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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주보며 맞이하는 또 다른 세상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

인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탐구

2017.04.25


  •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

계속되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문에 현답을 들려주실 여섯 번째 손님으로 김찬호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Q. 인문이란 무엇일까요?

A. “존재 가능성에 대한 탐구”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람의 무늬에요. 다른 동물은 자기를 몰라도 크게 불행하지 않은데 인간은 자기를 모르면 다른 힘에 지배를 받고 욕망에 시달려요. 의도와 상관없는 결과에 스스로 빠지기도 하고요. 특히 현대사회는 과거와 달리 개인의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위태로워지고 있어요. 과거는 시간적으로는 전통, 공간적으로는 공동체가 개인을 어느 정도 묶어줬고 개인이 아무리 힘을 쓰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모두가 계속 새로운 경험에 노출되고 있어요. 문제는 그런 새로운 경험에 대한 대처 방식이 전통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윗세대에게 배울 수 없기 때문에 각자 공부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쉽지 않아요. 인문학이란 결국 여러 층위가 있다고 봐요. 일단은 자기 자신, 인간이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잘 읽어내고 상황을 해석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에요.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탁월함 같은 게 있거든요. 근데 그걸 죽을 때까지 전부 발견하지 못한다는 거죠. 인간의 밑바닥에는 추함도 있지만 숭고함도 있어요. 모든 가능성을 전부 봐야 한다고 봐요. 그걸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비천한 지경에 떨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를 잘 다스리고 다듬으면 굉장히 드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존재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인문학이라고 봅니다.

Q. 드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A. “자기를 넘어서는 도리,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을 구현하는 것 ”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높은 차원은 지위와 권력, 돈, 외모 같은 외형적인 것들이에요.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스펙이나 외모 등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평가하죠. 물론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그게 전부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높은 무언가로 올라가 있지만 사실 삶은 상당히 피폐하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잖아요. 반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비참한 지경에 있지만 그 안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이들이 있어요. 자기의 처지를 넘어서 도리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구현하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무시하기 쉬워요. 그런데 사실은 보이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해요. 드러나는 것에 자기를 몰아가니까 드러나지 않는 것에는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아이들 성적 높이고 연봉 올려주려고 노력했는데, 나중에 보니 가족 관계가 전부 깨어져있는 거죠. 이런 가족 관계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삶을 제대로 평가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게 중요해요. 인문학적인 성찰을 통해 이런 관점을 기를 수 있다고 봐요.

Q. 우리 삶의 어디까지가 인문활동일까요?

A. “‘이게 바로 사는 거지’ 이런 느낌을 갖게 만들어주는 모든 게 인문활동이에요.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손님을 잘 맞이하는 것, 낯선 사람과 함께 밥을 만들어 먹는 것, 산책을 하는 것도 포함되죠.”

별을 하염없이 바라 보거나 손님을 잘 맞이하는 것도 인문활동이 될 수 있어요. 또한 낯선 사람과 함께 밥을 만들어 먹는 것, 산책을 하는 것도 포함되죠.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촛불 광장도 인문활동 속에 있다고 봅니다. 광장은 언어의 세계였거든요. 규탄하고 분노했지만 그래도 말의 힘을 통해 “우리가 살아 있다” “역사를 만들고 있다” “우리가 주인이다” 이런 선언을 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 광장을 끝내고 나서는 다시 밥벌이에 비굴해져요. 그렇다고 해서 광장이 가치가 없는 게 아니에요. 그 일상 속에서 광장의 뿌듯함을 자꾸 만들어가야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없다 보니 광장에서 한꺼번에 터져요.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일상의 축제가 없으니 대박나는 거죠. 이런 게 우리의 결핍이나 소망을 응축한다고 봐요. ‘이게 바로 사는 거지’ 이런 느낌을 갖게 만들어주는 모든 게 인문활동이라고 봐요. 집을 지을 때도 인문적으로 짓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이들이 있어요. 버스를 운전하시는 분들 중에도 승객들의 마음을 디자인하는 분들이 있어요.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들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증진시킨다’ 이런 보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그게 인문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가치를 드높이는 거죠. 그런 점에서 대학의 인문학은 문헌에만 매몰되다 보니 위기에 처한 거예요.

