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이가 덕산온천을 제일 먼저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기리는 충의사(忠義祠)를 떠올려도 좋다.
예산군 덕산면 매헌 윤봉길 의사를 모신 충의사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 내 매헌 윤봉길 의사 영정 ⓒ정지안
반면, 예산 덕산(禮山 德山)의 상가리(上伽里)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상가리는 작은 시골 동네이기 때문이다.상가리를 알기 위해선 우선 가야산(伽倻山)을 알아야 한다.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을 중심으로 성주군과 거창군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1972년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상가리는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의 예산군 덕산면 쪽 입구에 속하는 동네다. 덕산면 쪽에 자리한 가야산은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덕산도립공원 입구 공원사무소 ⓒ정지안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항상 ‘산림청 200대 명산’ 중에 몇 개를 올랐는지가 화두가 된다. 그러나 사실 ‘산림청 200대 명산’이란 정확한 리스트는 없다. 과거 산림청에서 ‘찾아가는 100대 명산’을 발표하고, 그 후속으로 ‘100대 명산 플러스 우리 산 100’을 새로 지정하였는데, 이 2가지를 합쳐 부르는 듯하다. ‘가야산국립공원’의 가야산은 ‘찾아가는 100대 명산’에 속하고, ‘덕산도립공원’의 가야산은 ‘100대 명산 플러스 우리 산 100’에 속한다.
이처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가야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 전설 : 1400여 년 전 이야기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신라 시대의 승려로서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던 중 어느 토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이때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잠자던 곳이 토굴이 아니고 무덤이었으며, 물이 담겨 있던 건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채 불교 포교와 불교 관련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백제의 미소길’과 ‘상가리 미륵불’ 안내판 Ⓒ정지안
이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이야기’는 많은 부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저술은 지금까지 전해져서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큰 사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게 된 그 무덤이 상가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상가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덕사보다 더 큰 절이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백제의 미소길‘을 따라 서산 쪽으로 가면 서산 마애삼존 불상이 있고, 그 바로 직전에 보원사지(普願寺址)라는 큰 절이 있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xxx 음식점’ 앞의 안내판 Ⓒ정지안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면 당진 면천을 지나 당진포에 닿게 되고, 당진 면천면의 영탑사(靈塔寺), 고대면의 영랑사(影浪寺) 그리고 현재 정미면의 안국사지(安國寺址)가 모두 가야산과 이어진다.그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재미있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당진 영탑사에서 찍은 것으로 풀을 땋아 놓은 것을 발견하여 찍은 것이다.
당진시 면천면 영탑사의 풀 땋은 모습 Ⓒ정지안
또 하나의 사진은 영탑사 7층 석탑 뒷부분 기단부에 정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처와 이 세상 제일 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 동자승의 모습을 담았다.
당진시 면천면 영탑사의 부처님과 동자승 모습 Ⓒ정지안
또한,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는 백제 시대의 유일한 사방불(四方佛)인 예산화전리사면석불(禮山花田里四面石佛, 보물 제794호)을 볼 수 있다.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4면 석불 중 1면의 모습 Ⓒ정지안
결국, 백제와 통일신라 이전과 그 이후, 즉 1400여 년 전후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비롯한 가야산과 불교 그리고 당나라와의 교역 등의 이야기는 이 지역 주변에서 어렵게 살던 민중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런데 이 이야기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서해안 일원의 여러 사찰이나 지역에서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신 지역이 자기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연군과 남연군의 묘 : 170여 년 전 이야기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1820∼1898)은 우리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흥선대원군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1836)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부터 가야산으로 이장했다. 당대 풍수가인 정만인이 ‘2대에 걸쳐 왕이 날 자리(二代天子之地)’로 가야산을 지목했고, 이에 1846년 천년고찰인 가야사 폐사(伽倻寺 廢寺)하고 아버지의 묘를 옮겨 온다. 이 사건으로 가야사(伽倻寺)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남연군의 묘가 있는데, 나옹화상이 세운 금탑(金塔)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모습(정면에서 촬영)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모습(활개에서 촬영)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앞 가야사 터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앞 가야사 터(현재 밭으로 사용) Ⓒ정지안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가 조선과 상업을 원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쳐 흥정하려 했다. 그 당시 조선은 조상은 물론 조상의 묘소까지도 잘 돌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 일은 결국 천주교인을 실질적으로 박해하는 동기를 제공하였고, 쇄국정책이 한층 심해진 원인이 되었다. 오페르트가 그 지역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남연군의 묘를 파헤칠 때 참여한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프랑스 신부 페론(Feron)과 공모하였기 때문이다.
남연군의 묘지에는 여러 가지 석물이 있는데, 그중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망주석을 자세히 보면 다람쥐 같은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세호(細虎)라고 하며,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에 따라 새겨졌다. 좌승우강은 좌측은 올라가는 우측은 내려가는 동물 모양을 말한다. 남연군의 묘역에 있는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미려하게 잘 조각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균 묘의 우측 망주석 모습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균 묘의 우측 망주석의 세호(細虎) 모습 Ⓒ정지안
또 다른 전설 : 상가리 미륵석불의 의미
남연군의 묘역에 있는 장명등(長明燈)의 남쪽을 보면 상가리 미륵불이 있다. 상가리 미륵불은 가야사를 폐사되고 남연군 묘가 들어선 것을 보기 싫어 돌아섰다고 하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에 맞게 남연군의 묘에서 미륵불을 보면 등이 보인다.
