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포 해녀들이 바다로 나가는 계절이 돌아왔다. 영도 제주출신 해녀들은 1년 내내 물질을 하는 반면, 청사포 해녀들은 6월에서 11월까지만 물질을 한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미역 양식으로 바쁘기 때문이다. 1년 내내 쉴 틈 없이 일하는 청사포 해녀의 일상이다.
부산에도 해녀가 있다고?
부산하면 먼저 떠오르는 해운대 해수욕장과 부산 대학생들의 대표 MT 장소인 송정 해수욕장 사이, 달맞이 고개 너머 청사포라는 어촌이 있다. 유명 관광지와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해운대 신시가지와 인접해 있음에도 이곳을 다니는 대중교통은 마을버스 하나밖에 없다.
▲ 달맞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청사포 전경
부산에 해녀가 있다는 사실은 부산 사람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있다는 걸 안다고 치더라도 제주 출신 해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제주가 아니라도 바닷가라면 어디든 해녀가 있다. 제주 출신 해녀가 육지에 돈벌이 나와 정착해 물질을 한 곳도 있고 제주 해녀에게 물질하는 방법을 배워서 해녀촌이 된 곳도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그 이전에도 부산 바닷가에는 해녀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복, 해삼, 소라, 멍게를 잡는 방법은 제주 해녀에게서 배운 것이다.
“우리 엄마는 너무너무 머리가 아파서 사십 몇 살에 끝냈어. 마을에 물질하는 엄마들이 많았지. 초봄 되면 돌미역하고 그랬거든. 전복도 바닷가에 많이 있었어. 담치하고 소라하고 많이 있었는데 많이 잡아오고 그런 건 없었어. 옛날에 해녀들은 천초 뜯었거든. 도박도 있고, 깍줌바리라카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1 옛날에는 머구리2들이 전문으로 성게잡고 이랬거든. … 늦게 제주 아줌마가 한 명 왔었거든. 그 제주 아지매가 좀 깊은데 들어가가 돌 밑에 있는 전복을 따는 걸 우리가 차츰차츰 배운 거라. 우리는 전복이 천지에 있어도 딸 줄 몰라 가지고 안 했거든.”
- 김형숙 해녀
1천초(우뭇가사리), 도박(다시마의 한 종류), 깍줌바리(해초의 한 종류) 등의 해초는 식용으로도 썼지만 집짓는데 사용되는 재료와 배합하여 벽을 마감하는 건축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2 다이버나 잠수부를 일컫는 옛말
▲ 청사포 앞바다에서 물질하는 도심 속 해녀들
바다, 해녀들을 품다
청사포 해녀들은 대부분 어릴 적부터 친구거나 친척 관계이다. 다른 지역으로 시집 갔다가도 생계 문제로 고향인 청사포로 다시 돌아온 해녀도 많다. 그만큼 사는 게 만만치 않았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부터 물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물가에서라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믿을 건 바다밖에 없었다.
“시집가니까 신랑이 양반이라고 가놨더니, 뭐도 안 해주더라. 조그마한 방 하나. 해운대에 큰아버지 집 옆에 살다가. 월급도 쥐꼬리만치 그때만 해도 십오만 원.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안 되겠대. “청사포로 넘어갑시다.”카이 간다 하대.”
- 김형숙 해녀
“여 사람들은 처녀 때 물질을 했거든. 여 와 가지고 해녀 짓을 하믄 묵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다 생각했지.”
- 이신자 해녀
▲ 바늘에 찔리지 않고 성게알을 속아내는 요령은 익혔으나 손끝은 항상 까맣게 물들어 있다.
청사포 해녀들의 주요 물질 장소는 청사포 앞바다에 있는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는 다섯 개의 바위 섬 ‘다릿돌’ 인근이다. 안돌, 거뭇돌, 넙덕돌, 상좌, 석우돌이라는 기원을 알 수 없는 다릿돌 각각의 이름은 해녀들의 말로써만 전해 내려온다. 다릿돌에 붙어있는 전복, 소라 등을 찾는데 바빠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었지만 보기 좋았던 바닷속 풍경만은 기억하고 있다.
