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남 어르신(93·전남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달마지마을)은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돈 벌러 일본에 갔던 아버지는 그이가 네 살 되던 해, 빈 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미소에 딸린 한 평 방이 여덟 식구의 가난한 둥지였다.
“밤으로는 남자들은 다 놈의집 사랑으로 자러 가고 어머니만 애기 데꼬 그 방에서 자는 거여.”
단칸방에 여덟 식구 살던 조씨집 장남 조태남이 성전면 유지가 된 건 마흔 살.
“마을 사랑에를 나가면 자네는 어디서 돈보따리를 주섰는가 나좀 갤쳐주소 그래. 한 20년 사이에 부자가 돼노니까.”
누가 묻든 그이의 대답은 간명하다. “누가 돈보따리를 갖다매낀다 말이요. 줍는 방법을 터득허문 되야라.”
“잘 입어도 못 입어도 나는 나여”
‘흙수저’ 조태남에겐 ‘밑천’이 무진장 있었다 한다.
“나는 젊었은께 그것이 밑천이고, 나는 부지런한께 그것이 밑천이고. 그러문 옳다, 그 두 가지 밑천을 이용하문 부자가 될 수 있겄다, 그런 결론을 내렸소.”
그때로부터 한시를 놀지 않았다.
“모타로 기계를 돌려서 새내끼(새끼)를 꽈. 한 시간에 한 바꾸를 빼내문 딱 쌀 한 되여. 하래내(하루 내내) 일허고 쌀 한 되던 받던 시절이여. 한 시간 놀문 하래 품삯이 없어진다 그 생각에 한 시간을 못 놀아. 밤이고 낮이고 새내끼를 꼬고 있어.”
“지비(집이,집=댁, 2인칭대명사)는 복받았소!”라고 말하는 이들한테 그이는 대답한다.
▲ 조태남 어르신. 편안할 적에도 위태로울 때를 잊지 않는다는 ‘안불망위’는 그의 인생철학
“복은 이 우주에가 따복(다복다복) 차 갖고 있는 것이 복이요. 놈이 복을 가지간다고 그 담에 나는 가지갈 것이 없는 것이 아니요. 복은 늘 따복 차 있으니 노력한 만큼 줍는 것이요.”
‘안불망위(安不忘危)'
버려진 것을 주워다 걸었다는 마루벽의 액자, 그 글자 속에 담긴 뜻을 새기고 산다. 편안할 적에도 위태로울 때를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시방 기와집 속에 들어앉았다고 어제의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농사를 50마지기를 지슴서(지으면서) 당아(아직) 꾸정 바께쓰 한나를 안사봤어.”
‘헌 놈을 새 놈으로’ 만드는 부지런과 재주가 있는 조태남. 그이한테는 소모품도, 폐품도 없다. 남한테는 ‘못쓸 것’도 그이 한테는 ‘쓸 것’. 자식들이 사다 준 구두를 곳간에 여러 켤레 쟁여 두고도 노상 낡을 대로 낡은 헌 신을 끌고 다닌다. 헌옷이 편하고 흙 묻은 옷이 편하다는 그이.
“옛말이 있어. 헌옷입고 일하기 좋고, 새옷 입고 말하기 좋다고.”
말하기보다 일하기 좋아하는 그이는 헌옷이 좋고 떨어진 신발이 편하다.
“똥장군을 비단보자기로 덮고 밥상을 꺼적으로 덮는다고 속이 바꽈지겄는가. 잘 입어도 못 입어도 나는 나여.”
“나는 평생토록 이 가방 한나를 가져봤소”
사람들은 그이의 정원에 와서 허우대 좋은 나무만 보고 간다. 구석구석 그이가 아껴 둔 보물들에 눈대는 이 없다. 이를테면 나무 아래 포강포강(포개어 포개어) 쌓아둔 사금파리 조각들*이 그이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다.
* 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
▲ 마당에 쌓아둔 사금파리 조각들
“어떤 할무니가 이 그륵을 낼치고(떨어뜨리고) 그 순간 그 가심이 얼마나 깜짝 놀랬을꼬 나는 그런 생각을 해. 그런 생각을 허고 모태논(모아 놓은) 것이여.”