남연군 묘역 장명등에서 정확한 미륵불 방향으로 본 모습 Ⓒ정지안
상가리 미륵불 뒤에서 바라본 남연군 묘역 Ⓒ정지안
남연군 묘역을 등지고 있는 상가리 미륵불 Ⓒ정지안
상가리 이야기 : 마무리 글
가야산, 가야사와 남연군의 묘, 서산 보원사지와 마애삼존불상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상가리에서 시작하거나 또는 반대로 끝난다. 이 이야기 전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인 것처럼 전하고 또 전한다. 이처럼 전설은 과거에 만들어져서 오늘로 전해진다. 오늘 만들어진 이야기 또한 얼마 후에 또 다른 전설로 이어져갈 것이다. 사람 사는 게 그렇다.
마지막으로 ‘상가리 이야기’라는 시 한 편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정지안의 제7시집 ‘술도 못 먹는 영은이’라는 제목의 시집에 수록된 것으로 2018년 7월 해드림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정지안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초중고까지 20여년을 살았고, 10여년 꿈이란 것 때문에 서울 생활을 했다. 그 후로 직장 때문에 충남 당진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잘려 놀고 있는데, 여하튼 20여년 살고 있다. 이것저것 별것 없는 일을 하면서 산 세월을 합치니 50은 넘었고, 60도 내일 모레인가보다. 사람들은 언제나 파란하늘을 보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가끔은 하루 종일 하늘마저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런 나를 위하는 사람도 역시 나 여야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살기를 바란다. 좀 느리게 살아 보기를 바란다. 내가 느리게 사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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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산, 상가리 이야기
인문쟁이 정지안
2018-08-02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소개
충남 예산군 덕산면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이가 덕산온천을 제일 먼저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기리는 충의사(忠義祠)를 떠올려도 좋다.
예산군 덕산면 매헌 윤봉길 의사를 모신 충의사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 내 매헌 윤봉길 의사 영정 ⓒ정지안
반면, 예산 덕산(禮山 德山)의 상가리(上伽里)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상가리는 작은 시골 동네이기 때문이다.상가리를 알기 위해선 우선 가야산(伽倻山)을 알아야 한다.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을 중심으로 성주군과 거창군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1972년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상가리는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의 예산군 덕산면 쪽 입구에 속하는 동네다. 덕산면 쪽에 자리한 가야산은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덕산도립공원 입구 공원사무소 ⓒ정지안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항상 ‘산림청 200대 명산’ 중에 몇 개를 올랐는지가 화두가 된다. 그러나 사실 ‘산림청 200대 명산’이란 정확한 리스트는 없다. 과거 산림청에서 ‘찾아가는 100대 명산’을 발표하고, 그 후속으로 ‘100대 명산 플러스 우리 산 100’을 새로 지정하였는데, 이 2가지를 합쳐 부르는 듯하다. ‘가야산국립공원’의 가야산은 ‘찾아가는 100대 명산’에 속하고, ‘덕산도립공원’의 가야산은 ‘100대 명산 플러스 우리 산 100’에 속한다.
이처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가야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 전설 : 1400여 년 전 이야기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신라 시대의 승려로서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던 중 어느 토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이때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잠자던 곳이 토굴이 아니고 무덤이었으며, 물이 담겨 있던 건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채 불교 포교와 불교 관련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백제의 미소길’과 ‘상가리 미륵불’ 안내판 Ⓒ정지안
이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이야기’는 많은 부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저술은 지금까지 전해져서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큰 사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게 된 그 무덤이 상가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상가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덕사보다 더 큰 절이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백제의 미소길‘을 따라 서산 쪽으로 가면 서산 마애삼존 불상이 있고, 그 바로 직전에 보원사지(普願寺址)라는 큰 절이 있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xxx 음식점’ 앞의 안내판 Ⓒ정지안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면 당진 면천을 지나 당진포에 닿게 되고, 당진 면천면의 영탑사(靈塔寺), 고대면의 영랑사(影浪寺) 그리고 현재 정미면의 안국사지(安國寺址)가 모두 가야산과 이어진다.그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재미있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당진 영탑사에서 찍은 것으로 풀을 땋아 놓은 것을 발견하여 찍은 것이다.
당진시 면천면 영탑사의 풀 땋은 모습 Ⓒ정지안
또 하나의 사진은 영탑사 7층 석탑 뒷부분 기단부에 정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처와 이 세상 제일 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 동자승의 모습을 담았다.
