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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누웠던 밤, 더이상 여우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지 않고
내 얼굴 위로는 휴대폰의 푸른 빛만이 일렁이던... 나는 그 시간들을 후회한다."

손세라

2019-11-13

3년 전 여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배움의 기회가 당신에게까지 가닿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시고, 나는 할머니와 다섯 살 때부터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고 TV를 보고 놀이터로 놀러 나갔다. 내가 가진 할머니와의 가장 좋은 추억 중 하나는 할머니가 나의 유치원 숙제를 도와주었던 기억인데, 내가 덧셈 문제를 숙제로 받아오면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셈을 해서 답을 알려주었고 그 답은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줄기차게 외우는 구구단을 점검해줄 수 없었고 받아쓰기가 왜 틀렸는지 알려주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밤마다 여우누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술술 풀어낼 수 있는 옛날 이야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건 할머니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대단한 교훈을 담은 우화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나 <보고 또 보고> 같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끝나면 우리는 이불을 정리하고 누웠다. 그대로 잠에 들기 아쉬울 때마다 나는 할머니한테 여우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는데, 그게 바로 여우로 변한 누이가 소도 잡아먹고 개도 잡아먹고 결국 그의 부모까지 잡아먹는다는 설화, <여우누이>다. 나는 할머니처럼 그렇게 재밌고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의 특성상 세부적인 사항은 이 책과 저 책이 다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할머니 버전의 <여우누이> 설화를 기억하고 있다.


<여우누이>는 한 부잣집에 막내 딸이 태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들만 셋이고 딸이 없던 한 부잣집에 귀여운 딸이 태어났는데, 아이들은 건강하게 컸고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집에서 기르는 닭도 소도 갑자기 피범벅이 된 채 죽어나가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이를 이상히 여긴 부모가 아들들에게 어찌된 일인지 밤에 몰래 지켜보라고 하는데, 아들들은 모두 막내 누이가 그 범인이라고 일렀다. 부모는 화가 나서 세 아들을 내쫓아버렸고, 세월은 흐른다. 


할머니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어린 나는 통통한 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할머니는 목소리를 과장하지도, 이것저것 살을 덧붙이지도 않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이야기를 듣는 그 밤에 내 머리 속에는 이야기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여우누이와 파란 병 노란 병 빨간 병


어쨌든 세월은 흘렀고, 그렇게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던 막내 아들이 부모의 소식이 궁금해서 살았던 마을에 가보기로 마음 먹었는데, 알고 지내던 한 노파가 파란 병과 노란 병, 그리고 빨간 병을 주면서 급할 때 꼭 쓰라고 당부를 한다. 옛 마을에 가보니 이미 부모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채였다. 막내 누이가 마침 “오라버니” 하면서 그를 부르게 되고, 이게 모두 그 누이의 짓이겠거니 눈치를 챈 막내 아들은 꾀를 부려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누이는 여우로 형체가 변하면서 재빠르게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노파의 세 가지 병이 생각난 막내 아들은 먼저 파란 색 병을 누이에게 집어 던진다. 파란 색 병은 바다로 변해 여우가 쫓아오는 걸 방해했지만 여우는 능숙하게 헤엄을 쳐서 빠져나왔고, 노란 색 병을 던지니 가시 덤불이 나왔는데 이것도 잘 헤쳐 탈출한다. 마지막 빨간 병을 던지니 그것이 불이 되어 여우를 태워죽이고 막내 아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우누이는 이렇게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듣다보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 입장에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딸은 결국 여우로 변해서 집안의 가축도 다 잡아먹고 부모까지 잡아먹는 천하의 나쁜 인물이 되고 아들은 여우누이를 물리치는 영웅이 된다는 플롯이 실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요즘은 이야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이 어떤 역할로 그려지는지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을 때의 나는 이야기가 한편으론 무섭지만 다른 한편으론 너무 재미있었다. 난 할머니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어떻게 외워서 나에게 매일 밤 그렇게 재미있게 구술을 해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때는 그걸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이야기꾼처럼 여우누이를 흉내냈던 할머니는 이것 말고는 다른 옛날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내가 가끔 소리내어 책 읽어주는 것을 참 좋아했다. 하루에 한 권씩 <소공녀>나 <걸리버 여행기> 같은 동화책을 읽어나갔던 그때, 할머니는 이야기의 앞부분이든 뒷부분이든 딱 잘라 먹은 중간 부분이든 가만히 소리나는대로 듣는 것을 좋아했다. 여우누이처럼 책 내용을 달달 외우지는 못하셨지만 어떤 날은 날 앉혀놓고 ‘저번에 읽어줬던 그 고아 여자애 이야기 한 번 더 읽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문득 영화 <더 리더, The Reader>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 영화가 내 ‘왓챠 리스트(영화 평점 사이트)’에 별점 5점짜리 영화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영화를 보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었던 것도 어쩌면 그때의 할머니와 나의 모습이 생각나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휴대폰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한번도 여우누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와 나


우리가 함께 누웠던 밤, 더이상 여우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지 않고 내 얼굴 위로는 휴대폰의 푸른 빛만이 일렁이던 그 시간들. 나는 그 시간들을 후회한다. 지금은 연락이 모두 끊겨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이들과 문자와 전화를 하느라 놓친 할머니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아쉽고 또 아깝다. 할머니에게 책 읽어드리는 시간도 더이상 없었다. 우리의 밤을 타고 흐르던 이야기는 어느새 끊어져 버렸다.


요즘 글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 분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쳐드리는 프로그램이 많다. 그런 프로그램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이 어릴 적 놓쳤던 배움의 기회를 다시 쥐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면서. 할머니 혼자서라도 내가 어릴 때 읽던 책을 직접 읽을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언젠가 더 나이가 들어서는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 그러니까 여우누이 설화 말고 할머니의 진짜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별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힘들고 무서웠다고만 했다. 밥 지어 먹고 사는 게 힘들었고 전쟁을 겪는 게 무서웠다고. 그 이후에는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했고, 손주들 기저귀 갈아입히고 밥해주는 게 또 고되었다고 했다. 별로 해줄 이야기가 없다고 하는 할머니 표정을 보고 나는 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923년, 어느 집의 막내 딸로 태어나 글도 익히지 못하고 남자 형제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던 할머니의 진짜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숱한 밤들, 할머니가 해주었던 <여우누이> 이야기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따뜻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자기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언젠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도 그런 이야기 하나쯤은 꼭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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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라
손세라

주 5일, 성실히 회사를 다니고 퇴근 후에는 부지런히 배우고 몸을 움직이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뭘 잘하는지 찾지 못해서 이것저것 도전해보려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보고, 기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외국어를 배우면서 주어진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보니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다고 속상해 하지 않고 내 잔디를 소중하게 가꾸는 법을 알아가게 되더라고요. 정말로 내가 어떻게 잘 좀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기 전에 항상 생각해요. 이미지_ⓒ손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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