Q. 대학 내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A. “대학이 자율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인문학을 살리기는 어렵다고 봐요.
인문학은 그야말로 주체성이기 때문이죠”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대학이 무엇으로 움직이는가를 살펴보면, 지금의 대학은 자율성이 없어요. 대학이 자율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인문학을 살리기는 어렵다고 봐요. 인문학은 그야말로 주체성이에요. 스스로 자기 생각을 키우는 게 인문학인데, 어떻게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돈이 무서운 거예요. 물론 그 안에서도 훌륭한 연구를 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연구자의 잠재력은 돈 안에서는 살아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대학의 인문학이 살려면, 교육부가 돈을 기준으로 대학을 서열화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돈을 끌어오는 게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리면 어려워져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심지어 공학에서도 깊게 가야 하는데, 인문학 논문이 일 년에 몇 편씩 나온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거든요. 일년에 인문학 논문 몇 편 썼는지 기준으로 실적을 평가한다는 게 주체성을 잃은 거죠.

Q. 반면에 대중 인문학은 열풍이에요. 그런데 내용면에서는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이런 대중 인문학 열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A.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모두 좋은 것만 있을 수 있겠어요. 나쁜 게 좋은 게 되면서 두루두루 섞이며
상호작용하는 거죠. 다만 여기서도 돈의 논리가 작동하면 이상해지기 시작하죠. ”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모두 좋은 것만 있을 수 있겠어요. 나쁜 게 좋은 게 되면서 두루두루 섞이며 상호작용하는 거죠. 다만 여기서도 돈의 논리가 작동하면 이상해지기 시작하죠. 제가 봐도 아니다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선을 딱 긋기보다는 그 안에서 새로운 싹이 나온다고 봐요. 다만 여기서도 돈의 논리가 작동하면 이상해지기 시작하죠. 사람들을 값싸게 위로하는 거, 현혹시키는 것과 같은 순간 순간 소비되는 인문학이 많잖아요. 요즘에 강의 쇼핑이라고 부르는, 만사 다 제치고 좋은 강의만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실제 삶을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공부만 하고 삶의 변화는 없을 수 있어요. 차라리 강의 조금 덜 듣고 집에서 가족과 대화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보이는 분들이 계세요. 사실 공부가 중독성이 있어요. 저도 공부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무리 해도 끊임없는 콘텐츠가 있기 때문에 지겹지 않죠. 그런데 거기에서 한정되고 마는 것, 이건 아쉬워요. 갑자기 센 걸 요구하면 안되지만, 점점 더 성장해서 인문학적인 축적을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나 가족 등 여러 자리로 스며들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좀 더 유도하는 인문학도 필요하다고 봐요. 이런 건 책이나 강의로만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걸 토대로 해서 여러 가지 문화 운동을 할 수 있다고 봐요. 꼭 인문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사회 운동도 인문학적으로 변화될 수 있어요.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똑같이 환경 운동, 경제적인 운동, 정치 운동을 하더라도요. 이런 식의 성찰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것이 인문학의 텍스트가 될 수 있어요.

Q. 지금 한국은 페미니즘 열풍이에요. 그 동안 억압 받았던 목소리가 표출되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A.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틀로 규정하지 말자는 목소리잖아요.
사람을 나이로 규정하지 말고 젠더로 규정하지 말자는 거예요. 사람 안에 훨씬 더 다른 요소들이 있는데, 왜 그걸 획일화해서 억압하냐는 거죠. 그 억압을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봐요. ”

