께서 크레용 그림을 보여주실 때
즐거웠던 마음은 지금껏 잊히지 않아요. 그러나 아버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은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과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중략)…
나는 낙심하지 않고 틈틈이 그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림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양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박수근은 어린 시절 화강암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산으로 들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던 소년 시절 박수근의 숨결이 미술관 곳곳에 흐르고 있는 듯했다. 돌에 대한 애정이 깊어 미석(美石)이라는 호를 가졌던 박수근. 파빌리온에서 나와 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가던 길에 보이던 고목부터 발 딛는 곳마다 보이는 다양한 석조물까지 그의 생가터에 세워진 박수근미술관은 그 자체로 이미 박수근이었다.
사진도움: 강태화
<관련 장소>
박수근미술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24549) Tel: 033-480-2655
관람시간: 09:00 ~ 18:00(관람 시간 1시간 전 입장)
휴관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개관), 1월 1일, 설날과 추석 오전
<관련 정보>
전시
2018 박수근미술관 아카이브 특별전 “앉아 있던 사람들” 2018.4.21. ~ 2019.3.24.
김지영은 강원도 춘천 토박이다. 축제, 커뮤니티 극장, 극단 등에서 공연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며 대안학교에서 예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지만 빛나는 가치와 오래된 것, 사라져 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인문학을 통해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인문쟁이 활동을 통해 강원도를 더 사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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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납작 돌 위에 새겨진 마음들
인문쟁이 김지영
2018-09-13
내가 알던 박수근
화가 박수근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과 김혜순 시인의 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였다. 교과서 속 문학작품에 자리 잡은 그림에는 납작하게 그려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돌 위에 새겨놓은 듯 표면은 거칠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었다. 이렇듯 화가 박수근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교과서에서 봤던, 어딘지 익숙하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DMZ, 군사 지역, 시래기로 더 유명한 강원도 양구에는 2002년 문을 연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양구는 박수근이 유년기를 보낸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박수근미술관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간 양구는 군인과 면회객들로 북적였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하자 커다란 나무와 풀숲에 둘러싸인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지에 새겨낸 미술관
화강암으로 지은 원형 건물을 돌아 들어가면 자작나무 숲과 빨래터가 나온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종종 나오곤 했던 장소들을 재현한 곳이었다. 날씨가 가물어 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빨래터에 앉아 빨래하던 여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 빨래터, 자작나무로 가는 길 ⓒ강태화
▲ 빨래터 ⓒ강태화
▲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 출처=갤러리현대
빨래터를 지나오면 박수근 동상이 나지막이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박수근기념전시관’이다. 이곳에서는 박수근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 실제로 사용했던 유품은 물론 그의 일생과 생전에 남긴 말과 편지를 만날 수 있다. 기념관에서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청년 시절 박수근 선생과 박완서 작가가 함께 미군 부대 PX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박완서 작가의 ‘나목’은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다. 두 예술가가 함께 보냈던 시간의 기록에서 깊은 울림이 전해져왔다.
▲ 박수근기념전시관 ⓒ강태화
기념전시관에서 진행되는 특별전을 관람한 뒤, 바깥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면 박수근미술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이어진 오솔길을 올라가면 박수근 선생과 부인 김복순 여사의 묘소가 있다. 오솔길 위에 고요히 자리 잡은 묘소에서 내려와 잠시 걷다 보면 현대적인 구조의 커다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故 이종호 건축가가 설계한 ‘박수근파빌리온’(2014년 개관)이다. 자연에 새겨진 익숙한 질서를 존중하고 기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박수근 파빌리온에서는 근현대 미술 소장품을 만나볼 수 있다.
▲ 박수근 파빌리온 전경(1) ⓒ강태화
▲ 박수근 파빌리온 전경(2) ⓒ강태화
파빌리온에서 나와 풀숲으로 이어진 길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 입구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관’(2005년 개관)이 보인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이 개최되고,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교육·세미나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방문했을 때는 ‘제2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박수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격동기를 살아갔던 그 시대 화가들의 꿈과 소망, 고뇌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박수근>”
박수근미술관은 2004년 갤러리 현대 박명자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박수근의 작품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천경자, 이응노 등 격동의 시대를 그림으로 승화한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 55점을 기증받았다. 당시 이렇다 할 소장품이 없던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들은 한국미술사에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2018 박수근미술관 아카이브 특별전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그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전시이기도 하다.
▲ 미술관 곳곳에 자리 잡은 작품들(1) ⓒ강태화
▲ 미술관 곳곳에 자리 잡은 작품들(2) ⓒ강태화
발 딛는 곳마다
“나는 강원도 양구군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지 않게 살며 보통학교엘 입학했는데
미술시간이 어찌도 좋았는지 몰라요. 제일 처음 선생님께서 크레용 그림을 보여주실 때
즐거웠던 마음은 지금껏 잊히지 않아요. 그러나 아버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은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과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중략)…
나는 낙심하지 않고 틈틈이 그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림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양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박수근은 어린 시절 화강암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산으로 들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던 소년 시절 박수근의 숨결이 미술관 곳곳에 흐르고 있는 듯했다. 돌에 대한 애정이 깊어 미석(美石)이라는 호를 가졌던 박수근. 파빌리온에서 나와 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가던 길에 보이던 고목부터 발 딛는 곳마다 보이는 다양한 석조물까지 그의 생가터에 세워진 박수근미술관은 그 자체로 이미 박수근이었다.
사진도움: 강태화
<관련 장소>
박수근미술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24549) Tel: 033-480-2655
관람시간: 09:00 ~ 18:00(관람 시간 1시간 전 입장)
휴관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개관), 1월 1일, 설날과 추석 오전
<관련 정보>
전시
2018 박수근미술관 아카이브 특별전 “앉아 있던 사람들” 2018.4.21. ~ 2019.3.24.
제2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 김진열 2018.5.4. ~ 2018.10.14.
<관련 링크>
홈페이지: http://www.parksookeun.or.kr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ookeunmuseum
장소 정보
2017,2018 [인문쟁이 3,4기]
김지영은 강원도 춘천 토박이다. 축제, 커뮤니티 극장, 극단 등에서 공연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며 대안학교에서 예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지만 빛나는 가치와 오래된 것, 사라져 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인문학을 통해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인문쟁이 활동을 통해 강원도를 더 사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납작납작 돌 위에 새겨진 마음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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