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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세월을 품고 마을을 지킨

청인약방 신종철

김지혜

2018-09-07


한가한 하루였다. 이종관과 노정열만 다녀갔다.

2016년 11월 23일 

 

일기는 1950년 6·25 사변이 나던 날부터 쓰기 시작했다. 매일 한 장을 넘길 만큼 쓸 거리가 많았다. 이제는 글자보다 빈칸이 많다.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 청인약방, 신종철 선생의 이야기다. 1958년에 문을 연 청인약방은 곁에 선 느티나무와 여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청인약방 외관



푸르고 깊은 사연의 방


괴산성당을 지나 열 걸음 정도 걸었을까, 덩치 큰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큰지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다. 200살 먹은 나무 옆으로 시옷 모양의 양철지붕을 얹은 청인약방이 있다. 60년간 사람들이 여닫은 약방문에는 붉고 진한 글씨로 ‘약’ 이라는 한 글자만 적혀 있다. 지금은 병원과 약국이 지천이라 드나드는 이가 줄었지만, 한때는 청인약방이 마을 사람들에게 주치의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사람이 많이 줄었지. 다 떠났어. 외지로 가고 하늘나라도 가고. 내가 1932년생인데, 나만 길게 사는 거 같아.”


청인약방 신종철


약도 의사도 귀했던 시절, 신종철 선생은 지금 자리에 약점을 열었다. 돈 8천 원을 빌려 낸 약점이 약포가 되고 다시 약방이 되었다. 약포나 약방은 사실 매한가지인데 약국처럼 조제는 못 하고 상자에 든 거, 병에 든 거만 판다.


“하고 많은 거 중에 어떻게 약방을 했냐고? 내가 칠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괴산중학교 시험을 봤는데 2등을 했어. 

그때 입학금이 5천 원이었는데, 그 큰돈이 어디서 나. 우리 할머니가 어디 가서 돈을 얻어 왔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학교는 못 가고 그 돈으로 장례를 치렀지.”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는 못 갔지만 배움을 놓고 싶진 않았다. 그는 지인이 서울 용산에서 치과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보따리를 쌌다. 그곳을 찾아가 시키는 건 다 할 테니, 야간 중학이라도 보내 달라고 청했다. 다행히 허락을 받고 거기서 3년 반 동안 낮에는 일을 돕고 밤에는 숭문중학에 다녔다. 저녁 다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4학년 때 6·25사변이 났네. 또 보따리를 쌌지. 그때 김치과도 청주로 내려가고 나중에 내가 또 거기 가서 일했는데, 

의사 부인이 계를 하다가 사기를 당했어. 거기에 내 봉급도 다 들어가 있었는데. 

그때 그 일이 아니었으면 내가 치과의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대학에 가고 싶었거든.”


돈도 꿈도 사라진 그때, 누군가 선생에게 약종상을 해보라고 권유한다. 대학 공부가 하고 싶어 흘려 들었던 신종철 선생은 훗날 허가증을 손에 쥐면서 칠성에 터를 잡았다.


 약방 이름이 왜 청인이냐면,  나를 약 팔게 도와준 이가 청주에 살았고, 또 나를 도와준 치과의사가 인천에 살았단 말이지. 

그래서 그들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앞 글자를 따서 청인약방이라고 지었지.”


청인(淸仁)은 지명을 딴 것뿐인데, 사연을 풀어 놓는 선생이 푸르게 맑아 꼭 청인(靑人) 같았다.



세월도 끝내 녹았다


감기약, 소화제, 설사약. 지금까지 어떤 약이 가장 많이 팔렸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지금은 활명수라고 부르는 생명수, 그리고 숯으로 만든 단나졸이라는 지사제를 많이 찾았다. 취한 이들은 주로 게보린을 찾았다. 머리가 아프다며 새벽에 약방 문을 두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청인약방 내부 빼곡히 있는 약들


“처음에는 약만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사랑방 마냥 놀러 오는 사람이 많았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고스톱 치고 그랬지. 