그릇 조각들 사이엔 더러 청자 조각도 끼여들어 있을 터.
“고려자기를 바다에서 건지문 보물 몇 점 인양했다고 막 방송을 하고 그래.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어떻게 느끼냐, 옛날 옛적에 그 고려자기를 싣고 그 나막신짝만한 배로 무변대해를 건너 중국으로 폴러 가. 그러다가 무난히 못가고 배가 파손나서 깔앙근(가라앉은) 것이여.”
그이의 측은지심은 시간을 건너뛰어 난파한 배에 탔을 사람들에 가 닿는다.
“수백 년 전에 그 배가 파손나고 지그 아부지가 죽고 지그 아들이 죽은 그 식구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요.”
얼굴 모르는 옛적 사람의 한숨과 눈물도 내 것인양 애잔하게 보듬는 조태남 어르신에겐 공부가 원이었던 어린 소년의 마음이 담긴 낡은 가방 하나가 있다.
“일고야닯 살 묵었을 때 야학 댕긴 책가방이요. 나는 평생토록 이 가방 한나를 가져봤소.”
두꺼운 깍대기가 낡을 대로 낡아 책가방이라고는 짐작키도 어려운 팔십 년이 넘은 가방을 본다. 표지가 반쯤 해진 가계부는 성전중학교 서무과에서 내버린 것을 주워다 쓴 것이다.
“몇 년도에 농사를 내가 요러고 지었다 이런 것을 적어논 것이여.”
▲ 농사 기록이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는 오래된 가계부
추곡수매가와 인상률을 연도별로 정리한 페이지도 있다. 성전면사무소 직원이 이 기록이 치밀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더란다.
“나는 농사로 치산한 사람이니 농사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기록할라는 욕심이 있었소.”
▲ 곳간 벽을 빼곡히 매운 농기구들
마당 앞으로 당당히 들어앉은 곳간 벽에는 농기구들이 가지런하다. “놈은 건덕꿀(건성)로 봐도 이것이 다 내한테는 보물이요.”
수장고가 따로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이의 보관 품목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고치러 가면 “인자 지발 그만 땡개부씨요(던져 버리시오)”라는 말을 듣는 괘종시계도 그 중 하나. 시계포 주인은 새것보다 옛것이 좋은 그이인 줄을 아직도 모르나 보다. 한번 손에 들어온 인연은 끝까지 지켜내는 그이인 줄 모르나 보다.
‘걸럭지(걸레)’와 ‘가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간직한 것들마다 풀려나오는 사연들은 명주실 아홉 타래를 풀어도 닿을 것 같지 않은 우물 속처럼 깊고도 깊다.
“이 지갑은 스물일곱 살에 군인에 가서 헌 놈을 산 것이요. 그 군인은 나한테 싸게 폴고 그 돈으로 내 앞에서 빵 사묵었어. 그 사람 빵은 폴세(벌써) 없지만 지갑은 안즉 내한테 있소.”
그이가 스물세 살 되던 정월에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부의록(賻儀錄)’도 있다. ‘무자년 정월 13일’이라고 표지에 씌어 있다.
“얼마나 없었으문 요 손바닥만헌 요런 종우를 매서 썼을 것이요. 요것은 나 군인에 가고 없을 때 아부지 돌아가셨을 적 부의요. 이것은 백 년 전에 우리 할아부지한테 제관으로 나오시라고 통지 온 것이요.”
그이의 6대조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적 부의책도 여즉 지니고 있다.
▲ 부의책이며 온갖 기록이 담긴 책바구니
“아무개 집에서 콩을 한 되 갖고 왔다, 밤을 얼마, 감홍시를 몇 개, 그런 부의가 여그 다 들어 있어.”
그이한테는 추사가 쓴 먹글씨보다 귀한 것들이다.
“내가 이것을 만지는 것은 내 6대조 할아부지와 대화를 하고 내 할무니의 손을 잡는 것이오. 진품명품에 나가서 값을 받지는 못헐지라도 내 보물은 이것이여.”
그리 귀한 것들이 집집이 없으랴. 오래된 집들을 고치면서 뉘 집이든 옛것은 모다 싹 쓸어서 쓰레기에 넣고 소각을 해 버리는 게 그이는 가슴 아프다.
