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전라도닷컴이 마련한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그이를 처음 보았다. ‘영판오진상’을 받은 이재관씨.
“모다 일흔 넘으신 어르신들 열대여섯 명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갖고 열심히 산 것이 좋아 보였는가 전국 각지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막 따라 들와불었어라. 곡성 인구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고 도지사가 상을 준다고 허드니 종우떼기 한나를 주드만.”
‘이것을 어따 쓰까’ 궁리 끝에 그이는 그 상장을 코팅해서 표가 나게 지게에 붙이고 다니노라 했다. 그이가 좌중에 내어놓은 맺음말이 뭉클하였다. “시방 농촌 인구가 삼백만으로 쫄아불었어라. 많헌 사람들이 촌에 와서 노인들 지혜 없어져뿔기 전에 받아갖고 살 만헌 시상으로 맹글어가문 좋겄는디….”
사라져가는 도서관과 같은 마을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지혜를 받자오며 살아가고 있는 이재관(56·전남 곡성군 겸면 괴정리)씨. “이 좋은 것을 나 혼자 누리기 아까워서” 그이는 인터넷 세상에 ‘이야기가 있는 산골-귀농사랑방’을 열고 ‘참죽나무’라는 이름으로 마중물을 부어가며 ‘귀농 뽐뿌질’을 계속하고 있다.
▲ 곡성 농부 이재관 씨
“내가 부당한 것에는 놈보다 빨리 부닥쳐요”
아내 김귀숙(55)씨와 아홉 마지기 논농사에 500여 평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농부 이재관은 농사꾼의 7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직업훈련원을 나와 열아홉 살에 울산 현대엔진의 선반 노동자가 됐다. 철야와 특근을 밥먹듯이 하면서 한 달에 500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1987년 현대그룹엔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골수 노조원 이재관에게는 투쟁의 삶이 시작됐다. 1989년 그가 다니던 회사는 현대중공업에 합병됐고 1990년 ‘골리앗투쟁’ 당시 그는 현대중공업 노조 첫 편집실장으로 ‘참붓언론’과 ‘민주항해’를 통해 현장의 동료들에게 분노와 눈물과 위안과 투지를 전했고, 투쟁속보를 제작 배포했다. 그런 이유로 구속되어 1년 옥살이를 했다.
“내가 부당한 것에는 놈보다 빨리 부닥쳐요.” 가진 것 없는 이 남자는 도무지 굽힘이 없었다. 감옥 안에서도 재소자들의 권익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 안에서도 계속 싸우고 왈왈 짖는 거예요.”
‘왈왈이’로 불렸던 수감생활의 생생한 증언을 한 권의 책에 담은 《왈왈이들의 합창》(보리)으로 제7회 전태일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보 만들면서 시작한 그림을 생활화한 것이 줄곧 이어져 최근에는 《농부 이재관의 그림일기》(고인돌)를 묶어냈다.
▲ <농부 이재관의 그림일기>에 등장하는 이웃들
마흔 살 되던 해 그이가 농사를 짓고자 삶의 자리를 옮긴 곳은 전북 부안. 운명처럼 또 싸워야 할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 부안은 방사능폐기물처리장 유치반대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반핵농성장이었다.
“거리거리 벼랑박에 반핵평화의 상징인 노랑 뺑끼칠을 하고 다녔어요.” 200여 군데 담장에 반핵 구호와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을 했다. 아이들 등교 거부를 시작하고 민들레학교를 꾸려서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이는 민들레학교 선생, ‘벼랑박에 기림(그림) 기리는(그리는) 사람’으로 통했다.
2년 반 넘은 싸움 끝에 결국 군민들이 이겼다. 4년간 살았던 부안을 떠난 것은 새만금이 막히면서였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온 가족이 상경, 아스팔트 위에서 무박3일을 보내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 있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질을 스스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이의 신념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세상 사는 법이 그러하다. 안정된 직장을 청춘의 종착역으로 삼지 않고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스스로 집 짓고 스스로 꾸려가는 삶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인지라, 세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 배우고 스스로 자라는 걸 응원하고 지지하며 지켜보고 있다.