“전에는 산호랑 풀이 너무 너무 보기 좋았거든. 근데 지금은 빨간 산호, 흰 산호도 없어졌고, 누루무리한 그런 산호도 없어졌어. 물밑에 들어가면 풀이 마이 없어. 물고기도 엄청 마이 왔다 갔다 했지. 방어 그런 게 떼를 지어 가지고 가고 이랬거든. ‘쿠쿠쿠쿠’ 소리 내고. 그래 ‘엄마야’, 옆에 올까 봐 겁내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혹돔이 우리가 전복 찾으러 다니면 지도 옆에서 이래 헤아 가고 그랬거든. (두 팔을 어깨너비로 벌리며) 이만큼 하다. 그게 다 없어졌어.”
- 김형숙 해녀
▲ 멀리 배를 타고 나가지 못하는 해녀들은 인근 해안에서 물질을 한다.
고된 물질에도 자부심은 가득
1990년대 초·중반 해운대 신시가지가 처음 들어설 때, 건설업자들이 접대를 위해 청사포에 있는 횟집들을 오갈 때는 한창 사람이 북적였다고 한다. 공사가 다 끝난 뒤 손님이 줄고 횟집들은 장어구이집으로 바뀌어 그 명성을 근근이 이어나갔다. 해녀들은 그날 물질해 온 물건들을 판을 벌려 직접 팔기도 하지만, 장어구이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접시에 담은 성게를 한 접시 만원에 팔기도 한다. 아직도 장사가 익숙지 않아 쭈뼛쭈뼛 가게 손님에게 접시를 내밀어 본다.
“남 앞에 가면 “사소.”라는 말을 못해. 내가 죽을 판 살 판 일은 하겠는데, 넘 앞에 가가 “이거 사소.” 말은 잘 못해. 마, 마음 편하게 일만 하지. 지금도 성게 팔러 가면, 들고 따라가는 기라. 지 꺼 다 팔아 놓으면 내 꺼 팔아 주면 팔아 오고.”
– 이신자 해녀
▲ 마을 사업으로 만들어진 청사포 마켓 앞에 청사포 해녀들의 좌판이 깔린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제 먹을 걸 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에 남모르는 설움도 없지 않다.
“해녀보고 ‘버지기’라 안 했나. 옷 벗고 한다고. ‘해녀’ 이라면 되는데 왜 ‘버지기’라 하냔 말이야. 우리들한테도 ‘해녀’이라면 암말 안 하는데 ‘버지기’라 이라면 우리들도 그러는 거지. “너거는 집에 가면 어떻게 사노, 우리는 당당하게 내 벌이가 이래 사는데 버지기면 어때” 우리가 이란다 아이가. 직업은 귀천이 없어서 도둑질만 빼고 다 하면 돼. 내가 노력을 하면 돼.”
- 김수자 해녀
▲ 김수자 해녀는 바가지가 걸린 게 이쁘니 사진을 꼭 찍어가라고 했다.
설움은 속으로 묻어버리고, 물질로 자식들을 다 키워놓은 지금은 해녀들끼리 모여 일하는 틈틈이 어울려 노는 게 낙이다. 청사포 해녀 사이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정영순 해녀는 내내 유쾌하게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삶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태풍 올 때. 배 짜매러 나오는데 방파제에 서 있는데 (남편이) 파도에 싹 씰어내려 가뿟는데 사람이 없어. …
잔정이야 왜 없겠느냐만은 이제 세월이 흘러가고 그카이까네. 젊을 적에는 아아 둘이 데꼬 살라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나갔고,
인자 또 나이 무이까네 요새 차라리 있었으면 ‘손주들 보고 얼매나 좋다 하겠노.’ 그런 마음이지.”
- 정양순 해녀
▲ 이신자 해녀와 정양순 해녀. 서로 돕지 않으면 채비도 힘들다.