“우리 동네 어떤 아부지가 놈의 일을 댕긴디 모자도 없이 수건 한나 갖고 댕애. 머리빡에 하래내 찌고 있다가 먼지 탱탱 찐 놈을 저닉밥 묵을 때는 탁탁 털어 갖고 방에 들어가.”
일하는 집에서 내어주는 저녁밥을 그 사람은 못 먹었더란다.
“시늉으로 쪼깐 묵고 그 놈을 수건에다 싸. 그라문 옆에 쥔네집 일꾼들이 한 숟구락썩 덜어줘. 지그는 쥔네집서 끄니마다 배부르게 묵은다고. 그 놈을 싸갖고 와서 자석들을 믹임서 지그 아부지는 입도 안 다시고 보라꼬 있어. 자석들을 그렇게 키운 것이여.”
그 자식들한테 보배가 무엇이겠느냐는 그이의 물음은 준엄하다.
“지그 아부지가 지그 애래서 안 귐겨(굶겨)죽일라고 놈의 일허고 밥 싸갖고 댕인 수건이 그 집 보배여. 놈이 볼 때는 걸럭지(걸레)지만 지그한테는 그것이 가보여. 그란디 그런 것을 못쓴다고 땡개불어.”
그이가 사는 달마지마을*에는 농촌 여느 마을처럼 흔히 들시암이라고 부르는 샘이 있다.
* 월출산 끝자락 월각산 아래 자리한 송월리 대월(待月)마을을 한글로 풀어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으로, 달이 유난히 가까이 보여서 달맞이하기 좋다는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들에 가다 보문 어덕 밑에 옴팡하게 옹돌시암*이 있거든.”
* ‘시암’은 ‘샘’을 이르는 전라도말로 ‘옹돌시암’은 ‘옹달샘’이다. 지형에 따라 저절로 생겨난 데도 있지만 들일 후에 잠깐 흙손을 씻을 수 있도록 작고 오목하게 땅을 파서 만든 샘이다
그 시암이 소용될 데 없다고 묻혀지는 것이 아깝고 짠하다.
“전에 구식 어머니들은 애기를 키움서 방에다 가돠놓고 밭을 매러 가. 봐줄 사람이 없어. 밭을 맴서 맘이 편했을 리가 없어. 그러다가 인자 점심때가 되문 애기 젖을 물리러 와. 땀흘린 미영 치매저고리 입고 오다가 그 옹돌시암에서 젖통을 시쳐. 더운 몸이라 더운 젖통 그대로 애기를 믹이문 행이나 설사할까 무선께.”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그런 시암 앞에 그이는 문화재처럼 푯말을 딱 세워놓고 싶다. <이것은 우리들 구식 어머니가 밭을 매다가 정신도 넋도 없이 집으로 옴시로 애기가 탈날까 싶은께 젖통 시치고 와서 애기를 먹이던, 그 어머니 젖통 씻던 시암이다. 옛날에 우리 구식 어머니들은 요렇게 생활을 이뤄나가면서 우리를 길르셨다> 또박또박 그렇게 새기고 싶다.
▲ 오래된 샘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의 집에는 여전히 오래된 우물이 있다
마당에도 곳간에도 방안에도 들에도 보물이 넘치는 그이. 그렇다면 ‘조태남의 보물 1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즉답하신다.
“우리 집에 화재가 났다 하문 제일 모냐(먼저) 갖고 나갈 것을 내 맘으로 정해 놓고 사요. 어머니는 사진도 없으니 아부지 사진 한나요.”
눈에 스치는 그 무엇이라도 기나긴 세월 건너에서 빛나는 사람의 속내를 짚어내고 어루만지는 조태남 어르신. 그 ‘애지중지(愛之重之)’의 목록들에 가슴 뭉클해진다.
[강진] 쓸모없는 것에 닿는 측은지심의 눈길
강진 조태남 어르신의 보물들
남인희
2018-03-13
▲ (좌)반쯤 해진 가계부, (중)귀중한 기록들을 꽁꽁 싸맨 보따리, (우)80년 넘은 가방
조태남 어르신(93·전남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달마지마을)은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돈 벌러 일본에 갔던 아버지는 그이가 네 살 되던 해, 빈 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미소에 딸린 한 평 방이 여덟 식구의 가난한 둥지였다.
