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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주보며 맞이하는 또 다른 세상

고전문학평론가 고미숙

삶의 지도를 다시 그리다

2017.03.28


  • 고전문학평론가 고미숙

계속되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문에 현답을 들려주실 다섯 번째 손님으로 고전문학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Q. 인문이란 무엇일까요?

A. “삶의 형식을 새로 창안하는 것”

인간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인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의 인문학은 지성의 탐구를 통해서 삶의 형식을 새로 창안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에서 무언가를 탐구하고, 탐구 자체에서 멈추는 건 아쉽고 삶의 형식, 삶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이죠. 즉,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를 창안하는 일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우리 삶의 어디까지가 인문 활동일까요?

A. “자기 존재를 근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게 인문활동이에요”

인문 활동이라는 건 읽고 쓰고 관계를 만들어내고 자기 존재를 근원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건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해요. 사유에 있어 예외가 있으면 안돼요. 나의 욕망, 무의식, 내가 만드는 관계, 조직에 대한 사유에서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관한 것까지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죽음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종교에서 해석하는 걸 어설프게 받아들이잖아요. 정말 절실하게 내 삶의 문제로 해석을 하지 않아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건 되게 중요한 문제에요.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가능하면 자유로워져요. 자유가 생긴다는 건 직업, 노동, 화폐, 욕망 같은 종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내가 직업이 없으면 죄의식을 느끼고 돈이 없으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 이런 게 다 부자유에요. 그리고 성욕이든 식욕이든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 삶을 관리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는 억압이고 구속이에요. 그런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가능해지면 카오스적인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돼요.

Q. 인문학 열풍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A. “우리 삶에는 정신적 지표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대중 인문학 열풍은 대학의 쇠락과 맞닿아 있어요. 대학이 삶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니까요. 정치인도 주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그런 종교 지도자도 없어요. 인생에 대한 지도가 비니까 그걸 찾아 다니는 거에요. 대학이 그런 지성을 창안하고 이끌어 낼 때는 굳이 대학 밖에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물적 토대가 넓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에요. 도서관이 많이 생기고 구청이나 평생 학습관 이런 시설이 좋아졌어요. 그곳을 이상적으로 메울 수 있는 활동이 바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학력도 전체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유동인구가 늘었어요. 이 모든 것이 결합해서 사회 전반으로 인문학 열풍이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에는 정신적 지표가 필요해요.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느낌도 있어야 하고요. 그런 걸 느끼기에 책이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Q. 대중 인문학은 열풍인데 반해 대학 내 인문학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대학 내 인문학이 죽는 것 보다는 대학 자체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의 인문학은 지성의 탐구로써도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지털이라는 문명의 변화와 맞춘 인문학을 새롭게 만들지 못했어요. 그런 이유로 고사를 하게 됐어요. 인문학이 삶의 지도를 바꾸는 거라면 문명의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인문학이 만들어졌어야 해요. 그런데 그걸 못했죠. 그렇기 때문에 공대나 이과, 기술과 비교하면 아무 쓸모가 없고 그렇다고 기술 문명을 이끌어갈 비전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거죠. 시대적으로 대학이 자본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이 고사되는 거라면 그런 이유는 극복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자본으로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해요.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 못했어요. 자본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대학 안에 있는 청춘의 열망에도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Q. 대학 내 인문학을 장려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자본의 원리를 돌파하거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방법은 원리적으로 따지면 간단해요. 자본의 원리를 돌파하거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그러면 대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시장 원리에서 한탄만 하고 있으면 안돼요. 그리고 새로운 길을 뚫지 못한 상태로 학생들만 억지로 모으면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제도의 보호를 받고서 가는 건 공부의 주체들이 자기 존엄성을 가질 수가 없어요.
현재 대학 내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거 말고는 할 게 없단 말이에요. 지성을 연마했는데, 계속 입력하는 일을 하게 돼요. 데이터베이스 관리만 하다 보면 어떻게 공부의 즐거움이나 지성인으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겠어요. 새로운 지성을 창출해야 해요. 대학원 구조 내에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과 연관된 공부의 길을 열어서 형성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게 학내가 될 수도 있고 밖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 고전문학평론가시잖아요. 고전을 읽고 싶어도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고전 읽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A. “고전이 인생과 세상의 이치를 담았다는 것만 이해하면 돼요”