당진시 면천면 영탑사의 부처님과 동자승 모습 Ⓒ정지안
또한,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는 백제 시대의 유일한 사방불(四方佛)인 예산화전리사면석불(禮山花田里四面石佛, 보물 제794호)을 볼 수 있다.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4면 석불 중 1면의 모습 Ⓒ정지안
결국, 백제와 통일신라 이전과 그 이후, 즉 1400여 년 전후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비롯한 가야산과 불교 그리고 당나라와의 교역 등의 이야기는 이 지역 주변에서 어렵게 살던 민중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런데 이 이야기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서해안 일원의 여러 사찰이나 지역에서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신 지역이 자기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연군과 남연군의 묘 : 170여 년 전 이야기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1820∼1898)은 우리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흥선대원군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1836)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부터 가야산으로 이장했다. 당대 풍수가인 정만인이 ‘2대에 걸쳐 왕이 날 자리(二代天子之地)’로 가야산을 지목했고, 이에 1846년 천년고찰인 가야사 폐사(伽倻寺 廢寺)하고 아버지의 묘를 옮겨 온다. 이 사건으로 가야사(伽倻寺)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남연군의 묘가 있는데, 나옹화상이 세운 금탑(金塔)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모습(정면에서 촬영)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모습(활개에서 촬영)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앞 가야사 터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 앞 가야사 터(현재 밭으로 사용) Ⓒ정지안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가 조선과 상업을 원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쳐 흥정하려 했다. 그 당시 조선은 조상은 물론 조상의 묘소까지도 잘 돌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 일은 결국 천주교인을 실질적으로 박해하는 동기를 제공하였고, 쇄국정책이 한층 심해진 원인이 되었다. 오페르트가 그 지역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남연군의 묘를 파헤칠 때 참여한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프랑스 신부 페론(Feron)과 공모하였기 때문이다.
남연군의 묘지에는 여러 가지 석물이 있는데, 그중 좌우에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망주석을 자세히 보면 다람쥐 같은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세호(細虎)라고 하며,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에 따라 새겨졌다. 좌승우강은 좌측은 올라가는 우측은 내려가는 동물 모양을 말한다. 남연군의 묘역에 있는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미려하게 잘 조각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균 묘의 우측 망주석 모습 Ⓒ정지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균 묘의 우측 망주석의 세호(細虎) 모습 Ⓒ정지안
또 다른 전설 : 상가리 미륵석불의 의미
남연군의 묘역에 있는 장명등(長明燈)의 남쪽을 보면 상가리 미륵불이 있다. 상가리 미륵불은 가야사를 폐사되고 남연군 묘가 들어선 것을 보기 싫어 돌아섰다고 하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에 맞게 남연군의 묘에서 미륵불을 보면 등이 보인다.
남연군 묘역 장명등에서 정확한 미륵불 방향으로 본 모습 Ⓒ정지안
상가리 미륵불 뒤에서 바라본 남연군 묘역 Ⓒ정지안
남연군 묘역을 등지고 있는 상가리 미륵불 Ⓒ정지안
상가리 이야기 : 마무리 글
가야산, 가야사와 남연군의 묘, 서산 보원사지와 마애삼존불상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상가리에서 시작하거나 또는 반대로 끝난다. 이 이야기 전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인 것처럼 전하고 또 전한다. 이처럼 전설은 과거에 만들어져서 오늘로 전해진다. 오늘 만들어진 이야기 또한 얼마 후에 또 다른 전설로 이어져갈 것이다. 사람 사는 게 그렇다.
마지막으로 ‘상가리 이야기’라는 시 한 편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정지안의 제7시집 ‘술도 못 먹는 영은이’라는 제목의 시집에 수록된 것으로 2018년 7월 해드림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상가리 이야기
예산 덕산 상가리 시골 동네가 있다
8월 중순에 비가 내리는데
하늘은 밝고 맑지는 않았어도 어둡지는 않고
비에 젓은 풀과 나무가 그런 대로 상큼하다
이 곳 상가리
사방을 둘러봐도 그냥 평범한 시골이다
그런데 이 시골 동네에
고대 백제사와 근대 조선의 왕조사가
역사로든 전설로든 지나가는 이야기 이든 간에
두루 뭉실 어우러져 있단다.
고대와 근대 사이의 많은 시간차가 있고
기록과 말 이음으로 전해지는 게 없더라도
이 시간에 별것 없이 살아냈을 우리 친구들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던 그 아픈? 것들
그것들이 뭔지 모른다.
다만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반 뭐가 다르랴
사람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그래도 얼핏 들은 몇 가지 이야기들이
그리 유쾌한 것들이 아니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픈 가슴이 된다.
상가리라는 이름의 시골 한편 동네 마을
이는 그냥 하나의 상징이다. 사람 사는 마을의
장소 정보
2018 [인문쟁이 4기]
정지안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초중고까지 20여년을 살았고, 10여년 꿈이란 것 때문에 서울 생활을 했다. 그 후로 직장 때문에 충남 당진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잘려 놀고 있는데, 여하튼 20여년 살고 있다. 이것저것 별것 없는 일을 하면서 산 세월을 합치니 50은 넘었고, 60도 내일 모레인가보다. 사람들은 언제나 파란하늘을 보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가끔은 하루 종일 하늘마저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런 나를 위하는 사람도 역시 나 여야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살기를 바란다. 좀 느리게 살아 보기를 바란다. 내가 느리게 사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예산 덕산, 상가리 이야기'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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