페미니즘이 80년대에 있었지만 꽃을 피운 건 90년대부터예요. 여성학과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나마 민중 운동 가운데 살아 남아서 맥을 잇고 있는 게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이 두 가지라고 봐요. 노동운동은 자체 흐름으로 가면서 시민사회와 괴리가 생기는 느낌이 있었고, 시민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이어간 게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인 것 같은데, 그러다가 신자유주의와 IMF가 오면서 여성 보다는 다른 축, 이를테면 다시 노동이 중요해졌어요. 대학이 중요한데, 언제부턴가 대학에 오는 여학생들이 차별 경험이 없이 온단 말이에요. 요즘은 딸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아들만 공부시키는 일 같은 건 없잖아요. 여학생들이 대학 내에서도 차별의 경험을 크게 받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알게 되는 거예요. 딸로서는 모르다가요.
크게 보면 젠더라는 게 하나의 범주잖아요. 그런 범주는 여러 개가 있어요. 장애, 나이, 지역 등 굉장히 많은 범주가 우리 사회에서 작동한단 말이에요. 너무 절대화 되어서 권력이 개입되면 어마어마한 억압이 일어나죠. 그런 걸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봐요.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그런 틀로 규정하지 말자는 거잖아요. 사람을 나이로 규정하지 말고, 그 안에 다른 요소들이 있는데 왜 그걸 획일화하냐, 이런 거예요. 그 획일화 밖으로 나가는 과정인데, 그렇게 되려면 그런 범주로 인해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초기 과정에서는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 다른 범주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남자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공격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으려고 보이는 게 있어요. 경제가 좋을 때는 파이가 커지니까 여유가 있어서 자존감이 그나마 유지가 되는데 지금은 전세계 공통적으로 저성장 시대에요. 위기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경제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요동을 겪고 미국 같은 곳에서는 외국인 혐오로 나타나죠. 우리 나라는 외국인이 많지 않더라도 계층으로 분류되어 있잖아요. 대신 젠더로 나타나는 거예요. 일베부터 시작해서 여성 혐오까지. 과거에 페미니즘이 한창일 때도 혐오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왜 이렇게 혐오가 드러나느냐, 이게 더 문제잖아요. 사람에 대한 적대감, 증오심, 이런 게 굉장한 에너지인데 그런 것을 혼자서는 못하고 꼭 집단적으로 누군가를 목표로 삼아 공격한다는 말이죠. 선거에서도 그렇고요. 상대를 악마화하는, 이런 게 크단 말이에요. 사실 적대심을 갖는 사람들 안에는 두려움이 있어요. 자기에 대한 두려움. 근데 그 두려움을 집단주의로 같이 결집해서 이상한 방식으로 은폐하는 거죠. 자기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고요. 그 은폐하는 방식은 자기들의 범주와 다른 범주를 목표로 해서 그걸 비하하거나 경멸하거나 악마화하죠. 이런 큰 역동 속에서 봐야 될 것 같아요.

Q. 갈등의 양극화가 심해 보이는데요,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갈 수 있을까요?

A. “그런 범주를 해체하는 작업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물론 말이 중요하긴 한데, 말로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새로운 모델이 나와야 된다고 봐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여주고 구현해내야 해요. 남녀가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훨씬 더 재미있고 생산성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

그런 범주를 해체하는 작업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물론 말이 중요하긴 한데, 말로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새로운 모델이 나와야 된다고 봐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여주고 구현해내야 해요. 남녀가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훨씬 더 재미있게 살고 생산성 높은 삶을 살면서 세상을 유쾌하게 바꿔갈 수 있다, 이런 사례를 보여주기 시작해야 된다고 봐요. 우리가 너무 사소한 것에 절대성을 부여해서 대립 전선을 구축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어요. 사실 벗어나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어요. 우리 사회의 대립이라는 게 그 안에 갇혀서 그걸 증폭시켜서 그렇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다른지 이야기해보면 그렇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근데 서로의 소속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점점 더 벽이 두터워지는 거예요. 이게 젠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지역문제까지 있어요. 인간에게는 작은 소집단에 자기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절대화하는 의식이 있어요. 그래야 내가 안심이 되거든요. 인간이 약해서 그래요. 인문학은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거예요. 오히려 냐약함을 인정할수록 그걸 넘어설 수 있어요.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할 때 이상한 방식으로 폭력이 만들어져요. 인문학은 나약함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성찰이라고 봅니다.