“밤으로는 남자들은 다 놈의집 사랑으로 자러 가고 어머니만 애기 데꼬 그 방에서 자는 거여.”
단칸방에 여덟 식구 살던 조씨집 장남 조태남이 성전면 유지가 된 건 마흔 살.
“마을 사랑에를 나가면 자네는 어디서 돈보따리를 주섰는가 나좀 갤쳐주소 그래. 한 20년 사이에 부자가 돼노니까.”
누가 묻든 그이의 대답은 간명하다. “누가 돈보따리를 갖다매낀다 말이요. 줍는 방법을 터득허문 되야라.”
“잘 입어도 못 입어도 나는 나여”
‘흙수저’ 조태남에겐 ‘밑천’이 무진장 있었다 한다.
“나는 젊었은께 그것이 밑천이고, 나는 부지런한께 그것이 밑천이고. 그러문 옳다, 그 두 가지 밑천을 이용하문 부자가 될 수 있겄다, 그런 결론을 내렸소.”
그때로부터 한시를 놀지 않았다.
“모타로 기계를 돌려서 새내끼(새끼)를 꽈. 한 시간에 한 바꾸를 빼내문 딱 쌀 한 되여. 하래내(하루 내내) 일허고 쌀 한 되던 받던 시절이여. 한 시간 놀문 하래 품삯이 없어진다 그 생각에 한 시간을 못 놀아. 밤이고 낮이고 새내끼를 꼬고 있어.”
“지비(집이,집=댁, 2인칭대명사)는 복받았소!”라고 말하는 이들한테 그이는 대답한다.
▲ 조태남 어르신. 편안할 적에도 위태로울 때를 잊지 않는다는 ‘안불망위’는 그의 인생철학
“복은 이 우주에가 따복(다복다복) 차 갖고 있는 것이 복이요. 놈이 복을 가지간다고 그 담에 나는 가지갈 것이 없는 것이 아니요. 복은 늘 따복 차 있으니 노력한 만큼 줍는 것이요.”
‘안불망위(安不忘危)'
버려진 것을 주워다 걸었다는 마루벽의 액자, 그 글자 속에 담긴 뜻을 새기고 산다. 편안할 적에도 위태로울 때를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시방 기와집 속에 들어앉았다고 어제의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농사를 50마지기를 지슴서(지으면서) 당아(아직) 꾸정 바께쓰 한나를 안사봤어.”
‘헌 놈을 새 놈으로’ 만드는 부지런과 재주가 있는 조태남. 그이한테는 소모품도, 폐품도 없다. 남한테는 ‘못쓸 것’도 그이 한테는 ‘쓸 것’. 자식들이 사다 준 구두를 곳간에 여러 켤레 쟁여 두고도 노상 낡을 대로 낡은 헌 신을 끌고 다닌다. 헌옷이 편하고 흙 묻은 옷이 편하다는 그이.
“옛말이 있어. 헌옷입고 일하기 좋고, 새옷 입고 말하기 좋다고.”
말하기보다 일하기 좋아하는 그이는 헌옷이 좋고 떨어진 신발이 편하다.
“똥장군을 비단보자기로 덮고 밥상을 꺼적으로 덮는다고 속이 바꽈지겄는가. 잘 입어도 못 입어도 나는 나여.”
“나는 평생토록 이 가방 한나를 가져봤소”
사람들은 그이의 정원에 와서 허우대 좋은 나무만 보고 간다. 구석구석 그이가 아껴 둔 보물들에 눈대는 이 없다. 이를테면 나무 아래 포강포강(포개어 포개어) 쌓아둔 사금파리 조각들*이 그이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다.
* 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
▲ 마당에 쌓아둔 사금파리 조각들
“어떤 할무니가 이 그륵을 낼치고(떨어뜨리고) 그 순간 그 가심이 얼마나 깜짝 놀랬을꼬 나는 그런 생각을 해. 그런 생각을 허고 모태논(모아 놓은) 것이여.”