촌에 뭐 놀 거리가 있는가. 그러고 노는 거지. 나중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내가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서 오랬지. 

오전반은 아침 먹고 놀다가 점심 먹고 가고, 오후반은 그때 와서 문 닫을 때까지 와서 놀고.”


사람들로 문턱이 낮아지고, 마루는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때였다. 그 시절은 날아갔어도 사람이 아주 안 오는 것은 아니다. 허리가 기역으로 굽고 머리카락이 세월에 바랬어도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 청인약방은 아쉬운 곳이다. 상자에 든 약만 약일까. 이렇게 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온갖 이야기를 들어주는 신종철 선생은 그들에게 마음의 약이다.


“마을의 관혼상제에 다 관여했지. 주례를 백 번도 더 섰어. 그뿐인가. 농협에서 돈 빌리려는 사람들 보증도 서고, 내 돈도 빌려주고 그랬어. 

약값은 감자나 쌀로 받을 때도 있었고. 내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도 있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도 많았어. 

이제와 뭐해 죽고 없는데. 무덤에 가서 받나.”


습관처럼 하루를 기록했다. 일기도 쓰고 장부도 쓰고. 왜 그렇게 열심히 적어 두었을까. 혹여 자신이 남에게 받은 마음 한 끼를 잊지 않을까, 빌려 쓴 손길을 갚지 않을까,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손으로 쓴 장부


“배를 곯아봐서 그런가, 남의집살이를 해서 그런가. 내가 마음이 약해. 

그러니 남의 돈 대신 갚느라 내 신발 한 켤레 못 사 신고 살았지. 내 자식들도 고생을 많이 했어. 

내가 그렇게 사느라고. 그래도 남한테 욕은 안 먹고 살았네. 내가.”


고요한 시절만 있었을 것 같은 마을에도 지난한 역사가 다녀갔다. 특히 신종철 선생은 3·15 부정선거, 4·19혁명, 5·16을 가까이서 겪었다. 재건국민운동 운영직부터, 유신헌법 제35조로 결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세 번이나 지냈다. 자발적인 감투는 아니었으나 일이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


밤새 눈이 오다. 종일 눈이 오다. 오후엔 끝나고 녹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곧 간다. 한 해가 달 같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게 없다. 

그래도 신세 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2015년 12월 27일

 

꽁꽁 언 세월도 끝내 다 녹았다. 모진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다 감사하다고 쓴다. 



오늘 하루도 안녕했다


도정리는 일본이 붙인 이름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은 ‘칠성바위 솔밭 거리’라 불렀다. 약방문 앞에 하나, 일대에 여섯. 합이 일곱 개의 바위와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었다. 지금은 바위만 남고 소나무는 다 없어졌다.


없어진 게 소나무뿐일까. 동네에 변하지 않고 남은 것은 청인약방이 유일하다. 가끔 고향에 왔다가 그대로인 약방을 보고 눈가가 젖는 이들도 있다. 반질반질한 마루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약을 털어 넣던 기억 때문에. 


청인약방 신종철


“약방이 뭐 별거야. 그래도 나는 지켜온 거니까, 내가 죽어도 부수지 말았으면 좋겠어. 돈 안 받고 기증할 거야. 

잘 보존해서 옛날에 약방이라는 것도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후손이 알면 좋겠어.”


신종철 선생은 제 몸의 일부 같은 약방도 기증하고 진짜 몸도 충북대 의대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기로 했다. 한세상 잘 살다 가니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갈 속셈인가 보다. 그럼 그가 가져가는 건 무엇일까. 마음 아픈 곳을 낫게 하던 약손 같은 추억, 혹은 여닫이 너머로 주인을 찾던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아무려면 어떠한가. 신종철 선생은 약방 마루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비가 오고 눈 내리는 걸 보며 일기 한 줄 적으면 그만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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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지혜
김지혜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좋아하는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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