Q. 다른 이를 향한 혐오감은 일상생활인 직장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뒷담화 속에서 상대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뒷담화로 스트르레스를 푸는 이들도 있지만 반면에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평가하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왜 누군가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A. “다른 사람들과 연결은 되고 싶은데 딱히 연결고리가 없는 거예요. 제 3자의 흉을 보는 거, 그게 제일 쉬운 연결고리죠. 너무 안전하거든요. 서로 다칠 일이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신뢰의 고갈이라고 봐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은 되고 싶은데 딱히 연결고리가 없는 거예요. 제 3자의 흉을 보는 거, 그게 제일 쉬운 연결고리죠. 너무 안전하거든요. 서로 다칠 일이 없고 싸울 일이 없어요. 물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다르면 싸움 나지만 대개는 비슷하게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게 돼요. 누구나 다 그런 게 있어요. 자기 스토리가 없는 거예요. 제3자의 이야기를 계속 한다는 건, 내 이야기도 없고 눈 앞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없는 거에요. 그런데 혼자 있기는 싫을 때, 다른 누군가를 두고 이야기하면 안전하죠. 사실 뒷담화는 안 할 수가 없어요. 사는 재미기도 하고, 인류의 오랜 생활 방식이에요. 그런데 그 비중이 지나치게 되면 공허해지죠. 다른 사람 뒷담화 한다고 자신이 올라가는 거 아니잖아요. 자기 삶을 지탱하는 게 뭔지 봐야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신뢰의 고갈도 있어요. 남도 나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 뒷담화는 신뢰 없어도 돼요. 내 이야기, 상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1차 적으로는 자기 신뢰가 없을 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나의 이야기를 했을 때 남들이 나에 대해 부정적 피드백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충만함과 뿌듯함, 자신감이 있으면 괜찮은데, 내가 나를 신통치 않게 생각하면 남들에게는 중요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그런 괴리가 있어요. 내가 나를 보면 별 볼일 없어 보이는데, 남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에요. 더 뛰어나 보이고 싶어요. 굉장히 분열적이죠. 이걸 좁혀가는 게 성숙이에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지 신경을 덜 쓰는 쪽으로 가는 거죠. 그런데 점점 더 반대로 가고 있어요. 성숙한 존재로 자랄 수 있는 인문학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 거에요. 미성숙한 채로 오히려 퇴행하고 그럴수록 남의 관심과 평가에 목 마르게 되고 온 신경이 바깥에 가 있는 거죠. 근데 평가 받을 게 없어요. 잠깐 보이는 사람에게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은 할 수 있어도 매일 보는 직장 동료에게 뭐 얼마나 평가 받을 수 있겠어요. 사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가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뒷담화는 남을 깎아 내려서 ‘우린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걸 집단적으로 확인하는 거라고 봐요. 왜 내가 뒷담화를 하는가, 그때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인문학이에요. 이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뒷담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어요. 그러려면 자기 안에 열망이 있어야 해요. 힘이 있어야 하죠. 좀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기운 같은 거요. 사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말 외에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거든요. 본인이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자기 삶의 조건을 바꾸어 보는 것도 큰 도전이 될 수 있어요. 이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삶의 기쁨을 만들어보자. 그러려면 일단 본인이 먼저 감동해야 돼요. 자기를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될 수 있어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A. “좋은 삶은 매 순간 충만한 삶이에요. 작은 것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삶이죠.”

좋은 삶은 매 순간 충만한 삶이라고 봐요. 작은 것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삶이요. 저는 매일 아침 제 딸이 출근할 때마다 안아주고 격려해줘요. 5초도 걸리지 않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그걸 일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삶은, 나의 열망과 세상의 요구가 만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좋은 삶이죠. 내가 기뻐서 했는데, 다른 사람의 무언가가 채워지고 서로 지지하고 신뢰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이런 삶이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문학은 자기의 내면을 넓히는 일이에요. 자기를 넓히면 어떤 것이 들어와도 괜찮아요. 그릇이 작으면 쉽게 요동친단 말이에요. 근데 그릇이 크면 무엇이 들어와도 별 거 아니게 돼요. 그릇을 넓히는 작업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작은 것들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발견한 기쁨에 기꺼이 남을 초대하고 나도 초대받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모여서 광장도 되고 사소한 일상의 기쁨이 축적되면 용기를 내서 세상의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거라고 봐요.
그리고 개인에게는 자유,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 사회에는 정의가 있는 삶이 좋은 삶이죠. 나는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나는 우애를 가지고 가족과 타인을 바라보는가, 그들을 사랑하는가, 마지막으로 사회에 대한 정의를 책임지고 있는가. 이 모든 걸 균형 있게 가져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봐요. 사회 정의만 외치는 사람은 이것만 봐서 문제가 된다고 보거든요. 다 이렇거든요.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돌보지 못할 때가 있죠. 이 세 가지를 균형 있게 갖춰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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