사라져가는 풍경을 묵묵히 지키는 청사포 여전사들
지난 해 어느 날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라는 것이 생기더니 지금은 주말이면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북적북적해졌다. 처음 다릿돌 전망대가 생긴다고 할 때 해녀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다릿돌 전망대가 생긴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곳곳에 식당과 카페가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했고 화려하게 꾸민 가게들에 가리고 밀려 해녀들이 펼친 좌판은 사람들에게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네는 급격하게 변화해가고 청사포 해녀의 뒤를 이을 후배 해녀들도 없다. 청사포 해녀의 물질은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사라지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한 오 년만 하고 못하지 싶으다. 몸이 허락한다면 오 년도 더 할 수 있고. 우리 세대에 몇 년 안 하면 물이 끝날 거야. 나이 좀 먹으면 하겠나.
다 몸 아파쌌는데. 하나이 둘이 안 하다 보면 물질 안 하는 거지. 그래저래 몇 년 안 하면 끝나는 거지 뭐.”
- 김형숙 해녀
그러거나 말았거나 그녀들은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희희낙락하며 사랑방에서 뒹굴며 노는 모습은 여느 경로당 풍경과 다를 바 없지만 물때가 왔을 때 채비를 하고 어깨에 그물을 척 걸고 나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전사의 모습이다.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서로 의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는, 청사포 해녀들의 삶의 방식이다.
“웃동네에서 시집 온 사람도 있고 다 아는 사람들이다. 이 동네 태어나서 이 동네 사는 사람도 몇이 된다.
사람, 문화, 예술, 장소, 지역을 기록하고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빨간집>의 집사이다. 청사포 해녀, 흰여울문화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구술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지금은 당감동 주민 구술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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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라져가는 풍경을 묵묵히 지키는 청사포 여전사들
부산 청사포 해녀들
배은희
2018-07-06
청사포 해녀들이 바다로 나가는 계절이 돌아왔다. 영도 제주출신 해녀들은 1년 내내 물질을 하는 반면, 청사포 해녀들은 6월에서 11월까지만 물질을 한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미역 양식으로 바쁘기 때문이다. 1년 내내 쉴 틈 없이 일하는 청사포 해녀의 일상이다.
부산에도 해녀가 있다고?
부산하면 먼저 떠오르는 해운대 해수욕장과 부산 대학생들의 대표 MT 장소인 송정 해수욕장 사이, 달맞이 고개 너머 청사포라는 어촌이 있다. 유명 관광지와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해운대 신시가지와 인접해 있음에도 이곳을 다니는 대중교통은 마을버스 하나밖에 없다.
▲ 달맞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청사포 전경
부산에 해녀가 있다는 사실은 부산 사람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있다는 걸 안다고 치더라도 제주 출신 해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제주가 아니라도 바닷가라면 어디든 해녀가 있다. 제주 출신 해녀가 육지에 돈벌이 나와 정착해 물질을 한 곳도 있고 제주 해녀에게 물질하는 방법을 배워서 해녀촌이 된 곳도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그 이전에도 부산 바닷가에는 해녀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복, 해삼, 소라, 멍게를 잡는 방법은 제주 해녀에게서 배운 것이다.
“우리 엄마는 너무너무 머리가 아파서 사십 몇 살에 끝냈어. 마을에 물질하는 엄마들이 많았지. 초봄 되면 돌미역하고 그랬거든. 전복도 바닷가에 많이 있었어. 담치하고 소라하고 많이 있었는데 많이 잡아오고 그런 건 없었어. 옛날에 해녀들은 천초 뜯었거든. 도박도 있고, 깍줌바리라카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1 옛날에는 머구리2들이 전문으로 성게잡고 이랬거든. … 늦게 제주 아줌마가 한 명 왔었거든. 그 제주 아지매가 좀 깊은데 들어가가 돌 밑에 있는 전복을 따는 걸 우리가 차츰차츰 배운 거라. 우리는 전복이 천지에 있어도 딸 줄 몰라 가지고 안 했거든.”