그릇 조각들 사이엔 더러 청자 조각도 끼여들어 있을 터.
“고려자기를 바다에서 건지문 보물 몇 점 인양했다고 막 방송을 하고 그래.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어떻게 느끼냐, 옛날 옛적에 그 고려자기를 싣고 그 나막신짝만한 배로 무변대해를 건너 중국으로 폴러 가. 그러다가 무난히 못가고 배가 파손나서 깔앙근(가라앉은) 것이여.”
그이의 측은지심은 시간을 건너뛰어 난파한 배에 탔을 사람들에 가 닿는다.
“수백 년 전에 그 배가 파손나고 지그 아부지가 죽고 지그 아들이 죽은 그 식구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요.”
얼굴 모르는 옛적 사람의 한숨과 눈물도 내 것인양 애잔하게 보듬는 조태남 어르신에겐 공부가 원이었던 어린 소년의 마음이 담긴 낡은 가방 하나가 있다.
“일고야닯 살 묵었을 때 야학 댕긴 책가방이요. 나는 평생토록 이 가방 한나를 가져봤소.”
두꺼운 깍대기가 낡을 대로 낡아 책가방이라고는 짐작키도 어려운 팔십 년이 넘은 가방을 본다. 표지가 반쯤 해진 가계부는 성전중학교 서무과에서 내버린 것을 주워다 쓴 것이다.
“몇 년도에 농사를 내가 요러고 지었다 이런 것을 적어논 것이여.”
▲ 농사 기록이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는 오래된 가계부
추곡수매가와 인상률을 연도별로 정리한 페이지도 있다. 성전면사무소 직원이 이 기록이 치밀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더란다.
“나는 농사로 치산한 사람이니 농사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기록할라는 욕심이 있었소.”
▲ 곳간 벽을 빼곡히 매운 농기구들
마당 앞으로 당당히 들어앉은 곳간 벽에는 농기구들이 가지런하다. “놈은 건덕꿀(건성)로 봐도 이것이 다 내한테는 보물이요.”
수장고가 따로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이의 보관 품목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고치러 가면 “인자 지발 그만 땡개부씨요(던져 버리시오)”라는 말을 듣는 괘종시계도 그 중 하나. 시계포 주인은 새것보다 옛것이 좋은 그이인 줄을 아직도 모르나 보다. 한번 손에 들어온 인연은 끝까지 지켜내는 그이인 줄 모르나 보다.
‘걸럭지(걸레)’와 ‘가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간직한 것들마다 풀려나오는 사연들은 명주실 아홉 타래를 풀어도 닿을 것 같지 않은 우물 속처럼 깊고도 깊다.
“이 지갑은 스물일곱 살에 군인에 가서 헌 놈을 산 것이요. 그 군인은 나한테 싸게 폴고 그 돈으로 내 앞에서 빵 사묵었어. 그 사람 빵은 폴세(벌써) 없지만 지갑은 안즉 내한테 있소.”
그이가 스물세 살 되던 정월에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부의록(賻儀錄)’도 있다. ‘무자년 정월 13일’이라고 표지에 씌어 있다.
“얼마나 없었으문 요 손바닥만헌 요런 종우를 매서 썼을 것이요. 요것은 나 군인에 가고 없을 때 아부지 돌아가셨을 적 부의요. 이것은 백 년 전에 우리 할아부지한테 제관으로 나오시라고 통지 온 것이요.”
그이의 6대조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적 부의책도 여즉 지니고 있다.
▲ 부의책이며 온갖 기록이 담긴 책바구니
“아무개 집에서 콩을 한 되 갖고 왔다, 밤을 얼마, 감홍시를 몇 개, 그런 부의가 여그 다 들어 있어.”
그이한테는 추사가 쓴 먹글씨보다 귀한 것들이다.
“내가 이것을 만지는 것은 내 6대조 할아부지와 대화를 하고 내 할무니의 손을 잡는 것이오. 진품명품에 나가서 값을 받지는 못헐지라도 내 보물은 이것이여.”