고전 읽기를 탁구 치기에 비유해볼게요. 탁구를 잘 치고 싶다고 하면, 이런 욕망은 탁구 치는 걸 보면서 느낀 거예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탁구를 치고 싶다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치는 거 보니 너무 재미있겠다, 장비도 간단하고 부담도 없네. 이런 욕망이 먼저 들어와야 해요. 그 다음에는 탁구채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죠. 고전도 마찬가지에요. 한문도 알아야 하고, 고전에 대한 소양도 있어야 하고, 이런 생각으로 고전 읽기를 시작하려면 이미 고전을 배웠어야 해요.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시작을 못했을 거예요.
고전이 인생과 세상의 이치를 담은 것이라면, 그것만 이해하고 있으면 돼요. 인생과 세상의 원리와 이치, 그런 게 담겨 있다, 난 그걸 배우고 싶은가 물었을 때 맞다면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고전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양식인지 아는 것, 그게 가장 기본기에요. 우리가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처럼 고전의 지침을 깨닫는다 그것만 알면 돼요. 그러면 나중에 다시 읽게 돼요. 40, 50대가 되면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 정신과에 가거나 점을 보러 다니거나 멘토를 찾아요. 그때 고전을 읽어봐야겠다 이쪽으로 갈 수도 있어요.

Q. 요즘 혼술, 혼밥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많아요.
젊은 층에는 아예 결혼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고요.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 “1인 가구, 혼술, 혼밥족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얼마나 쪼개어 놓았는가를 나타내주는 결정판”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얼마나 쪼개어 놓았는지 나타내주는 결정판이에요. 핵가족으로 안 되니 하나씩 나누어 버린 거죠. 1인 가구나 혼술, 혼밥을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해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먹으면서 외부와 관계를 갖지 않는 건 젊은 시절에는 일시적으로 편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혼자가 정말 좋아서 그런 거라면 혼자 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접속도 하지 말아야죠. 스마트폰이 없는데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고,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싶어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거에요. 일본에 50, 60이 되었어도 부모가 돌보고 있는 세대가 있어요. 부모가 죽으면 아무도 없는 거예요. 히키코모리라고 하죠.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그런 캐릭터가 나왔어요. 혼술족, 혼밥족이 사실은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에요.
결혼은 안 해도 괜찮아요. 아이도 낳지 않아도 되는데, 다른 관계로 변화를 해야 해요. 가족을 떠나는 다른 관계로요. 이혼하고 혼자 사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따로 살면 고독사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삶에 무슨 의욕이 있을까요?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만 욕망이 생기는 거예요. 희로애락이요. 이렇게 반응을 해야만 생기는 건데 계속 스마트폰 접속만 몇 십 년째 하다 보면 고립 속에서 중독이 되는 거에요. 거기에 어떻게 자유가 있어요. 그건 선택한 삶이라 할 수 없어요. 자본주의가 자본의 논리로 밀어 붙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 찢어진 거에요. 만약에 스마트폰이 없다면 사람들은 전부 광장으로 나올 거예요.

“정치나 경제가 사람을 연결해주는 쪽으로 가야 해요. 혼술족, 혼밥족 같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면 안 되요. 이 사람들을 계속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어요. 마을 복지도 연결로 가야 해요. 돈만 주면 고립되는 쪽으로 가요. 나와서 어울릴 수 있는 쪽으로 이끌어야죠. 이런 게 치유고 돌봄이에요.”

어느 골목에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면 뭐라도 하잖아요. CCTV라도 달아요. 근데 지금은 계속 통계만 보여주고 있어요. 일자리가 없어서 결혼을 안 한다. 이런 통계만 보여줘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연히 결혼할 엄두도 내지 않고요. 그러다 보면 조만간 고립 상태가 돼요. 그리고 그때는 누구를 만날 엄두조차 나지 않아요. 얼마나 위험한 일이에요? 담배 보다 몇 백, 몇 천 배 위험한데요.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미디어에서 경고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같이 모일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 해요. 돈이 들어가지 않는 것 중에서 저는 공부가 가장 좋은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A. “좋은 삶은 지혜와 우정으로 자기 존재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이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억압되고 구속된 상태로 태어나요.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죠. 좋은 삶이란 지혜와 우정으로 자기 존재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이에요. 구속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 가는 길에는 우정과 지혜가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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