- 김형숙 해녀
1 천초(우뭇가사리), 도박(다시마의 한 종류), 깍줌바리(해초의 한 종류) 등의 해초는 식용으로도 썼지만 집짓는데 사용되는 재료와 배합하여 벽을 마감하는 건축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2 다이버나 잠수부를 일컫는 옛말
▲ 청사포 앞바다에서 물질하는 도심 속 해녀들
바다, 해녀들을 품다
청사포 해녀들은 대부분 어릴 적부터 친구거나 친척 관계이다. 다른 지역으로 시집 갔다가도 생계 문제로 고향인 청사포로 다시 돌아온 해녀도 많다. 그만큼 사는 게 만만치 않았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부터 물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물가에서라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믿을 건 바다밖에 없었다.
“시집가니까 신랑이 양반이라고 가놨더니, 뭐도 안 해주더라. 조그마한 방 하나. 해운대에 큰아버지 집 옆에 살다가. 월급도 쥐꼬리만치 그때만 해도 십오만 원.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안 되겠대. “청사포로 넘어갑시다.”카이 간다 하대.”
- 김형숙 해녀
“여 사람들은 처녀 때 물질을 했거든. 여 와 가지고 해녀 짓을 하믄 묵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다 생각했지.”
- 이신자 해녀
▲ 바늘에 찔리지 않고 성게알을 속아내는 요령은 익혔으나 손끝은 항상 까맣게 물들어 있다.
청사포 해녀들의 주요 물질 장소는 청사포 앞바다에 있는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는 다섯 개의 바위 섬 ‘다릿돌’ 인근이다. 안돌, 거뭇돌, 넙덕돌, 상좌, 석우돌이라는 기원을 알 수 없는 다릿돌 각각의 이름은 해녀들의 말로써만 전해 내려온다. 다릿돌에 붙어있는 전복, 소라 등을 찾는데 바빠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었지만 보기 좋았던 바닷속 풍경만은 기억하고 있다.
“전에는 산호랑 풀이 너무 너무 보기 좋았거든. 근데 지금은 빨간 산호, 흰 산호도 없어졌고, 누루무리한 그런 산호도 없어졌어. 물밑에 들어가면 풀이 마이 없어. 물고기도 엄청 마이 왔다 갔다 했지. 방어 그런 게 떼를 지어 가지고 가고 이랬거든. ‘쿠쿠쿠쿠’ 소리 내고. 그래 ‘엄마야’, 옆에 올까 봐 겁내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혹돔이 우리가 전복 찾으러 다니면 지도 옆에서 이래 헤아 가고 그랬거든. (두 팔을 어깨너비로 벌리며) 이만큼 하다. 그게 다 없어졌어.”
- 김형숙 해녀
▲ 멀리 배를 타고 나가지 못하는 해녀들은 인근 해안에서 물질을 한다.
고된 물질에도 자부심은 가득
1990년대 초·중반 해운대 신시가지가 처음 들어설 때, 건설업자들이 접대를 위해 청사포에 있는 횟집들을 오갈 때는 한창 사람이 북적였다고 한다. 공사가 다 끝난 뒤 손님이 줄고 횟집들은 장어구이집으로 바뀌어 그 명성을 근근이 이어나갔다. 해녀들은 그날 물질해 온 물건들을 판을 벌려 직접 팔기도 하지만, 장어구이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접시에 담은 성게를 한 접시 만원에 팔기도 한다. 아직도 장사가 익숙지 않아 쭈뼛쭈뼛 가게 손님에게 접시를 내밀어 본다.
“남 앞에 가면 “사소.”라는 말을 못해. 내가 죽을 판 살 판 일은 하겠는데, 넘 앞에 가가 “이거 사소.” 말은 잘 못해. 마, 마음 편하게 일만 하지. 지금도 성게 팔러 가면, 들고 따라가는 기라. 지 꺼 다 팔아 놓으면 내 꺼 팔아 주면 팔아 오고.”