그리 귀한 것들이 집집이 없으랴. 오래된 집들을 고치면서 뉘 집이든 옛것은 모다 싹 쓸어서 쓰레기에 넣고 소각을 해 버리는 게 그이는 가슴 아프다.
“우리 동네 어떤 아부지가 놈의 일을 댕긴디 모자도 없이 수건 한나 갖고 댕애. 머리빡에 하래내 찌고 있다가 먼지 탱탱 찐 놈을 저닉밥 묵을 때는 탁탁 털어 갖고 방에 들어가.”
일하는 집에서 내어주는 저녁밥을 그 사람은 못 먹었더란다.
“시늉으로 쪼깐 묵고 그 놈을 수건에다 싸. 그라문 옆에 쥔네집 일꾼들이 한 숟구락썩 덜어줘. 지그는 쥔네집서 끄니마다 배부르게 묵은다고. 그 놈을 싸갖고 와서 자석들을 믹임서 지그 아부지는 입도 안 다시고 보라꼬 있어. 자석들을 그렇게 키운 것이여.”
그 자식들한테 보배가 무엇이겠느냐는 그이의 물음은 준엄하다.
“지그 아부지가 지그 애래서 안 귐겨(굶겨)죽일라고 놈의 일허고 밥 싸갖고 댕인 수건이 그 집 보배여. 놈이 볼 때는 걸럭지(걸레)지만 지그한테는 그것이 가보여. 그란디 그런 것을 못쓴다고 땡개불어.”
그이가 사는 달마지마을*에는 농촌 여느 마을처럼 흔히 들시암이라고 부르는 샘이 있다.
* 월출산 끝자락 월각산 아래 자리한 송월리 대월(待月)마을을 한글로 풀어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으로, 달이 유난히 가까이 보여서 달맞이하기 좋다는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들에 가다 보문 어덕 밑에 옴팡하게 옹돌시암*이 있거든.”
* ‘시암’은 ‘샘’을 이르는 전라도말로 ‘옹돌시암’은 ‘옹달샘’이다. 지형에 따라 저절로 생겨난 데도 있지만 들일 후에 잠깐 흙손을 씻을 수 있도록 작고 오목하게 땅을 파서 만든 샘이다
그 시암이 소용될 데 없다고 묻혀지는 것이 아깝고 짠하다.
“전에 구식 어머니들은 애기를 키움서 방에다 가돠놓고 밭을 매러 가. 봐줄 사람이 없어. 밭을 맴서 맘이 편했을 리가 없어. 그러다가 인자 점심때가 되문 애기 젖을 물리러 와. 땀흘린 미영 치매저고리 입고 오다가 그 옹돌시암에서 젖통을 시쳐. 더운 몸이라 더운 젖통 그대로 애기를 믹이문 행이나 설사할까 무선께.”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그런 시암 앞에 그이는 문화재처럼 푯말을 딱 세워놓고 싶다. <이것은 우리들 구식 어머니가 밭을 매다가 정신도 넋도 없이 집으로 옴시로 애기가 탈날까 싶은께 젖통 시치고 와서 애기를 먹이던, 그 어머니 젖통 씻던 시암이다. 옛날에 우리 구식 어머니들은 요렇게 생활을 이뤄나가면서 우리를 길르셨다> 또박또박 그렇게 새기고 싶다.
▲ 오래된 샘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의 집에는 여전히 오래된 우물이 있다
마당에도 곳간에도 방안에도 들에도 보물이 넘치는 그이. 그렇다면 ‘조태남의 보물 1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즉답하신다.
“우리 집에 화재가 났다 하문 제일 모냐(먼저) 갖고 나갈 것을 내 맘으로 정해 놓고 사요. 어머니는 사진도 없으니 아부지 사진 한나요.”
눈에 스치는 그 무엇이라도 기나긴 세월 건너에서 빛나는 사람의 속내를 짚어내고 어루만지는 조태남 어르신. 그 ‘애지중지(愛之重之)’의 목록들에 가슴 뭉클해진다.
월간 <전라도닷컴> 기자로 전라도 고샅고샅 어르신들의 생애와 정신을 받아적고 있다.
* 월간 <전라도닷컴>은 오늘 아니면 기록하지 못할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를 기록하는 잡지이다. 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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