“그 많던 똥장군님들이 어디로 갔을까”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 질 때 심는다’는 오래된 말을 아름답다고 가슴에 새긴 그이는 ‘모든 것의 시작은 철을 아는 것, 철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뜻이 같은 이들이 모여 귀농인모임 ‘철’을 만든 것은 ‘철든 삶’을 살자는 뜻이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작사 작곡한 노래가 ‘철없다’.
<어른들은 정말 철없다 아이들이 무얼 보고 배울까 사람들은 참 철없다…>
그이가 꿈꾸는 농업은 ‘자기 똥을 3년 못 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시절의 순환농업. “그 많던 똥장군님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안타깝다”는 그이는 생태뒷간 지어놓고 똥 살리고 땅 살리는 거룩한 일을 하려고 아침마다 상쾌한 걸음으로 뒷간에 간다.
▲ 이재관 씨 집의 생태 뒷간(좌) 농약도 비료도 치지 않은 마늘밭의 기름진 흙(우)
멧돼지가 고구마를 다 먹어서 고구마를 세 번 다시 심었을 적엔 ‘산돈님은 각성하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아 이웃들을 웃게 한 그이. 자연을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폭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 생각하기에 소농 제철농사를 고집한다. 농약도 제초제도 비료도 치지 않고 비닐도 덮지 않고 갈아엎지도 않고 오로지 간섭하지 않음으로 흙을 살리려 한다.
“태평농법이라기보다 방치농법이다. 땅에 간섭하지 않고 거름 주며 정성을 들이다 보니 땅이 달라졌다. 지렁이 굼벵이가 마음 놓고 살고 풀과 작물이 공생하는 생명의 땅이 됐다.”
사람들은 “힘들지 않아? 편리한 기계를 두고 왜?”라고 묻는다. “농자재 값이 안 들고 기계 가진 사람의 일정에 나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 땅은 간섭하는 일을 줄이고 믿고 있으면 꼭 보답한다.” 그이가 만져보라고 권하는 마늘밭의 흙은 검고 기름지고 폭신폭신 보드라왔다. 자랑할 만하였다.
[곡성] ‘작고도 큰 일꾼들’과 한통속으로
곡성 농부 이재관
남인희
2018-04-10
수년 전 전라도닷컴이 마련한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그이를 처음 보았다. ‘영판오진상’을 받은 이재관씨.
“모다 일흔 넘으신 어르신들 열대여섯 명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갖고 열심히 산 것이 좋아 보였는가 전국 각지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막 따라 들와불었어라. 곡성 인구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고 도지사가 상을 준다고 허드니 종우떼기 한나를 주드만.”
‘이것을 어따 쓰까’ 궁리 끝에 그이는 그 상장을 코팅해서 표가 나게 지게에 붙이고 다니노라 했다. 그이가 좌중에 내어놓은 맺음말이 뭉클하였다. “시방 농촌 인구가 삼백만으로 쫄아불었어라. 많헌 사람들이 촌에 와서 노인들 지혜 없어져뿔기 전에 받아갖고 살 만헌 시상으로 맹글어가문 좋겄는디….”
사라져가는 도서관과 같은 마을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지혜를 받자오며 살아가고 있는 이재관(56·전남 곡성군 겸면 괴정리)씨. “이 좋은 것을 나 혼자 누리기 아까워서” 그이는 인터넷 세상에 ‘이야기가 있는 산골-귀농사랑방’을 열고 ‘참죽나무’라는 이름으로 마중물을 부어가며 ‘귀농 뽐뿌질’을 계속하고 있다.
▲ 곡성 농부 이재관 씨
“내가 부당한 것에는 놈보다 빨리 부닥쳐요”
아내 김귀숙(55)씨와 아홉 마지기 논농사에 500여 평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농부 이재관은 농사꾼의 7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직업훈련원을 나와 열아홉 살에 울산 현대엔진의 선반 노동자가 됐다. 철야와 특근을 밥먹듯이 하면서 한 달에 500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1987년 현대그룹엔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골수 노조원 이재관에게는 투쟁의 삶이 시작됐다. 1989년 그가 다니던 회사는 현대중공업에 합병됐고 1990년 ‘골리앗투쟁’ 당시 그는 현대중공업 노조 첫 편집실장으로 ‘참붓언론’과 ‘민주항해’를 통해 현장의 동료들에게 분노와 눈물과 위안과 투지를 전했고, 투쟁속보를 제작 배포했다. 그런 이유로 구속되어 1년 옥살이를 했다.