– 이신자 해녀
▲ 마을 사업으로 만들어진 청사포 마켓 앞에 청사포 해녀들의 좌판이 깔린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제 먹을 걸 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에 남모르는 설움도 없지 않다.
“해녀보고 ‘버지기’라 안 했나. 옷 벗고 한다고. ‘해녀’ 이라면 되는데 왜 ‘버지기’라 하냔 말이야. 우리들한테도 ‘해녀’이라면 암말 안 하는데 ‘버지기’라 이라면 우리들도 그러는 거지. “너거는 집에 가면 어떻게 사노, 우리는 당당하게 내 벌이가 이래 사는데 버지기면 어때” 우리가 이란다 아이가. 직업은 귀천이 없어서 도둑질만 빼고 다 하면 돼. 내가 노력을 하면 돼.”
- 김수자 해녀
▲ 김수자 해녀는 바가지가 걸린 게 이쁘니 사진을 꼭 찍어가라고 했다.
설움은 속으로 묻어버리고, 물질로 자식들을 다 키워놓은 지금은 해녀들끼리 모여 일하는 틈틈이 어울려 노는 게 낙이다. 청사포 해녀 사이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정영순 해녀는 내내 유쾌하게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삶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태풍 올 때. 배 짜매러 나오는데 방파제에 서 있는데 (남편이) 파도에 싹 씰어내려 가뿟는데 사람이 없어. …
잔정이야 왜 없겠느냐만은 이제 세월이 흘러가고 그카이까네. 젊을 적에는 아아 둘이 데꼬 살라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나갔고,
인자 또 나이 무이까네 요새 차라리 있었으면 ‘손주들 보고 얼매나 좋다 하겠노.’ 그런 마음이지.”
- 정양순 해녀
▲ 이신자 해녀와 정양순 해녀. 서로 돕지 않으면 채비도 힘들다.
사라져가는 풍경을 묵묵히 지키는 청사포 여전사들
지난 해 어느 날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라는 것이 생기더니 지금은 주말이면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북적북적해졌다. 처음 다릿돌 전망대가 생긴다고 할 때 해녀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다릿돌 전망대가 생긴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곳곳에 식당과 카페가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했고 화려하게 꾸민 가게들에 가리고 밀려 해녀들이 펼친 좌판은 사람들에게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네는 급격하게 변화해가고 청사포 해녀의 뒤를 이을 후배 해녀들도 없다. 청사포 해녀의 물질은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사라지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한 오 년만 하고 못하지 싶으다. 몸이 허락한다면 오 년도 더 할 수 있고. 우리 세대에 몇 년 안 하면 물이 끝날 거야. 나이 좀 먹으면 하겠나.
다 몸 아파쌌는데. 하나이 둘이 안 하다 보면 물질 안 하는 거지. 그래저래 몇 년 안 하면 끝나는 거지 뭐.”
- 김형숙 해녀
그러거나 말았거나 그녀들은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희희낙락하며 사랑방에서 뒹굴며 노는 모습은 여느 경로당 풍경과 다를 바 없지만 물때가 왔을 때 채비를 하고 어깨에 그물을 척 걸고 나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전사의 모습이다.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서로 의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는, 청사포 해녀들의 삶의 방식이다.
“웃동네에서 시집 온 사람도 있고 다 아는 사람들이다. 이 동네 태어나서 이 동네 사는 사람도 몇이 된다.
다 속을 안다 아이가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지.”
- 김형숙 해녀
“숨도 안 쉬고 벌인 돈, 저승 갔다가 오는 돈 아니가? 그래도 마음은 편타.
십 원을 벌이기나, 만 원을 벌이기나 내 가고 싶으면 가고, 놀고 싶으면 놀고.”
- 김업이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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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봉기
장소 정보
사람, 문화, 예술, 장소, 지역을 기록하고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빨간집>의 집사이다. 청사포 해녀, 흰여울문화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구술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지금은 당감동 주민 구술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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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부산] 사라져가는 풍경을 묵묵히 지키는 청사포 여전사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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