“내가 부당한 것에는 놈보다 빨리 부닥쳐요.” 가진 것 없는 이 남자는 도무지 굽힘이 없었다. 감옥 안에서도 재소자들의 권익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 안에서도 계속 싸우고 왈왈 짖는 거예요.”
‘왈왈이’로 불렸던 수감생활의 생생한 증언을 한 권의 책에 담은 《왈왈이들의 합창》(보리)으로 제7회 전태일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노보 만들면서 시작한 그림을 생활화한 것이 줄곧 이어져 최근에는 《농부 이재관의 그림일기》(고인돌)를 묶어냈다.
▲ <농부 이재관의 그림일기>에 등장하는 이웃들
마흔 살 되던 해 그이가 농사를 짓고자 삶의 자리를 옮긴 곳은 전북 부안. 운명처럼 또 싸워야 할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 부안은 방사능폐기물처리장 유치반대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반핵농성장이었다.
“거리거리 벼랑박에 반핵평화의 상징인 노랑 뺑끼칠을 하고 다녔어요.” 200여 군데 담장에 반핵 구호와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을 했다. 아이들 등교 거부를 시작하고 민들레학교를 꾸려서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이는 민들레학교 선생, ‘벼랑박에 기림(그림) 기리는(그리는) 사람’으로 통했다.
2년 반 넘은 싸움 끝에 결국 군민들이 이겼다. 4년간 살았던 부안을 떠난 것은 새만금이 막히면서였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온 가족이 상경, 아스팔트 위에서 무박3일을 보내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 있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질을 스스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이의 신념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세상 사는 법이 그러하다. 안정된 직장을 청춘의 종착역으로 삼지 않고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스스로 집 짓고 스스로 꾸려가는 삶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인지라, 세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 배우고 스스로 자라는 걸 응원하고 지지하며 지켜보고 있다.
“그 많던 똥장군님들이 어디로 갔을까”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 질 때 심는다’는 오래된 말을 아름답다고 가슴에 새긴 그이는 ‘모든 것의 시작은 철을 아는 것, 철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뜻이 같은 이들이 모여 귀농인모임 ‘철’을 만든 것은 ‘철든 삶’을 살자는 뜻이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작사 작곡한 노래가 ‘철없다’.
<어른들은 정말 철없다 아이들이 무얼 보고 배울까 사람들은 참 철없다…>
그이가 꿈꾸는 농업은 ‘자기 똥을 3년 못 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시절의 순환농업. “그 많던 똥장군님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안타깝다”는 그이는 생태뒷간 지어놓고 똥 살리고 땅 살리는 거룩한 일을 하려고 아침마다 상쾌한 걸음으로 뒷간에 간다.
▲ 이재관 씨 집의 생태 뒷간(좌) 농약도 비료도 치지 않은 마늘밭의 기름진 흙(우)
멧돼지가 고구마를 다 먹어서 고구마를 세 번 다시 심었을 적엔 ‘산돈님은 각성하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아 이웃들을 웃게 한 그이. 자연을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폭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 생각하기에 소농 제철농사를 고집한다. 농약도 제초제도 비료도 치지 않고 비닐도 덮지 않고 갈아엎지도 않고 오로지 간섭하지 않음으로 흙을 살리려 한다.
“태평농법이라기보다 방치농법이다. 땅에 간섭하지 않고 거름 주며 정성을 들이다 보니 땅이 달라졌다. 지렁이 굼벵이가 마음 놓고 살고 풀과 작물이 공생하는 생명의 땅이 됐다.”
사람들은 “힘들지 않아? 편리한 기계를 두고 왜?”라고 묻는다. “농자재 값이 안 들고 기계 가진 사람의 일정에 나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 땅은 간섭하는 일을 줄이고 믿고 있으면 꼭 보답한다.” 그이가 만져보라고 권하는 마늘밭의 흙은 검고 기름지고 폭신폭신 보드라왔다. 자랑할 만하였다.
월간 <전라도닷컴> 기자로 전라도 고샅고샅 어르신들의 생애와 정신을 받아적고 있다.
* 월간 <전라도닷컴>은 오늘 아니면 기록하지 못할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를 기록하는 잡지이다. 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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